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49화 (149/239)

#149화. 레인

수철은 이유를 묻는 마크에게 이번에 준비하는 앨범에 이언을 참여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새 또 앨범을 구상한 거야? 저번 앨범 끝낸 지 얼마나 됐다고?

마크는 수철이 너무 서둘러서 앨범을 발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에 한 번 앨범을 내는 마크에겐 수철이 쉬지 않고 계속 앨범을 내려고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하긴, 넌 앨범을 내면 다 팔리니까.

“…….”

수철은 할 말이 없었다. 쓰고 싶은 곡이 있으면 쓰고, 곡이 모이면 앨범을 내는 건데 시기를 맞춰야 한다는 뉘앙스가 이해 안 됐다.

마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어떤 장르의 앨범인데 이언을 얘기하는 거야?

“이번에 하려는 앨범은 모든 곡의 장르가 다 달라.”―장르가 다 다르다고?

마크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이언을 만나겠다며 장르가 다 다르다니. 하지만 수철은 짧게 대답했다.

“응, 이번엔 그래.”

―몇 곡이나 들어가는데?

“6곡”

―그럼 6곡의 장르가 다 다르다는 말이야? 재즈, 블루스, 락, 팝, 이런 식으로?

“맞아.”

―햐, 참.

마크는 황당했다. 실소를 내뱉고 말을 잇지 못했다.

수철은 그런 마크를 보며 간단히 앨범에 관해 설명했다. 다시 한번 이언과의 약속을 부탁했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 이언이랑 일정을 주선해 줘.”―알았어.

* * *

수철은 이번에 긴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앨범에 대한 스케치를 했다.

이번 앨범은 기존의 앨범과 마음가짐이 다르다. 새로운 시작이다. 오롯이 자신의 느낌에만 집중해서 음악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 모든 앨범을 그렇게 할 생각이다. 가수나 연주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들이 자신을 염두에 두게 할 생각이었다.

수철은 우선 직접 가사를 써 보기로 했다. 작품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동안 음악을 만들고 타인이 만든 가사를 붙일 때마다 음악과 가사 사이에 항상 간극이 있었다. 아무리 잘 쓴 가사도 수철이 만든 음악의 느낌을 시원하게 대변하지는 못했다. 수철은 항상 그 간극을 줄이고 싶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과 타인이 만든 가사 사이의 간극.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직접 쓰는 방법밖에 없었다. 수철이 직접 자신의 음악에 가사를 붙이지 않고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수철은 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 노트와 연필부터 챙겼다.

자신의 곡과 타인의 가사 사이에 발생한 간극을 조절하느라 발생한 답답함과 갈증을 해소할 생각이었다.

내친김에 앨범에 대한 접근법도 바꿨다.

이번엔 가사를 먼저 써 놓고 거기에 맞는 장르를 붙여 볼 생각이다.

가사를 먼저 쓰고 음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건 그간 앨범 작업을 통해 깨달았었다. 가사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시도를 안 할 이유가 없다.

앨범에 모든 장르의 음악이 들어갈 수도 있다. 어떤 가사를 쓰느냐에 따라.

음악은 열려 있다.

팝이 될 수도 있고, 락이 될 수도 있고, 재즈가 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음악이 될 수도 있다.

수철은 계획대로 여행하며 계속 가사를 썼다.

차를 세워놓고 끝없이 펼쳐진 자연을 보며. 또 몰아치는 비를 맞으며. 붉게 내리쬐는 햇볕에 시달리며.

차가운 밤, 차 안에서 눈을 감기 전까지 쉴 새 없이 가사를 썼다.

머릿속의 이야기가, 가슴에 느껴지는 감정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 답답해지면 책을 읽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를 생각하며 별빛 아래를 서성였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그때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쓰고, 구겨서 버리고. 어젯밤 구겨서 버린 걸 아침에 다시 펴서 읽어 보고. 또다시 쓰고.

그렇게 몇 달을 쓰고 고치고 하다 보니 어느덧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가사의 형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툴렀던 가사들이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꺼내 놓고자 하는 얘기들이, 머릿속에 단어로만 맴돌며 나열되던 이야기들이 노트 위에 나열되기 시작했다.

여행이 길어지고, 운전한 거리가 쌓여 가고, 수철의 피부가 그을려 갈수록 가사도 쌓여 갔다.

음악은 만드는 게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만드냐가 중요하다.

‘음악에 어떤 것을 담을까?’

이 하나의 생각이 긴 여행 동안 수철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해답은 가사였다.

* * *

“가수가 없다고?”

