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역전
수철은 작업실 한편의 낮은 단상 위에 마련된 무대 위로 올라갔다.
마크와 이언도 무대로 올라와 각자의 악기 앞으로 향했다.
수철은 피아노 앞에 앉았고, 마크는 콘트라베이스 대신 일렉 베이스를 잡고 의자에 앉았다.
이언은 느릿하게 걸어와서 한쪽에 세워져 있는 어쿠스틱 기타를 가져왔다. 높고 다리가 길쭉한 의자에 기대어 놓고는 테이블 위에 악보집을 뒤져서 악보를 꺼내 왔다.
“악보 필요하죠?”
이언은 악보 한 장을 수철에게 내밀었다.
“아니요, 전 괜찮아요.”
수철이 괜찮다고 하자 이언은 갸웃했다.
“괜찮아요?”
“네.”
이언은 미간을 좁히며 수철을 바라보다 이내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수철이 자신의 관심을 끌려고 별짓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음반을 구매해서 듣고 열심히 연습했을 거라 생각했다.
피식 웃고는 마크를 봤다.
“마크, 넌 필요하지?”
“응, 줘.”
이언은 마크에게 악보를 건네고 세워 놓은 기타를 집어 들었다. 길쭉한 의자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가슴에 기타를 품었다.
“시작해 볼까요?”
“네.”
이언이 묻자 수철은 끄덕였다.
이언은 마크와도 눈빛을 교환하고는 템포를 넣기 시작했다.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이언의 템포에 맞춰 마크의 베이스가 먼저 출발했다. 곧이어 이언이 기타 코드로 리듬을 만들며 합류했다.
수철은 13도의 텐션 된 화성을 힘 있게 누르며 둘의 뒤를 따라붙었다.
이언은 자신이 만든 곡인 만큼 연주하는 모습이 여유로웠다. 기타의 지판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경쾌하게 손끝으로 줄을 튕겼다.
연주가 몇 마디 지나가자 이언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꽤 준비를 해 왔네?
그런 미소였다. 수철의 연주를 듣는 그의 눈빛도 그랬다. 하지만 이언의 미소는 거기까지였다.
수철이 얼마나 하는지 보자는 식으로 여유롭게 시작했던 연주는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이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장난을 먼저 걸은 건 이언이었다. 그는 수철의 연주력을 테스트해 볼 생각으로 기타로 질문을 던졌다. 변칙적인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던진 것이다.
수철은 이언이 만들어서 던진 멜로디를 친절하게 풀어서 대답해 줬다. 그리고 이언이 던진 질문보다 좀 더 어려운 질문을 만들어서 툭 던져 줬다.
그러자 이언은.
어쭈?
그런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수철의 질문에 답을 하고 이번엔 두 개의 질문을 던졌다.
수철은 이번엔 친절함에 깔끔함까지 얹어서 답을 하고, 이언이 한가해서 이러나 싶어서 질문을 한 개 더 얹어서 세 개의 질문을 던졌다.
음…….
이언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처음과 다르게 자세를 바르게 고쳐 잡았다.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며 집중해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냈다. 입술에 힘을 주고 수철에게 자신이 만든 비장의 멜로디를 던졌다.
수철은 이번에도 친절했다. 눈높이를 맞춰서 해답을 알려 주고 왜 그런 질문을 생각하게 됐는지 되물었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묻듯이.
“……!”
이때부터 이언의 낯빛이 바뀌기 시작했다. 손이 정신없이 바빠졌다. 자세는 교과서처럼 바르게 고쳐졌고, 대충대충 하던 연주는 눈에 힘을 주며 초집중하고 있었다.
반면에 수철은 여유로웠다. 오랜만에 블루스 연주를 즐기고 있었다. 음악의 분위기를 살리며 마크의 베이스와도 소통했다. 이언이 질문을 던지면 친절하게 답을 해 주며 좀 더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이언이 집중하게 했다.
장난이 지나치면 한가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바쁘게 만들어 줬다. 조금씩 어려운 문제를 내서 이언이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
이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심각해지다 상기되기를 반복했다.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런데도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그가 오기를 부린 탓에 연주를 끊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마크가 지칠 정도였다.
