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피식 웃음
기분 좋게 돌아갔던 마크가 다음 날 바로 전화를 해왔다. 수철이 부탁한 일의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수철은 한창 작업에 집중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마크는 예상과 조금 다른 얘기를 했다.
―수철, 지금이라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밝히는 게 좋지 않겠어?
뭐가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크는 지난번에도 똑같은 걸 물었었다. 이언과 약속 잡기 편하게 수철이 ABYSS 앨범의 작곡자이자 프로듀서라는 걸 밝히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었다. 이언이 그만큼 바쁜 연주라는 뜻이기도 했다.
수철은 그건 나중에 하겠다고 했다. 우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고 싶었다. 그가 대단한 연주자라는 건 알지만 그가 표현하는 음악과 달리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가진 매력을 음악에 넣고 싶지만 그렇다고 마인드가 좋지 않은 사람과는 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이언에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지난번 공연을 봤을 때 그의 팀은 팀이라기보다 이언의 밴드 같았다. 연주자들이 오직 이언의 연주를 받치고 있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수철은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마크의 말을 들은 수철이 입을 뗐다.
“마크, 그럼 이언이 어디서 공연하는지만 알려 줘. 내가 직접 만나 볼게.”―아니야, 약속은 잡았어.
“잡았어? 그런데 왜?”
약속을 잡았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수철은 갸웃했다.
마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좀 불쾌해서.
“불쾌?”
이언은 마크가 전화해서 보자고 했을 땐 기꺼이 응하다가 수철의 얘기를 꺼내자 좋아하지 않았다. 앨범에 세션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니까 목소리에서 싫은 투가 느껴졌다.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크는 답답하고 불쾌했다.
―네가 누군지 알면 두 손 들어 환영할 게 뻔한데.
수철은 마크에게 미안했다. 직접 찾아가 볼 걸, 괜한 부탁을 한 거 같았다. 이언이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마크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그럴 이유가 없는데.
“미안해, 마크.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었어.”―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나도 이언이 이렇게까지 까다로울 줄 몰랐거든. 무슨 스타도 아니고 말이야.
“…….”
이언이 어떤 성향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했다는 얘기였다. 수철이 대꾸가 없자 이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틀 후에 이언의 집에서 만나는 거로 약속을 잡았어.
“집?”
―응, 이언은 공연하거나 특별한 때가 아니면 밖에 잘 나오지 않거든.
“그래, 알았어. 어쨌든 약속 잡아 줘서 고마워.”―고맙긴.
마크는 아직 앙금이 남았는지 이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만나기 전에 참고하라는 뜻이었다.
―좀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 프라이드가 강하다고 해야 하나? 자존심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가짜 뮤지션이랑은 말도 안 섞어.
“가짜 뮤지션?”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 실력에 비해서 말만 많은 사람.”“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 사람이 피곤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말을 안 섞을 필요까지.
결벽증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잘못 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네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알려 주는 게 좋을 거 같다는 말을 한 거야. 그러면 자세가 바뀔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이미 약속을 잡았으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어쨌든 고맙고, 미안해.”―미안하긴, 맥주 한 잔 사면 되지.
“쓰러질 때까지 마시게 해 줄게.”―하하, 알았어. 그럼 이틀 후에 데리러 갈게.
“데리러 온다고?”
―차 한 대로 가면 되지. 너, 이곳 지리도 잘 모르잖아?
“그래, 고마워. 땡큐.”
* * *
이틀 후, 수철이 발코니에서 본다이 비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크가 아래서 손을 흔들었다.
“어서 내려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선글라스를 벗어서 가슴에 걸며 소리쳤다. 수철은 2층에서 내려다보다 아래로 내려갔다.
“출출하다.”
마크의 차를 타고 이언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햄버거를 사서 하나씩 입에 물었다. 처음 보는 햄버거 체인점이었다. 호주에만 있다고 했다. 버거킹의 호주 버전이라는 헝그리 잭스(Hungry Jack’s)였다.
엄지를 세울 정도로 맛있었다.
“이언은 시드니 최고 대학에서 강의도 했었고, 호주뿐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페스티벌에서 초청 공연도 여러 번 했어.”