포크로 스파게티를 빙빙 감던 마크가 고개를 들었다. 마크는 수철의 앨범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언과 약속을 잡기 전에 할 말이 있다며 수철을 찾아왔다. 그래서 본다이 비치의 야외 파라솔 아래에 마주 앉았다. 만남 김에 점심도 같이 먹을 겸해서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수철이 마크의 물음에 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우선 음악을 다 만들어 놓고 생각할 거야. 어떤 가수가 어울릴지.”

가수를 위한 앨범이 아니라 창작자를 위한 앨범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곡을 만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걸 원하지만 쉽게 되지는 않는다. 같이 밴드를 해도 음악은 자연스레 가수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마크는 잠시 수철을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그러니까 음악은 가사에 맞춰서 만들 생각이라고? 장르도 가사에 맞춰서 정하고?”

“응.”

“그럼 가사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장르를 알 수 없다는 말이네?”

“그렇지.”

“이 장르 저 장르 다 섞일 수도 있다는 말이고?”

“맞아.”

마크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쉽게 가지는 않네.”

마크는 늘 그렇듯 수철이 이번에도 일반적인 상식의 틀을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마크의 눈에는 수철이 그런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하는 것, 틀을 깨는 것,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에 도전하는 것.

수철은 반대로 어렵게 생각하는 마크에게 되물었다.

“이게 가장 맞는 방식 아닌가? 먼저 말하고자 하는 가사를 쓰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고, 그걸 잘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선택하는 게?”“그게 가장 맞는 방식이지. 하지만 보통은 거꾸로 하잖아. 가수를 먼저 선택하고, 그 가수에게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가사를 쓰고. 그래서 음악에 가사를 쑤셔 넣는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잖아. 비슷한 가사가 넘쳐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마크는 현실이 별로라며 고개를 저었다. 수철도 그 말에 공감했다.

“그건 별로인 거 같아.”

마크의 얘기에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난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할 생각이야.”

그 말에 마크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세상이 어떻든 자신의 판단대로 추진하는 수철이 부러웠다.

“그러니까 세상에 비슷한 것들이 넘쳐나는 거지. 너처럼 안 하고 거꾸로 하니까 말이야.”

마크는 수철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교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초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수철을 봤다.

“가사, 장르, 가수는 그렇다 치고. 연주자들도 음악에 맞춰서 새로 구성할 생각이라고?”“응, 이번엔 그렇게 할 생각이야. 각각의 가사에 모두 다른 색깔을 입힐 거니까, 참여하는 연주자들도 다 다르게 해 보고 싶어.”

“…….”

그 말에 마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엄청난 숫자의 연주자들이 녹음실을 가득 채우는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장르가 다르니 뮤지션이 입은 옷과 몸에 달린 액세서리도 제각각일 것이다.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녹음실이 바글바글하겠네?”

“왜?”

“각 장르의 연주자들이 다 모일 테니까 말이야.”“아, 그건 트랙으로 받을 생각이야.”“악기만 녹음해서 보내라고? 보컬은?”“보컬은 선택권을 줄 거야. 여기에 와서 녹음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아니면 노래만 보내도 되고.”“그렇게 하면 퀄리티가 많이 떨어질 텐데?”“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그조차도 이번 앨범의 매력이라고 생각해.”

그 말에 마크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때 수철이 마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마크.”

“왜?”

“이번 앨범 말이야…….”

수철은 마크에게 이언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며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번 앨범엔 마크가 참여할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마크가 최고의 연주자임엔 틀림없지만, 수철은 이번 앨범에선 새롭고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해 보고 싶다. 그래서 미리 마크에게 자기의 생각을 전했다. 양해를 구했다.

“미안해, 마크. 이해해 줘.”“아니야, 난 괜찮아.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마크는 아쉬운 기색이 얼굴을 스쳤지만 이내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뮤지션으로서의 존중이고, 친구로서의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멈추고 잠시 스파게티를 먹던 마크가 궁금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이언을 참여시키고 싶다는 그 곡, 아니, 그 가사라고 해야 하나? 암튼 미래에 나올 그 음악에 관해 설명 좀 해 줄 수 있어? 어떤 내용이길래 이언을 선택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마크는 포크를 내려놓고 팔을 교차하며 수철의 눈을 봤다. 수철도 포크를 내려놨다.

“제목은 레인이야.”

“레인? 제목부터 블루스 느낌이 확 나네?”“응, 그리고 부제는 올버니 블루스야.”

“올버니 블루스?”

“거기서 쓴 가사거든. 올버니에서 비 맞으며.”“아, 그렇군. 멋있네. 올버니 블루스. 하하.”“퍼스에서 애들레이드로 여행하면서 올버니 지나갈 땐데. 그때…….”

