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느낌을 공유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언이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복도를 서성이고 물도 몇 잔 들이켜고 온 모양새였다. 말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도 나갈 때와 달리 평점심을 찾은 모습이었다.
“제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릴게요.”
이언은 긴 설명을 붙이지 않고 바로 수철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자기 성격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에요, 무례하기는요.”
수철은 이언의 사과에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세션은 싫으면 거절할 수 있는 거고, 연주는 이언이 어떻게 느꼈었든 간에 수철은 재밌었다. 거기에다 수철이 먼저 자신에 대해 밝히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다소 이언이 무례하게 굴었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언이 의자에 앉아서 수철에게 몸을 돌렸다.
“아까 말씀하신 세션 말이에요.”
“세션이요?”
수철이 되묻자 이언은 말을 하기가 민망한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참여해도 될까요? 수철 씨 음악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인제 와서?
수철과 마크가 동시에 이언을 쳐다봤다. 이언은 겸연쩍은 얼굴로 수철을 봤다.
“안 될까요?”
수철이 입을 열었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작업 중이신데 괜히 부담가질 필요 없으세요.”“부담이 아니라, 해 보고 싶어요.”
의외의 얘기에 수철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쳐다봤다.
이언이 말을 덧붙였다.
“꼭 한번 해 보고 싶어요. 부탁드려요.”
“…….”
부탁드린다니.
이언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에 수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부탁하러 왔는데 부탁을 받는 상황이 됐다.
수철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는 좋지만. 괜찮으시겠어요?”“네, 전 괜찮아요. 수철 씨랑 친해지고 싶어요.”
수철은 멈칫했다. 느닷없이 친해지고 싶다니?
생뚱맞았다.
맞은편에 앉은 마크도 멈칫했다. 이언의 이런 모습이 생소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 자꾸 연출되고 있다. 그동안 몰랐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언의 마음이 이해됐다. 수철과 같이 연주를 해 봤으니 그럴 만했다.
마크도 새삼 수철에게 또 한 번 놀랐다. 오늘 모습은 지난번 연주 여행 때보다 더했다. 그때는 수철이 멤버들에게 맞춰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지휘자가 되어 연주를 이끌었다면 친구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편하지 않았을 테니까.
* * *
“와, 좋다. 이 신선한 공기.”
마당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자마자 마크는 주위를 둘러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언의 마당에서 둘러보는 정원은 아름다웠다. 아까 들어올 때와는 또 달랐다. 나비가 꽃 주위를 날아다녔고, 과일이 열려 있는 나무 위에서 다람쥐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뭐 좀 드시겠어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네요.”
이언이 시계를 보며 물었다. 수철과 마크는 정식으로 점심을 준비하겠다는 이언을 말렸다. 오랜 시간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
“그럼 간단하게 좀 가져올게요.”
이언은 간단한 먹거리라도 대접하겠다며 파이와 주스를 가져왔다. 셋은 음식을 먹으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이언은 궁금한 걸 물었다.
“제가 기타를 칠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요?”
수철은 가방을 열어 데모 음악이 들어 있는 시디를 꺼냈다.
“우선 이번 앨범에 관해 말씀드리면…….”
수철은 시디를 건네며 짧게 이번 앨범의 컨셉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레인’을 만들게 된 배경도 간략히 덧붙였다. 말이 끝나자 이언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디플레이어와 헤드폰을 가져왔다.
그러곤 집중해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음악을 들을수록 이언의 표정이 바뀌어 갔다. 처음엔 눈에 힘을 주고 듣더니 조금씩 입술이 들썩이다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환해졌다.
수철은 마주 앉아 그 표정을 보고 있었다.
음악을 다 들은 이언은 내팽개치듯 급하게 헤드폰을 벗었다, 수철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딱 제가 연주해야 할 곡이네요.”
수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세션을 하지 않겠냐고 물은 것이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수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는 이언을 보며 끄덕였다.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났다. 이언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예 수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음악이 찰지면서 아주 짜릿짜릿해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찰지면서 짜릿짜릿.