연주는 20분을 훌쩍 넘어갔다. 수철은 이언이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에 친절하게 다 답해 줬다. 도발적으로 덤비면 차분하게 만들어 줬다.
그렇게 30여 분이나 이어지던 연주는 마크와 수철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급하게 엔딩을 만들어 끝이 났다.
이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고, 금방이라도 땀방울이 떨어질 것 같아서다. 선수 보호 차원에서 멈췄다.
이언과 달리 수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웃지도 않았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연주만 했다.
연주가 끝나고도 이언은 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멈춰 있었다.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에겐 처음 있는 일이니 그럴 만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잘 치시네요, 훌륭합니다.”
애써 미소를 지었다.
수철이 충분한 실력을 갖췄다며 인정했다. 아무리 준비를 열심히 해왔다고 해도 이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라고 생각했다.
수철은 그런 이언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뗐다.
“다음 곡 한 곡 더 할까요?”
이언이 평정심을 찾은 거 같아서 물은 거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합주를 했는데, 달랑 한 곡만 하기는 아쉬웠다.
이언은 수철의 말에 평온해졌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다음 곡이면 어떤?”“그날 했던 다음 곡이요.”
그 말에 이언은 마크를 봤다. 마크는 무슨 곡인지 모르겠다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수철은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설명을 붙였다.
“드럼, 베이스, 기타가 동시에 3박으로 악센트를 주며 시작했던 곡이요.”
이언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 그 곡이요?”
얼굴이 펴지더니 말을 이었다.
“하하, 네, 한번 해 보죠.”
아까 연주를 만회해 볼 생각에 흔쾌히 끄덕였다.
“그런데 잠깐.”
이언의 얼굴색이 다시 바뀌었다.
“그 곡은 미발표곡인데…….”
말끝을 흐리며 수철을 바라봤다. 수철이 얘기한 곡은 아직 정식으로 발표된 적이 없는 곡이다. 그때 공연장에서 연주한 게 전부다. 즉흥적으로 악상이 떠올랐고, 관객의 반응이 어떨까 궁금해 연주해 본 곡이다.
아까 곡이야 수철이 시디를 사서 듣고 준비를 해 왔다고 해도, 이번 곡은 아직 발매하지 않아 시디도 없고, 악보도 없는데.
수철이 어떻게 곡을 연주하겠다는 건지.
“그 곡은 악보도 없는데…….”
이언은 수철을 보며 계속 말끝을 흐렸다.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요.”
“상관없어요?”
“네.”
상관없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그때 음악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건가?
고작 한 번 듣고?
3개월이 훨씬 지났는데?
이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머릿속에 갖가지 의문이 교차했다.
이언은 그 눈동자로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는 대답이 없었다.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언을 약 올리기라도 하려는 건지.
“아무래도 이번 곡은 빠져야겠어.”
마크는 안고 있던 베이스를 내려놓았다.
“난 그 곡이 어떤 곡인지 기억이 안 나거든.”
기억이 안 나는 건 당연했다. 이언조차 즉흥적으로 만든 곡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니까.
이때 수철이 마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알려 줄게. 어렵지 않아.”“베이스도 기억해?”
“응.”
이번엔 마크도 놀랬다. 입이 쩍 벌어졌다.
이언은 급격하게 얼굴이 하얘졌다. 눈동자가 빙빙 돌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됐다.
“A 키였고, 인트로(intro)는 드럼, 베이스, 기타가 3박자로 ‘딴, 딴, 딴.’ 동시에 박을 주고 시작했어.”
수철은 둘의 표정과 상관없이 설명을 이어 갔다.
“베이스는 D13, E13, A13. 이렇게 2마디씩 반복이 돼. 그다음은 4키 높여서 G13, A13, D13. 이렇게 반복되고. 32마디 동안은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거야. 아 참, 그리고 그때 클럽에서 베이스는 워킹 베이스(Walking Bass, 화음을 따르지 않고 스윙 느낌으로 스케일을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였어.”
“…….”
대답은 없지만, 수철의 빠른 설명에 둘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64마디까지 계속 가는 거야.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알겠지?”
수철은 설명을 멈추고 마크와 눈을 마주쳤다.
“으, 응.”
마크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대답은 하지만 머릿속은 하얬다.
