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Party in Newcastle(2)
수철이 놀란 눈을 크게 뜨자 이언은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수철은 믿기 어려웠다. 이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
그는 바로 젊은 시절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팀에서 연주했던 마커스 엠(Marcus M)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아들처럼 아꼈다는 흑인 베이시스트, 마커스 엠!
수철은 순간 횡재를 한 느낌이 들었다.
“미스터 수철, 만나서 반가워요.”
그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특유의 부드러운 시선으로 수철을 봤다. 수철은 그의 두툼한 손을 맞잡았다.
“네, 안녕하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편하게 수철이라고 불러 주세요.”“그래요, 수철도 편하게 마커스라고 부르세요.”
40대 중반인 그는 오랜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귀환한 병사 같은 느낌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 더는 두려울 게 없는 사람 같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지만 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엄청난 내공을 가진 연주자라는 게 느껴졌다.
“수철, 잠시 저쪽으로.”
이언은 수철이 마커스와 인사를 끝내자 다음 사람을 소개하려고 수철을 이끌었다. 하지만 수철은 마커스와 인사만 나누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이 연주한 사람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언, 조금만 더 얘기를 나누고 갈게요.”
수철이 떠나려 하지 않자 이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혼자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얘기 나누고 저쪽으로 오세요.”
“네.”
이언은 눈을 마주치고는 먼저 자리를 이동했다.
마커스는 이언이 떠나고 나자 인자한 아저씨 미소로 수철을 바라봤다.
“이언은 참 대단한 연주자예요. 알죠?”
마커스는 이언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네, 알아요.”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언이 충격을 받았다고 했으니 수철은 더 대단한 연주자겠죠?”
그 말에 수철은 당황했다.
마커스 특유의 농담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용과 상관없이 마커스가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언이 수철에게 충격을 받았다고 얘기한 거 같았다.
“저 그렇지 않은데…….”
수철은 말끝을 흐렸다. 이언이 과장한 거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커스에겐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커스와는 처음 봤지만, 오래전부터 서로를 잘 아는 느낌이었다.
“알겠지만,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수철에게 관심이 많아요. 이언이 그렇게까지 너스레를 떨 사람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깐깐하게 구는 편이지.”
마커스는 이언에 대해서 말하는 게 멋쩍은지 손바닥을 펴 보였다가 내렸다. 수철은 마커스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마커스가 말을 멈춘 틈을 타서 궁금한 걸 물었다.
“어떻게 호주에 계시는 거예요? 미국이 아니고요?”
그 말에 마커스는 먼저 껄껄 웃었다.
“하하, 수철도 그게 궁금하군요?”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 모양이었다.
“여기 온 지 벌써 7년 됐어요.”
“아…….”
“페스티벌 초청 공연 왔다가…….”
마커스는 호주에 온 지 한참 됐다고 했다. 재즈 페스티벌에서 초청 공연을 마치고 호주를 여행하다가 어메이징한 자연환경에 반해서 아직도 머물고 있다고 했다.
“수철도 알죠? 여기가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란 걸요.”
“네.”
수철은 깊은 공감의 눈빛을 보이며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거예요?”
가까운 곳이길 바랐다, 자주 볼 수 있게.
그런데 그런 꿈을 꾸기엔 너무 멀었다.
“태즈메이니아(Tasmania)에 살고 있어요.”
원래 마커스의 집은 미국의 뉴올리언스다. 그곳은 재즈의 본고장이다. 그곳에서 마커스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만났다.
그런 그가 다른 곳도 아니고 호주의 태즈메이니아에 살고 있다니.
제주도처럼 호주 아래에 큼지막하게 달린 섬에.
수철에겐 놀랍고 충격이었다.
수철의 이런 기분을 아는지 마커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곳에 있지만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요. 수철이 사는 시드니로 갈 수도 있고요. 우린 언제나 자유로운 여행자잖아요?”
그는 눈을 마주치며 깊은 미소를 보였다.
우린 언제나 자유로운 여행자.
이 말은 마커스가 즐겨 쓰는 말이다. 그는 음악가를 항상 그렇게 표현했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에는 항상 그 말이 등장한다.
그래서 수철도 그 말을 알고 있다.
마커스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들으니 너무 반가웠다. 그러면서 내심 진짜로 마커스가 시드니로 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커스는 잠시 멈췄던 말을 다시 이었다.
“사실 태즈메이니아에 있게 된 건…….”
마커스는 태즈메이니아에 자리를 틀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호주를 여행하면서 신비로운 자연환경에 많이 반했었는데, 태즈메이니아가 그런 환경의 종착지라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방문한 거였어요. 처음엔 그랬어요.”
마커스는 말을 멈추고 잠시 시선을 멀리 뒀다.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는 관광만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안 가 보면 후회할 거 같아서 스케줄까지 조절하며 갔었는데, 덜컥 발목을 잡혀 버렸지 뭐예요? 하하!”
마커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언뜻 보이는 입가의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 줬다.
“수철도 나중에 꼭 한번.”
마커스는 수철에게도 자신이 사는 태즈메이니아에 놀러 오라고 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신비로운 자연과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는 동물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난 야생동물 보호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는 가슴에 달린 배지를 자랑스레 보여줬다.
수철은 뿌듯해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당장 그 협회에 가입해서 마커스와 같이 활동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수철은 본격적으로 마일스 데이비스에 관한 얘기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멀리서 자꾸 이언이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수철은 제일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 못한 채 등을 돌렸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어떤 사람이었냐는.
마커스에게 다시 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이언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용수철입니다.”