그에겐 그런 표현이 최고의 찬사였다. 바꿔 말하면 너무 그루브해서 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라는 말이었다.
수철은 레인의 가사가 다소 우울하게 들릴 수 있어서 음악은 반대로 박진감 있게 진행했다. 편곡 분위기를 마이너가 아닌 메이저로 잡아서 곡을 경쾌하고 그루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보컬의 멜로디 라인 또한 늘어지지 않게 조여서, 듣는 사람에겐 고독을 즐겁게 받아들이라는 긍정적인 느낌을 줬다.
이언은 그걸 찰지면서 짜릿짜릿하다고 표현했다.
“저도 30년 기타를 쳐 왔지만…… 오, 또 소름 돋네요.”
이언은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정말 친하게 지내요.”
“네.”
수철은 이언의 돌출 행동에 살짝 당황하며 내민 손을 잡았다.
“마크, 너도 정말 고마워. 오늘 좋은 친구를 소개해 줘서!”
이언은 마크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마크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몸을 세웠다.
“고맙긴 뭘.”
그렇게 말하면서 갸웃했다. 마크의 눈에는 이언이 좀 이상하게 보였다. 감정의 변화가 너무 커 보였다.
이언은 다시 수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돼요?”“우선 이 곡은 연주자를…….”
수철은 앨범 진행 일정을 묻는 이언에게 계획을 차근히 설명해 줬다. 이언은 수철의 얘기를 귀를 세우고 들었다. 설명이 끝난 후 이언은 수철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저장했다. 자주 연락하겠다며 눈에 힘을 줬다. 금방이라도 전화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 * *
“하하, 하하!”
밖으로 나온 이언은 크게 두 번 웃고는 수철을 봤다.
“밖에 나오면 통쾌하게 껄껄 웃어 줄 생각이었는데, 그렇게는 못 하겠어.”
“……?”
“이언이 측은해 보여서 말이야. 아이같이 순순하기도 하고.”
“그게 무슨?”
“사실은 말이야…….”
마크는 그동안 이언의 거만한 모습을 보며 오늘처럼 큰코다칠 날이 오면 크게 웃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심 수철에게 그 기대를 했었는데, 수철이 이언에게 같이 연주해 보자고 하는 순간 엔돌핀이 솟았다.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 이언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사람이 누가 있냐고?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데!”
마크는 그동안 그렇게 생각했었다.
잘나가는 재즈 뮤지션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심지어 클래식의 마에스트로까지 그를 높이 평가하니까.
“아까 네가 이언을 엮을 때.”
“엮어?”
“아니, 같이 연주하자고 할 때 머릿속에서 사이다가 폭발하는 거 같았어. 드디어 올 때가 왔구나! 영상이라도 찍어 놓고 싶었다니까? 하하!”
“마크.”
수철은 난감한 얼굴로 쳐다봤다. 이제 이언은 한 팀이 될 사람이다. 자꾸 비웃는 건 좋지 않다. 마크도 수철의 마음을 눈치채고 웃음을 멈췄다.
“알아, 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하지만 조금은 그렇지 않았어?”
“…….”
수철이 대답이 없자 마크는 재차 물었다.
“그렇지 않아? 응? 어서 진실을 말해 봐.”
수철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부정하지는 않을게. 처음엔 좀 그렇기도 했지.”“거봐! 하하, 하하하!”
마크는 다시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차를 타고 갈 때도 계속됐다. 수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그만하지?”
“왜?”
“심하잖아. 이언은 이제 나랑 한 팀이 될 건데.”“알아, 오늘만 그냥 좀 웃는 거야.”
“…….”
“걱정 마, 나도 이언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아니까. 그냥 좀 그동안 그랬다는 거지.”
감정의 변화를 보면 마크도 이언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거 같았다.
수철이 보기엔 그랬다.
“그래도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고 널 리스팩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어.”
“…….’
마크의 말에 수철은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다.
“하하, 하하하!”
마크는 잠시 멈췄던 웃음을 다시 끄집어내서 크게 웃기 시작했다.
통쾌하게 웃었다.
진짜 통쾌한 건지.
