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밤사이 친 거미줄
둘은 언덕에 앉아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수철의 이야기도 끝나 갔다. 느려지던 앤디의 손가락도 드디어 멈췄다. 앤디는 메모를 멈추고 수철이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봤다.
둘은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다. 앤디가 먼저 입을 뗐다.
“맛있는 맥주 먹고 싶지 않아요?”
“맥주요?”
수철이 쳐다보자 앤디가 벌떡 일어났다.
“가시죠, 제가 살게요.”
* * *
앤디가 수철을 이끌고 간 곳은 골목골목을 돌아서 찾기 힘든 곳에 위치한 작은 맥주 전문점이었다. 현지 주민이 아니면 찾기 힘든 곳이었다.
“헤이, 앤디! 오랜만이야!”
앤디가 들어서자 큰 잔에 맥주를 따르던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응, 오랜만이야.”
앤디도 같이 손을 들어서 반가움을 표했다. 작은 곳이지만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내부는 어두웠고 사람들은 벽에 붙어 있는 네온사인에 의지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빈자리가 없어서 수철과 앤디는 한쪽 벽에 붙어서 잔을 부딪쳤다. 앤디가 가져온 맥주는 검은색이었는데, 쓰지 않고 맛이 구수했다.
“어릴 적 친구인데,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수제 맥주를 팔고 있어요. 시드니에서는 유명한 집안이에요. 이 친구도 아버지랑 같이 가게를 운영하다가 얼마 전에 독립했어요.”
앤디의 말처럼 작은 가게 안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안이 꽉 차니까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맛집이었다. 맥주 맛집.
“앤디! 여기!”
빈자리가 생기자 친구가 손을 흔들어 앤디를 불렀다.
“오늘은 사람이 넘치네?”
앤디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을 닦는 친구에게 말을 붙였다. 친구는 빠르게 수건으로 테이블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응, 요즘은 매일 이래.”“장사할 맛 나겠어?”
앤디는 얼굴을 붙이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친구는 피식 웃고는 나초와 치즈 소스를 던져 주고 사라졌다.
“예전엔 여기가 아지트였어요. 이젠 사람이 많아져서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만요.”
앤디는 바쁘게 사라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친구가 장사가 잘돼서 좋긴 하지만 아지트를 잃어서 아쉬움도 있는 듯했다.
앤디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을 닦더니 수철을 봤다.
“아까 고마웠어요.”
수철은 나초를 깨물어 먹다가 멈췄다.
“네? 뭐가요?”
대뜸 고맙다고 말하는 앤디를 멈칫하며 바라봤다.
앤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느낌을 공유해 줘서요.”
“…….”
수철은 선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앤디에게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 주는 앤디가 오히려 더 고마웠다.
“수철 씨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가사를 쓰는 거겠죠?”
수철은 순간 민망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니.
할아버지 3인방이 들었으면 배꼽을 잡았을 얘기다.
“하하, 아니에요.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아요.”
수철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앤디는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었다.
“Cheers!”
“Cheers!”
둘은 맥주를 마시며 잠시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나이를 떠나서 친구가 된 거 같았다.
앤디는 맥주를 다 비우고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는 다시 가사 얘기를 꺼냈다.
“영어는 한글과 달라서 표현의 폭이 좁아요.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느꼈죠.”
앤디는 이번에 가사를 번역한 경험을 그렇게 말했다.
수철도 알고 있는 얘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에 박 대표와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세계 어느 언어보다 한글의 표현력이 가장 좋다는 얘기.
그때 수철은 새삼 한국 사람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이 뮤지션에게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말들이 다양하고, 그만큼 표현의 폭이 넓으니까.
가사가 그러면 음악도 따라가게 되니까.
“수철 씨는 간단명료한 가사를 좋아하죠? 핵심만 딱 집어내는.”
수철이 말없이 듣고만 있자 앤디는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죠, 아직은 부족하지만요.”
간단명료하게 핵심만 딱 집어내는 가사.