마크는 이언의 집이 가까워지자 그의 프로필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의 이력은 나름 화려했다.
세계적인 유명 뮤지션들과의 협연도 많이 했고, 오케스트라와 같이 클래식 무대에서 객원 연주자로 공연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거기서 바이올린 솔리스트를 능가하는 연주력을 뽐냈다고 했다. 게다가 영국 방송 프로그램에서 밴드를 이끌기도 했다고 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실력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크의 얘기를 듣던 수철이 입을 열었다.
“마크, 그건 너도 다 경험한 일이잖아? 페스티벌 공연, 방송 세션, 유명 뮤지션 앨범 참여. 거기에다 대학에서 강의도 하지 않았어?”“그렇긴 한데 이언이 나보다 경력이 더 화려하지. 그리고 난 대학 강의는 길게 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학생들 가르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건 무리더라고.”
“…….”
수철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선생과 연주자는 다르다.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돈을 버니까 게을러지더라고. 현실에 안주한다고 할까?”“아무래도 그렇겠지.”
수철은 마크의 말에 동의하며 다시 물었다.
“지금 이언은 어때? 여전히 하는 일이 많은 거야?”“그렇진 않은 거로 알고 있어. 지난번에 봤듯이 자기 이름으로 끌고 가는 팀이 하나 있고, 그것 말고는 집에서 곡 작업하면서 지내는 거 같아. 굳이 음악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거든.”“잘산다는 얘기네?”
“응, 아주 많이.”
마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금세 그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언덕을 넘어서니 넓은 도로의 양옆으로 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집이 보였다.
한눈에도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 후 마크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거니 커다란 대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 * *
“저기가 다 집이야?”
“응, 놀랍지?”
이언의 집은 부유한 동네에서도 눈에 띄는 집이었다.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양쪽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이 있었고 멀리 보이는 집의 마당은 큰 공원 같았다.
한쪽으로는 나무가 우거져 있고, 한쪽으로는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중간중간 나무를 손질하는 사람과 풀을 깎는 사람이 보였다.
집의 풍경이 뮤지션과는 왠지 이질감이 있어 보였다.
“이언이 깐깐한 이유가 아쉬울 게 없으니까 그런 걸지도.”
마크의 말처럼 수철도 그렇게 느껴졌다.
마크가 이언에게 친구 한 명을 소개하겠다고 했을 때 이언은 시큰둥했다.
너랑 같은 동양인이라고, 너의 연주가 마음에 들어서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해 주길 바란다는 얘기를 했을 때도 이언은 시큰둥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언은 같은 동양인도, 친구도 관심 없다. 마크가 추천하니 마지못해 만나는 것일 뿐이다.
“난 한때 싱가폴 사람들은 다 까다로운 줄 알았다니까?”
마크가 정원을 걸어가며 농담을 던졌다. 이언 때문에 그런 오해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의 그런 면모 때문에 그의 말은 밴드 안에서 지배적이고, 그의 음악 고집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연주자가 많다고 했다.
“같이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며?”
수철은 앞뒤가 맞지 않아서 되물었다.
“얻는 게 많아서지.”
“얻는 게?”
“이언이 깐깐하긴 하지만 같이하면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부분이 많아. 이언이 천재성을 보여서 마니아 같은 팬들도 많고. 아직도 앨범을 내면 순수하게 구매하는 팬들이 만 명이 넘어.”
기타 연주자의 앨범을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사람이 만 명이 넘는다는 얘기는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는 뜻이다.
마크는 이언이 연주자들에게 인기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그의 옆에 있으면 많은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이언은 공연과 행사 수익의 대부분을 팀에게 나눠 준다고 했다.
돈은 다 줄 테니까 음악에만 집중해.
뭐 그런 얘기였다.
마크는 부러운 눈치로 말을 이었다.
“대중의 눈치를 보며 음악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야. 안에 들어가 보면 더 놀랄 거야.”
“놀라? 왜?”
“시스템이 장난 아니거든. 전문 스튜디오를 능가해.”“집에서 녹음을 다 한다는 얘기야?”“녹음뿐만이 아니야. 마스터링 장비도 다 갖추고 있어.”
“진짜?”