수철은 그때 며칠 흙먼지를 맞으며 퍼스에서 애들레이드를 향해 긴 시간을 외로이 달리고 있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마치 오랜 가뭄을 겪는 듯한 느낌의 도로를 며칠 달렸다. 비가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콰르릉!

엄청난 소리를 내며 잔뜩 품고 있던 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해 엄청난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메마른 대지를 적셨다.

수철은 차를 세워 놓고 내려서 두 팔을 벌렸다.

아프리카 초원에 비가 쏟아지면 거기 동물들도 자기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 한동안 서서 고스란히 비를 다 맞았다.

쌓인 갈증이 말끔히 풀리는 것 같았다. 여행 중의 쌓인 여독과 그동안 나빴던 기억들까지 다 씻겨 내려가는 거 같았다.

자연 속에서 맞는 비는 세상 어떤 것보다 신선하고 상쾌했다. 가슴이 뻥 뚫렸다.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까지 1시간 가까이를 맞다가 수철은 다시 차로 돌아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는 곧장 노트를 집었다.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있는 그대로 레인으로 붙였다.

[레인]

다시 시작해.

나를 가뒀던 기억을 벗어 버리고.

두 번째 시간.

네가 막아도 이미 시작됐어.

손끝에 담긴 간절함이 하늘을 향할 때.

떨어지기 시작했어.

레인.

이미 시작된 거야.

피할 수 없어.

넌 하늘이 아니니까.

네 머리 위로 끝없이 쏟아져 내릴 거야.

내 눈빛,

레인이 되어.

가사를 쓰고 보니 수철은 그간에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고독을 끄집어낸 것 같았다. 정신없이 써 놓고 보니까 그랬다. 그래서 바로 장르가 연결됐다. 블루스.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블루스.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핍박받으며 목화밭에서 일했던 흑인 노예들이 떠올랐다. 그 블루스한 느낌은 흑인 노예뿐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함, 슬픔, 고독, 자신에 대한 연민. 그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존재의 슬픔같이.

수철은 머릿속에 3도 음과 7도 음이 반음 낮춰진 블루스 음계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수많은 블루스 연주자들이 떠올랐다. 악기 위에서 움직이는 그들의 손가락이 보였다. 기타의 지판을 누르고, 트립플로 빠르게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비비 킹, 레이 찰스, 지미 헨드릭스의 손가락이 가장 크게 보였다.

하지만 수철은 이내 머리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떨쳐 냈다.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생각을 멈췄다.

이번엔 그렇게 했다.

가사에 더 집중해서 완성하면 그때 음악을 붙일 생각에서다.

이번 앨범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대신 장르를 정하고 나니 생각나는 연주자가 한 명 있었다.

몇 달 전 인상 깊은 연주를 보였던 블루스 기타리스트.

바로 이언이었다.

그래서 수철은 돌아오자마자 마크에게 전화해서 이언과의 만남을 부탁했다.

그때 그의 크레이지 블루스 기타 연주가 잊히지 않았었다.

수철이 만든 레인과 느낌이 딱 맞았다.

“알았어. 내가 만남을 주선해 볼게.”

수철의 긴 설명을 들은 마크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의 얘기를 들으며 레인이라는 곡과 이언은 운명으로 엮여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철이 가사를 그렇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고마워.”

마크가 만남을 주선한다는 말에 수철은 고마움을 표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길게 설명하지 않는 수철인데, 그때의 경험이 너무 신비로워서 마크와 공유하고 싶었다. 같은 길을 걷는 뮤지션이고, 친구니까.

“이번엔 음악에 제목이 있는 거네?”“응, 순서는 없지만.”“하하, 그렇군. 순서는 없는 거군.”

마크는 크게 한번 웃고는 말을 이었다.

“가수를 뽑은 게 아니라 배우를 뽑는 거 같아.”

“배우?”

“그렇잖아? 시나리오에 맞춰서 배우를 뽑듯이 음악에 맞춰서 어울리는 목소리를 뽑는 거잖아? 그러니까 배우 뽑는 거 맞지. 목소리 배우.”“하하. 그런 셈이지. 표현이 마음에 든다. 목소리 배우.”

수철은 마크의 말에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마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피식 따라 웃었다.

“너 이제 완전 작사가 다 된 거 같아. 가사만 듣는데도 앞으로 네가 어떤 음악을 만들어 낼지 기대된다.”

“기대는 뭐.”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나?”

“……?”

“작곡가? 작사가? 연주가? 편곡가? 아티스트? 아니면 마에스트로가 어울리려나?”

마크는 장난스레 수철이 하는 작업을 줄줄이 늘어놨다.

수철은 대꾸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수철의 옆으로 보이는 본다이 비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보드를 옆에 끼고 멀리서 밀려오는 높은 파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