수철이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앞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앤디는 수철의 대답에 미소를 띠었다. 수철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끄덕이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영어로는 그 느낌을 살리는 게 정말 힘들어요. 간단명료한 느낌이요. 언어가 주는 감성이 다르거든요.”
한글과 영어의 감성이 다르다는 얘기였다. 수철은 그 말에 미안한 눈으로 앤디를 봤다.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부탁드리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영어로 제가 받은 느낌을 전달하는 게 힘들다는 걸 아니까요.”
수철은 처음 가사를 쓸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쉬운 단어라도 한글과 영어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뜻은 같아도 주는 느낌은 달랐다.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수철은 앤디에게 미안하고 안타깝고 고맙고 그랬다. 어려운 부탁을 해서 미안하고, 앤디가 머리를 쥐어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그런데도 결국 만들어 내 줘서 고마웠다.
앤디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수철 씨가 알아줘서 다행이에요. 자칫 제 머리털이 남아나지 않을 뻔했거든요. 하하.”
앤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은 두 손을 펴 보이며 웃었다. 수철은 앤디처럼 크게 웃을 순 없었다.
“건배 한번 할까요?”
“네.”
맥주잔이 쌓여 갈수록 앤디는 점점 더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꺼내놨다.
수철 모르게 전문 번역가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고, 친구의 소개로 작사가를 만나 조언을 얻기도 했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느낌을 똑같이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단어의 어감을 살리는 건 정말 힘들다’는 얘기만 반복하더라고요.”
앤디는 자신이 받은 느낌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을 뿐이라고 했다.
수철도 처음에 호주에 있는 작사가나 문학가 같은 사람을 소개받아 볼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전문 작사가는 왠지 기존의 가사들을 따라갈 거 같았고, 문학가는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서 벗어난 표현을 쓸 거 같았다. 그래서 같이 상의하면서 풀어 갈 생각에 앤디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이 또한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가사를 계속 써 나가려면.
앤디는 술이 더 들어가자 급기야 혼자서 주거니 받거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표현이 없을까? 내가 받은 느낌은 이게 아닌데? 아, 아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영어의 한계야.”
자신이 그동안 가사를 번역하며 고뇌했었던 말을 되뇌었다.
취한 거 같았다. 수철은 앤디를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아서 태워 보냈다. 수철도 잠시 혼자서 걷다가 택시를 잡았다.
재규어는 얼떨결에 외박하게 됐다.
* * *
“본다이 비치의 노을? 아니면 1번 국도의 노을?”“Bondi Beach sunset? or Sunset on Route 1?”
수철은 방안을 빙빙 돌며 중얼거렸다. 앨범의 제목을 정하기 위해서다. 수철이 여행하며 달렸던 1번 국도의 노을이냐, 아니면 음악을 만들면서 바라봤던 본다이 비치의 노을이냐.
선택의 순간이다.
“그냥 짧게 선셋으로 하자.”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이번 앨범의 제목은 ‘SUNSET’으로 정했다. 여행하며 가사를 쓸 때도 노을을 봤고, 음악을 만들 때도 발코니에서 본다이 비치를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봤다. 그래서 이번 앨범 제목은 노을로 전했다.
제목을 정해 놓고 보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앨범에 실릴 곡 중에 화려하게 불타는 느낌의 곡이 많으니까.
* * *
―가사 두 개 보냈어요.
“네, 감사해요. 수고하셨어요.”
앤디는 뒤늦게 어휘력을 폭발하며 가사 번역본을 보내왔다. 덕분에 수철은 빠르게 음악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첫 번째 가사는 이미 완성한 ‘레인’이고, 이번에 받은 가사가 앨범에 실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가사다.
두 가사의 장르는 모두 락으로 정했다. 가사의 내용이 그렇기 때문이다.
하나는 로컬 뮤지션의 밤은 매력적이라는 내용을 담은 가사고, 하나는 일상의 소소함을 담았다.