집안에 마스터링 스튜디오까지 갖춰 놓고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본다.
“응, 엔지니어만 불러서 마스터링을 여기서 해.”
“대단하네.”
“내가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거지. 저 숲에서 산책하며 음악을 구상하고, 집 안에서 작곡에 연주까지 앨범을 원 시스템으로 한 번에 끝내 버리는 거지.”
마크는 부러운 정도가 아니라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음악으로 돈을 번 것은 아니고, 원래 부잣집 아들이었대.”
괜시리 한마디 덧붙였다.
몇 분을 걸어 들어가자 이언이 고양이를 안고 집 현관 마당에 나와 있었다.
“어서 와요, 이언이에요.”
마크가 수철을 소개하자 이언이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용수철입니다.”
수철도 같이 인사를 건넸다. 이언은 클럽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잘나가는 비즈니스맨 같았다. 안고 있는 하얀 고양이조차 부유해 보였다.
* * *
“이쪽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이언이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안내했다. 큰 응접실을 지나고 햇살이 드는 긴 복도를 지나서 그의 작업 공간에 들어섰다.
깔끔한 내부에 잘 정돈된 악기, 장비들이 그의 성격을 짐작하게 했다. 괜히 먼지라도 털었다간 눈치를 받을 거 같았다.
마크의 말대로 그는 집안에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모든 악기가 갖춰져 있었고 작업실을 통해 보이는 큰 공간에는 컨트롤 룸과 부스가 보였다. 웬만한 녹음실 뺨친다는 마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언의 자신감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차 마시겠어요?”
“네.”
“마크도?”
“땡큐.”
셋은 잠시 차를 마시며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눴다. 주로 이언과 마크가 대화를 나누고 수철은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마크가 화제를 돌렸다.
“이언, 수철과 얘기를 나눠 봐. 내가 수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정말 놀라운 뮤지션이라는 거야.”
그 말에 이언이 수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철은 이언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입을 열었다.
“제가 만드는 음악에 이언 씨가 기타를 쳐 주셨으면 해서 만나러 온 겁니다.”
수철은 찾아온 용건을 바로 꺼냈다. 이언은 수철의 말에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얘기는 들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수철을 친절하게 대하던 그가 세션 얘기가 나오자 다소 눈빛이 까칠해졌다.
“오해하지 마세요, 가끔 친한 사람들의 앨범에 참여하긴 하는데, 부탁받고 세션을 하지는 않아요. 마크가 얘기해서 잠시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거절해야 할 거 같아요. 날 선택해 줘서 고맙긴 하지만 제가 지금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서요. 미안해요.”
이언은 매너 있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뉘앙스는 아무 앨범이나 세션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마크의 말대로 격을 따진다는 얘기였다.
이 정도 부자니 하기 싫은 세션을 하면서 돈을 벌 이유도 없다.
중간중간 보이는 그의 미소엔 거만함이 묻어있었다.
수철은 마크가 왜 경력을 밝히자고 했는지 알 거 같았다.
“네, 이해해요. 자기 작업에 집중할 때는 남의 앨범에 참여하지 않는 게 좋죠.”
수철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러자 예상하지 못했는지 이언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마크는 놀란 눈으로 수철을 쳐다봤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간다고?
그런 표정이었다.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벽장에 꽂힌 시디를 둘러봤다. 한쪽 무대 위에 세팅된 악기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이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 공연 때 피아노가 제 역할을 못 하는 거 같던데, 혹시 저랑 같이 연주 한번 해 볼래요?”
그 말에 이언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크를 바라봤다.
“지난번 연주라니?”
이언의 물음에 마크는 지난번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어떤 클럽에서 어떤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는.
이언은 피식 웃고는 수철을 봤다.
“하하, 저랑 같이 연주해 보고 싶다고요? 제 곡을요?”“싫으시면 안 해도 돼요.”“하하, 그래요. 연주야 뭐, 한번 해 드릴 수 있죠.”
정중한 말투지만 표현은 딱 그랬다.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연주는 같이 한번 해 줄게.
피아노를 좀 치나 보지?
귀찮지만 잠깐 같이 놀아 줄게.
그런 뉘앙스.
그때 그 모습을 보던 마크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실소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