수철은 이언이 소개하는 몇 명과 계속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메인 무대에 참여하는 뮤지션들이었다. 하나같이 수철을 반기며 관심을 보였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은 모두 호주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마커스와 비슷한 이유로 호주에 눌러앉은 사람들이었다. 대학의 초청으로 강의를 왔다가 눌러앉은 영국 출신 관악기 연주자 윌리엄, 공연을 왔다가 눌러앉은 브라질 출신 드러머 페드로, 유학을 왔다가 20년째 살고 있다는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 빈센트까지.
“사실 나도 마찬가지예요.”
이언은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우리 부모님이 이곳에 여행 왔다가 반해서 결국 이민을 왔거든요.”
이언의 말대로 하면, 메인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호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호주에 반해서 이곳에 살고 있다는. 수철을 포함해서.
“잠시만요.”
수철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슬쩍 빠져나왔다. 접시를 들고 마크와 함께 뷔페 테이블 앞에 섰다. 신선한 새우와 훈제 연어, 버터를 입힌 홍합구이를 가득 채워서 테이블로 향했다.
* * *
“그동안 얼마나 늘었나 한번 볼까요?”
“하하, 그럴까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무대가 만들어졌다. 윌리엄이 농담을 던지자 페드로가 반응하며 무대로 발걸음을 돌렸고, 곧이어 이언이 따라붙었다. 곳곳에 흩어져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한두 명씩 무대 앞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우리도 한 곡 해 볼까요?”
마커스는 무대에 악기가 세팅되는 모습을 보고는 수철에게 말을 건넸다.
“네, 좋아요.”
수철이 끄덕이자 마커스는 앞장서 무대로 향했다. 수철도 마커스의 뒤를 따라 무대로 향했다. 수철은 묘한 설렘이 올라왔다. 마커스와 같이 연주를 하기에.
수철이 가장 좋아하는 마일스 데이비스는 세상에 없지만, 그와 같이 연주했던 친구가 남아서 같이 연주한다. 그것만으로 설렜다.
* * *
“오늘은 파란 중절모에 노랑 바지가 눈에 띄네요. 그가 아니면 소화할 수 없는 패션이죠.”
―하하하!
이언은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을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관객들도 서로 아는 사이지만 재미 삼아 하는 것이었다. 이언의 장난스런 멘트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웃으며 반응했다. 이언은 더 신이 나서 크게 외쳤다.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 윌리엄 해밀튼을 소개합니다!”
짝짝짝!
오늘 참석한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자 대학교수인 그가 무대 앞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파란 중절모와 노랑 바지가 핀 조명 아래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다음은…….”
이언의 소개가 계속됐다. 무대 밖의 사람도, 무대 위의 사람도 서로 잘 알기에 주로 가벼운 장난을 치며 소개했다. 하지만 수철에 대한 소개는 그렇지 않았다. 간단했다. 장난칠 부분도 없고, 아직까지는 그럴 정도로 친하지 않다. 이름을 말하고 오늘 피아노를 들려줄 사람이라고만 소개했다. 수철은 이언의 소개에 일어나 가볍게 인사했다.
짝짝짝!
간단한 소개에 비해 박수 소리는 우렁찼다. 환영한다는 의미와 연주에 대한 기대감이 섞인 박수 소리였다. 이언이 충격을 받았다는 소문이 이미 다 퍼져 있었다.
박수치며 수철을 보는 사람들의 눈은 기대에 차서 반짝였다.
원, 투, 쓰리.
첫 곡은 트럼본 연주자로 유명한 Curtis Fuller의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로 시작했다.
그래서 윌리엄은 트럼본을 잡았다.
페드로와 슬쩍 한번 눈을 마주치고는 드럼과 같이 출발했다.
윌리엄이 마우스피스에 입술을 붙이며 U자 모양의 관을 움직이자 트럼본 특유의 낮고 풍성한 소리가 나팔을 통해 부드럽게 깔리기 시작했다. 마치 믿음직한 남자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성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윌리엄의 트럼본 소리와 함께 페드로는 브러쉬로 스네어 드럼을 쓰다듬듯이 원을 그렸다. 가볍게 두드리며 스윙 리듬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곧이어 마커스의 콘트라베이스가 첫 음을 튕기며 부드럽게 따라붙었다. 그의 손끝은 큼지막한 콘트라베이스의 현을 튕기는 게 아니라 작은 장난감을 매만지는 거 같았다. 그에게 악기는 그런 느낌이었다. 연주하는 게 아니라 갖고 노는.
하지만 현이 떨리며 내는 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했다. 연주하면서 한 번씩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의 모습은 순진한 아이 같았다. 그만큼 연주를 즐기고 있다는 게 얼굴에 드러났다. 연주가 일상이 되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언은 넓은 바디의 붉은색 깁슨 기타를 손으로 뜯으며 리듬을 넣었고, 빈센트는 바이올린으로 중간중간 끼어들며 음악의 맛을 챙겼다.
사람들은 최고의 연주자답게 물 흐르듯이 서로의 소리를 섞으며 같이 흘러갔다. 연륜은 괜히 생기는 게 아니었다. 연주한다는 느낌보다 악기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자신의 악기를 잡고 귀만 열어 놓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평안했다. 너무 평안해서 지루하지 않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수철도 이들의 분위기에 합류했다. 조용히 화성을 누르며 다른 악기를 받쳤고, 조화를 이뤘다. 같이 물을 따라 흐르며 이들의 평안한 분위기를 더 평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즉흥 연주가 시작되자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곡이 쭉 한번 돌고 나서 순서에 맞춰 각자의 악기로 곡에 대한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해석이었다. 악기들이 조금씩 언성을 높이며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꽉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