로컬 뮤지션의 밤을 얘기한 가사는 여행하면서 클럽에서 만난 뮤지션들의 얘기다. 그들과 어울리며 느꼈던 인상을 가사로 만들었다.
작은 도시의 직장인들은 일을 마치면 자신들의 단골 펍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모여 하루를 마감하며 음악을 즐겼다. 수철에겐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무직 현장직 할 것 없이 소리를 지르며 락을 즐겼다. 뮤지션들도 같은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다 보니 서로가 잘 아는 사이였다. 누가 관객이고 누가 뮤지션인지 구분 없이 같이 어울려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뮤지션도 직장인도 모두 그게 하루의 끝이었다.
수철은 이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가사로 남겼다. 제목은 ‘밤사이 친 거미줄’이라고 붙였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면 뮤지션들은 모여서 맥주를 마시며 내일 공연의 곡들을 선정했다. 그 모습이 흡사 뮤지션이 밤사이에 음악으로 거미줄을 치면, 다음 날 술에 취한 사람들이 걸려들어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누가 어떤 음악에 열광하고, 그러면 누가 술을 더 마시는지, 어떤 음악을 하면 클럽의 매상이 오르는지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었다.
그래서 수철은 제목을 ‘밤사이 친 거미줄’이라고 붙였다. 장르는 당연히 락이다.
수철은 그 느낌을 살려서 곧바로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그때 느꼈던 그들의 폭발적인 열정을 락에 담았다. 무대에서 포효하던 락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모습을 음악 안에 스케치했다.
그리고 일상의 소소함을 담은 다음 가사.
‘씨푸드 스파게티? 아님 크림 스파게티?’
수철은 다시 방안을 서성였다.
마치 메뉴판을 펼쳐놓고 메뉴를 고르는 거처럼 중얼거렸다.
가사의 제목을 정하는 거다.
‘네가 먹는 음식이 바로 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네가 듣는 음악이 곧 너다.’
수철은 가사에 어떤 제목을 붙일까 생각하다가 어느 평론가의 말이 떠올랐다. 자꾸 읊조리다 보니 ‘네가 먹은 음식이 곧 너의 음악이다.’로 연결됐다.
그래서 요즘 뭘 가장 많이 먹었는지 따져 봤다. 본다이 비치는 스파게티 맛집이 유명하다. 덕분에 수철도 스파게티를 많이 먹었다. 그중에서도 씨푸드 스파게티와 크림 스파게티를 많이 먹었다.
둘 다 박빙이었지만 세어 보니 크림 스파게티가 조금 앞섰다.
크림 스파게티의 승리였다.
그래서 이 가사의 제목은 ‘크림 스파게티’로 정했다.
장르를 락으로 정했지만, 이 가사의 분위기는 지난 가사와 완전히 다르다. 일상을 끄적인 것이다. 일상의 소소함과 순간 느끼는 삶의 모습. 그것에 대해서 끄적인 가사다. 그래서 앤디는 이 가사를 가장 빠르고 쉽게 번역을 했다. 자신과 잘 맞아서다.
분위기가 다르지만, 장르를 락으로 정한 건 음악적인 반전을 주고 싶어서다. 보사노바나 새미 재즈를 붙이는 것은 너무 흔하다. 일상의 소소함을 시크한 락의 분위기로 풀어 볼 생각이다.
‘크림 락이라고 부르려나? 아님 스파케티 락?’
평론가들이 이 음악을 뭐라고 부를지 궁금해졌다.
* * *
“여긴가?”
수철은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있는 클럽형 공연장의 간판을 확인했다.
자신이 찾던 장소가 맞았다.
“잘 찾아왔네.”
혼자 빙긋 웃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니 클럽 안은 대낮같이 환했다. 아직 영업 전이라 환하게 조명을 켜 놓고 있었다.
수철이 들어서자 모여 있던 사람 중 몇 명이 고개를 돌렸다. 그중에 가죽 자켓을 입은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