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거장 루카스
“헤이― 수철!”
존이었다. 곧장 다가와서 껴안으며 수철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찾아오는 데 힘들지 않았어?”“전혀, 예전에 오페라 하우스에 와 본 적이 있어서 찾기 쉬웠어. 그리고 지난번에 이 근처 베이스먼트에서 공연도 했었잖아?”“아, 맞다. 그랬었지? 내가 깜빡했었네. 하하.”
존은 자신의 머리를 툭 치면서 껄껄 웃었다.
“들어가자, 형이 기다리고 있어.”
존은 수철을 안으로 이끌었다.
낮에 보는 클럽의 모습은 생소했다. 밤과 전혀 달랐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하게 백열등이 켜진 클럽은 밤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초라해 보였다. 군데군데 보이는 먼지와 흠집이 드러난 스피커, 오래된 장비들.
“수철, 인사해. 내가 말했던 사촌 형 루카스야. 나에겐 스승 같은 사람이지.”
존의 소개에 사촌 형 루카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루카스가 내민 손등에는 털이 수북했고, 두꺼운 팔뚝에도 털이 덥수룩했다.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수철도 인사하며 손을 맞잡았다.
어른과 아이 같았다.
루카스에 비하면 수철의 손과 팔뚝은 아이 같았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루카스가 수염을 만지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수철은 이번 앨범의 음악을 완성해 가며 각각의 곡에 핵심 악기를 정했다. 블루스엔 기타를 락엔 드럼을.
블루스에 기타를 선정한 이유는 블루스 특유의 맛을 내려면 기타리스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해서였고, 락에서 드럼을 정한 이유는 드러머가 분위기를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락의 폭발력 있는 에너지는 드럼에서부터 출발한다.
블루스 기타리스트는 구했으니 락 드러머를 만날 차례였는데, 존은 자신의 사촌 형을 만나 보라고 권했다.
“사촌 형?”
“응, 나한텐 스승 같은 사람이야.”
존은 자신이 드럼을 잡은 이유는 무대에서 스틱을 휘두르는 사촌 형이 멋있어서 시작한 것이었고, 학창 시절 드럼을 가르쳐 준 것도 사촌 형이라고 했다. 사촌 형에게 레슨을 받고 실력을 키워서 대학을 들어갔다고 했다. 스승 같은 사람이 아니라 스승이었다.
“내가 형을 추천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뭔데?”
“형이 오랫동안 락 드럼을 쳤기 때문이야.”
“그래?”
수철은 존이 재즈를 하니까 당연히 사촌 형도 재즈 드러머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의 반전이 있었다.
“형은 오랫동안 락 밴드의 드러머로 활동했었어. 엄청 잘나가는 밴드였지.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멤버들 몇 명이 다치고, 팀이 해체됐어. 그 후로 형은 몇 년 방황하다가 재즈로 전향했어. 뒤늦게 학교에 다시 들어간 거지.”
수철은 그 말이 귀에 탁 들어왔다. 형에겐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수철이 딱 만나고 싶은 드러머였다. 오랫동안 락을 하다가 지금은 재즈를 한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들렸다.
“형의 이력이 특이하지? 잘나가던 락 드러머가 재즈 연주자가 된 게?”
“흔하지는 않지.”
“형은 지금 재즈 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어. 잘나가는 재즈 드러머지.”
듣기 좋은 말이었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스토리로 들렸다.
“형의 그런 경력 탓에 아직도 방송이나 영화에서 락 드러머가 필요하면 형을 세션으로 찾고 있어. 재즈 뮤지션이 락까지 했으니 엄청난 메리트지.”
맞는 말이다. 락의 파워에 재즈의 정교함까지 갖췄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존은 계속해서 형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락 밴드의 앨범이나 공연에 세션으로도 참여하고 있다고 했고, 오늘 찾아온 이 클럽형 공연장도 사촌 형 거라고 했다. 클럽을 운영하며 가끔 밴드를 이끌고 무대에 선다고 했다. 오늘이 그날이다. 존이 약속을 오늘로 잡은 이유다.