아니면 그동안 맺힌 게 있어서 억지로 통쾌하려고 애쓰는 건지.
달리는 차 뒤로 마크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난관은 있었지만, 앨범에 참여할 첫 번째 연주자가 정해졌다.
수철은 이언을 만나고 돌아와서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여행하면서 스케치해 뒀던 가사들을 점검하고 완성해 나갔다.
가사를 영어로 바꾸는 건 앤디의 도움을 받았다.
부족한 영어 덕분에 수철이 혼자 하기엔 표현에 한계가 있었다.
‘쌤, 영준이 형. 그리고……. 앤디?’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해서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 법한 사람이 수철의 주위에 그 정도였다. 찾아보면 더 있겠지만 당장은 그랬다. 그런데 박 대표에게 가사를 얘기하는 건 좀 아닌 거 같고, 영준이 형은 공연하느라 바쁘고, 가장 가까이 있고 나이도 비슷한 사람이 앤디였다.
“앤디, 알바할 생각 없어요?”
“알바요?”
“네, 가사 번역이 필요해서요.”“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싶기는 한데.”
앤디는 주저하면서도 하고 싶다고 했다. 학창 시절 문학을 사랑한 소년이었다며 은근히 자신감을 보였다. 특히 가사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제가 번역하면 혹시 앨범에 제 이름도 실리나요?”“네, 당연히 실리죠.”
앤디의 입이 벌어지며 눈이 반짝였다. 게다가 수철이 꽤 비싼 번역료를 제시했다.
“총 6개예요. 호주 달러로 5,000불까지 드릴 수 있어요.”“와, 그렇게나 많이요? 이거 안 할 수가 없네요. 하하!”
앤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돈도 받고 앨범의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이 실린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수철을 알게 된 건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섣부른 생각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앤디의 미소는 길게 가지 못했다.
“가사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어요. 제 어휘력이 이렇게까지 형편없는지도 몰랐고요. 괴롭네요.”
앤디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호기심에 덥석 미끼를 물어 버린 자신을 자책했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저는 정말 바보예요.”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정말 비를 맞고 싶네요.”
레인의 가사를 번역할 때는 그렇게 말했다. 소낙비가 쫙쫙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철은 계속 진행할 수가 없었다.
괜히 부탁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앤디의 자학하는 모습이 위험해 보였다.
“앤디, 일어나요.”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앤디를 일으켜 세웠다.
“왜요? 갑자기?”
앤디는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수철을 올려다봤다.
“어서 일어나요. 앤디 씨 좋아하는 락사 먹으러 가게요.”
수철은 억지로 앤디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앤디를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중요해 보였다. 앤디가 좋아하는 국수를 먹으러 가자며 이끌었다.
“락사 먹고 왓슨베이(Watsons Bay) 놀러 갈까요?”
왓슨 베이는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절벽 위에 요새도 있고, 그 옆으로는 산책로도 이어져 있다. 수철은 하버 브리지에서 바라보는 그 전경이 아름다워서 꼭 한번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앤디의 분위기도 바꿀 겸해서 가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철의 분위기와 달리 앤디는 무표정했다.
“……네.”
대답이 성의 없게 들렸다.
하지만 앤디는 수철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아직도 가사 번역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철은 앤디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속력을 냈다.
“괜찮아요?”
“……네.”
앤디는 차이나타운에서 락사를 먹으면서도 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서 가요.”
수철은 차이나타운을 나오자마자 앤디를 태우고 왓슨 베이로 내달렸다.
그리고 언덕 위로 올라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앤디의 표정이 좋아질 때쯤 수철은 자리를 골라 바다를 향해 앉았다. 앤디도 따라 앉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수철은 바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가사를 쓸 때 딱 이랬어요. 그때가…….”
수철은 가사를 쓸 때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때 뭘 보고 있었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에 시선을 두고 그때의 느낌을 끄집어냈다. 앤디는 묵묵히 수철의 말을 들었다.
그러다.
“……!”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급하게 호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잡고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리고는 계속해서 그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앤디에게 들려줬다.
앤디는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