수철은 이언에게 자신의 설명이 맞냐고 묻지도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이언은 자신의 곡으로 대화를 나누는 수철과 마크를 반쯤 정신이 나간 눈으로 번갈아 봤다.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이 만든 곡을 수철에게 설명 들었고, 수철의 말을 들으며 곡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오케이, 알았어.”
마크가 뒤늦게 정신을 가다듬고 수철의 설명을 이해했다며 엄지를 세웠다.
수철은 이언을 봤다.
“시작해 볼까요?”
“네? 네.”
이언은 넋을 놓고 있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연주는 수철이 주도하게 됐다. 이언은 어쩌다 보니 연주에 참여하는 게스트 꼴이 됐다.
자신이 만든 곡인데.
수철은 멍하니 있는 이언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템포를 넣으시죠?”
“네? 아, 네.”
이언은 자신의 곡에 템포를 넣을 생각조차 까먹고 있었다.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빰! 빰! 빰!
둥! 둥! 둥!
드럼이 빠진 관계로 이언과 마크가 박자에 맞춰 먼저 도입부를 시작했다.
곧이어 수철이 그루브를 더하며 따라붙었다. 박을 쪼개서 텐션 된 화성을 강하게 눌렀다. 매력적인 블루스 멜로디로 기타와 베이스 사이를 누볐다. 과하지 않게 절제된 멜로디로 음악의 맛을 극대화했다. 수철의 연주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이언과 마크는 입맛을 다셨다.
이언은 남의 연주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연주하다가 수철이 틈을 만들어 끌어들이자 다시 실력 있는 연주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시작한 연주였지만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음악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수철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마크는 연주를 시작하면서 지판을 누르는 이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봤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충격이었다.
‘이언의 손끝이 떨리다니!’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마크는 이언이 수철과 같이 연주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언이 주눅 들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덕분에 자신까지 바짝 긴장하게 됐다.
수철의 연주는 갈수록 더 현란해졌다. 블루스 스케일을 벗어나서 새로운 스케일을 끌어다 붙였다. 리듬을 늘였다 줄였다, 음악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지휘하고 있었다.
수철은 이언의 기를 꺾으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블루스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블루스 특유의 흥을 만끽하고 있었다.
블루스와 재즈를 섞어 가며 소리가 주는 입체감을 더 높이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연주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끝이 났다. 엔딩도 인트로와 같이 3박을 맞추며 마무리했다.
수철은 한창 흥이 올랐지만 한 곡을 더 하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언이 간신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이언은 연주가 끝나자 다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조금 전의 분위기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툭 치면 스러질 거 같았다.
수철과 마크는 말을 걸지 않고 잠시 이언을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이언이 에너지를 다 써서 지쳐 보였다.
“잠시만요.”
이언은 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잠시 기다려 달라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수철과 마크는 이언이 복도로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햐, 수철. 하하!”
마크는 그제야 수철을 보며 웃었다. 그러다 웃음소리를 더 키웠다.
“하하하!”
이언이 들을까 우려될 정도로 크게 웃었다.
“……?”
수철은 의문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이언도 이상한데 너까지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마크는 웃음을 멈추고 입을 닦은 후 수철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복수한 거 아니지?”
“복수?”
“이언 말이야, 아까 좀 건방졌었잖아?”“건방? 건방지다니? 무슨 소리야?”“그러니까 기죽이려고 한 건 아니란 얘기지?”
마크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수철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내가 왜?”
황당해하며 말을 이었다.
“곡이 그런 곡이었잖아? 신나게 내달리는.”
같이 연주해 놓고 무슨 쓸데없는 얘기 하냐고 미간을 좁혔다.
연주로 누구의 기를 꺾는다는 말은 수철에겐 모욕적인 말이다.
마크가 묘한 미소로 수철을 보고 있는데, 수철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피아노에서 일어났다.
“아쉽네.”
“아쉬워……?”
마크가 멀뚱히 보며 되물었다.
“다음 곡이 더 괜찮은데.”
수철이 툭 내뱉었다. 한 곡을 더 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뜻이었다.
“……!”
그 말에 마크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하, 용수철 너 참, 진짜.”
마크는 숙였던 몸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어처구니없다며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