“저쪽으로 앉을까요?”
인사를 나눈 루카스는 수철을 한쪽 편에 놓인 원탁 테이블로 안내했다.
“존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음악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요.”
루카스는 자리에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수철은 존이 사촌 형에게 자신에 대해서 미리 귀띔을 해 놓겠다고 할 때 말리지 않았다. 지난번 이언과의 경험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존은 루카스에게 수철에 대해 설명하며 노출을 꺼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철을 안심시켰다.
“엄청난 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존의 친구였다니, 놀랍기도 하고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하.”
루카스는 수철과 존을 번갈아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말을 하며 존을 끌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 모습을 보니 둘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도 비슷하고 광대뼈가 큰 것이 같은 핏줄인 게 분명했다. 웃을 때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보이는 미소는 판박이었다.
수철은 마음이 편했다.
이번엔 같이 합주를 할 이유도, 실력을 테스트할 필요도 없다. 이미 루카스는 수철의 존재를 알고 있고, 수철도 루카스의 음악을 들어 보고 공연 영상도 보고 왔다. 서로를 확인하는 단계는 거칠 필요가 없다.
“하겠습니다. 제안해 줘서 고마워요.”
루카스는 음악도 들어 보지 않고 참여하겠다고 했다.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절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할게요.”
그는 준비된 드러머였다. 괜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다른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락에서는 특히나 드러머가 중요하다. 지휘자가 되어 음악을 이끌어야 한다. 수철은 루카스에게서 든든한 느낌을 받았다.
“땡스, 존.”
수철은 존에게 고맙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기꺼이 수철을 위해 자신이 할 수도 있는 자리를 양보해 줬다. 물론 존은 락에 대한 경험이 없다. 처음부터 재즈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발 물러선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선뜻 나서서 좋은 드러머를 소개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고맙긴!”
존은 수철의 고맙다는 말에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대신 다음 앨범엔 내가 첫 번째야. 알지?”
존은 다음 앨범엔 자신을 첫 번째로 선택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하! 그래, 알았어.”
수철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루카스는 수철이 편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 곳곳을 보여 줬다. 벽에 붙어 있는 뮤지션들과 친분을 얘기하며 그들과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수철을 봤다.
“이언을 만났다고요?”
루카스도 이언을 알고 있었다.
하긴 둘 모두 시드니에서 활약하는 뛰어난 연주자인 만큼 서로를 모를 리가 없다.
수철은 루카스의 물음에 끄덕였다.
“몇 달 전 공연을 봤었고, 며칠 전엔 집에도 갔었어요.”
그 말에 루카스는 빙그레 웃더니 자신과의 친분을 말했다.
“이언과는 예전에 같이 공연을 꽤 했었어요. 주로 페스티벌이나 프로젝트 공연이었죠. 영국 BBC에서 방송 밴드도 같이 했었고요.”
루카스는 이언과의 친분이 꽤 오래됐었다.
“이언의 연주는 정말 대단하죠. 그의 기타는 장르를 뛰어넘는 예술이에요.”
루카스는 이언이 대단하다며 격하게 치켜세웠다.
수철은 루카스의 말을 들으니 기대감이 생겼다, 이번 앨범이 생각보다 더 좋은 사운드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요.”
클럽을 열 시간이 가까워지자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루카스는 수철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갔다.
수철은 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왜? 가게?”
“응, 할 얘기는 다 했으니까.”“그러지 말고 나랑 저녁 먹고 이따가 루카스 형 공연도 보고 가.”
“그럴까?”
“그래, 그렇게 해. 넌 좀 쉬어야 해. 작업을 너무 많이 해.”
존은 자신이 저녁을 사겠다며 오페라 하우스가 보이는 야외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루카스를 소개받은 날이어서 수철이 사려고 했지만 존은 극구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왜 그래? 내가 사야지.”“넌 지난번에 본다이에서 샀잖아. 오늘은 내가 살게. 네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수철은 어쩔 수 없이 다음에 사기로 하고 오랜만에 스파게티가 아닌 스테이크를 먹었다. 저녁을 먹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오페라 하우스 주위를 산책했다. 존은 호주의 뮤지션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이곳 뮤지션들이 살아가는 얘기를.
두두, 두두둥! 두둥! 두둥!
다시 클럽 계단을 내려가는 데 드럼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운드 체킹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소리는 더 커졌다.
투둥! 쿵두두둥! 투쿵! 투쿵!
수철은 존과 나란히 앉아서 사운드 체킹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후, 클럽 안을 비추던 환한 백열등이 꺼졌다. 클럽은 다시 깜깜해지고 무대를 비추는 가는 핀 조명 몇 개만이 켜졌다. 그리고 얼마 후 계단에 길게 늘어서 있던 관객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클럽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짝짝짝!
첫 번째 팀의 공연이 끝나고 루카스의 팀이 무대에 올랐다.
“와―!”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루카스! 루카스!”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도 있었다. 사장이라서 그런지, 연주를 잘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인기인이었다. 하지만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도 루카스가 자리를 잡고 스틱을 손에 쥐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루카스는 그 분위를 즐기려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몇 초의 적막이 흐른 후 루카스는 스틱을 부딪치며 박자를 세고는 강하게 베이스 드럼의 페달을 밟았다. 그의 크고 두꺼운 발이 페달을 밟자,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음악이 시작됐다. 수철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첫 곡은 락이 섞인 퓨전 음악이었다. 그는 털이 덥수룩한 팔을 움직이며 스네어 드럼을 내리쳤다. 빠르게 심벌을 두드려서 박을 나누며 다이내믹과 그루브를 동시에 만들어 나갔다.
말 그대로 그는 지휘자였다. 마스터이자 감독이었다. 음악의 다이내믹을 쥐고 흔드는 마에스트로였다.
그의 모습에서 거장(巨匠)의 느낌이 풍겼다.
루카스가 딱 버티고 있으니 음악은 흔들림 없었다. 루카스가 중심을 잡고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이언. 통화 가능할까요?”
수철은 이언에게 전화했다. 아무래도 ABYSS 앨범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루카스도 알고 있으니 이언에게도 말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남의 입을 통해서 듣는 건 기분 나쁠 테니까.
―와, 수철 반가워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를 하셨네요?
이언은 수철이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수철이 전화를 했다는 것만으로 격하게 반겼다.
수철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언, 혹시 ABYSS라는 앨범 아세요?”―ABYSS요? 하하. 당연히 알죠. 그 앨범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빌 에반스 이후로 최고의 앨범이라고 난린데. 그런데 갑자기 그 앨범을 왜?
“사실 그 앨범이…….”
수철은 자신이 작곡하고 프로듀싱 했다고 밝혔다. 지난번에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조용히 작업하러 왔기에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언은 수철의 사과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 뭐라고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어쩐지. 역시.
이언은 이런 단어들만 내뱉었다.
진즉에 말하지 않아서 기분 나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작은 어감으로 표현했다.
―수철, 장난이 좀 심했어요. 알죠?
이언은 그렇게 가볍게 말하고 넘어갔다. 다행이었다. 수철은 이마에 땀방울을 닦았다. 이언이 왜 자신을 기만했냐고 따져 물으면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긴장하고 있었다.
휴―
한숨 돌리고 수철은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해요, 많이요.”
큰 고비가 넘어가자 수철은 아까 이언이 전화하려고 했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언, 아까 전화하려 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네, 수철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수철이 꼭 같이했으면 좋겠어요.
이번엔 이언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그게 느껴졌다.
중요한 얘기?
수철이 갸웃하는데, 이언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