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59화 (159/239)

#159화. 가사와 보컬

“네, 기억하죠. 한창 더울 때였잖아요? 수상 버스 탔던 것도 기억나네요.”

빈센트가 대표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때가 떠오르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다 같이 시장 구경을 갔었잖아요. 꼬불꼬불한 골목을 돌아다니면서요. 그것도 기억나요?”“당연하죠, 사람들이 어떻게 길을 쉽게 찾아가는지 신기해했었잖아요?”

빈센트는 말을 하고 사람들을 쳐다봤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윌리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게 무슨?”

빈센트는 말뜻을 모르겠다며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이 윌리엄에게 향했다.

“처음에 수철이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안내를 하길래 안 따라가고 버텼었죠. 왜 저런 길을 가냐고, 내가 아는 길로 가겠다고 말이에요. 그러다가 수철이 안내하는 길이 맞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 길이 광장으로 연결됐으니까요.”

“……!”

“그다음엔 수철이 안내하는 길을 믿고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모든 걸 수철에게 의지하고 있더라고요. 하하!”

윌리엄은 아까 기억을 되짚으며 웃음을 보였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난 그랬는데, 여러분은 어땠어요?”

윌리엄은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모인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사람들도 윌리엄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의 말에 동의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없던 이언까지도 동의했다.

“저도 그랬어요. 이거 내가 치고 있는 거 맞나? 내가 연주하는 거 맞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번 경험했는데도 말이에요. 하하.”

이언은 멋쩍은 얼굴로 크게 웃었다. 웃음엔 왠지 모를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처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제 파트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윌리엄이 만들어 주는 칵테일을 마시며 계속해서 마지막 곡에 관한 얘기를 이어 갔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사람들의 표현은 좀 더 직설적으로 바뀌었다.

공포 영화를 본 듯이 소름 돋았다는 말도 나왔고, 완전히 지배당했다는 말도 나왔다.

그들의 모습은 수철과 같이 연주하기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 보는 연주자의 등장에 얼마나 대단하길래?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의 머릿속에도 그런 생각이 남아 있지 않다. 경이롭다는 생각뿐이다.

“…….”

마커스는 아무 대꾸 없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과 대화하던 수철의 모습이 생각나 빙그레 웃었다.

* * *

수철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재규어와 함께 시드니로 향하고 있었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수철은 상쾌했다. 든든한 지원군을 모집해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윌리엄, 페드로, 빈센트. 거기에다 마커스까지. 앨범을 완성할 든든한 외인구단이 탄생했다.

미소가 번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수철은 문득 마커스의 즉흥 연주가 떠올랐다.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멜로디를 읊조렸다. 쭉 뻗은 해안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 * *

“어때요? 맘에 들어요?”

앤디는 번역한 가사를 내밀고 수철의 얼굴을 살폈다.

수철을 보는 앤디의 표정이 지난번과 달랐다.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만큼 이번엔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수철은 앤디의 기대에 맞춰 반응했다.

“와! 앤디, 이거 앤디가 한 거 맞아요?”

수철은 앤디가 건넨 가사를 보고 입이 벌어졌다. 가사 한 줄 한 줄에 번역 의도와 왜 이 단어를 선택했는지까지도 빼곡히 적혀 있었다. 대단한 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과물.

수철이 놀란 건 앤디가 가사를 간결하면서도 흐름이 끊기지 않게 잘 연결했다는 것이었다.

몇 주 사이에 놀라운 성장이었다. 수철은 가사와 앤디를 번갈아 보며 직접 한 거 맞냐고 물었다. 그만큼 놀랍다는 뜻이었다.

“네, 제가 한 거 맞아요.”

앤디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그러자 수철이 다시 한번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진짜 앤디가 한 거 맞는 거죠?”

“네?”

앤디가 수철의 장난에 눈을 크게 떴다.

“하하! 농담이에요, 너무 가사를 잘 번역해서 그래요. 이번 것은 내가 쓴 것보다 더 좋은 거 같아요.”

수철이 활짝 웃자 앤디도 그제야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지난번 수철 씨 말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어떤 말이요?”

“가사를 쓸 때의 느낌 말이에요. 번역하면서 수철 씨가 이 가사를 쓸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알겠더라고요. 어떤 어감의 단어를 선택해야 하는지를요. 있는 그대로의 번역이 아니라, 감성의 흐름을 연결하는 단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헤헤.”

앤디는 말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수철은 놀라움에 다시 한번 입이 벌어졌다.

“와!”

일취월장이라는 단어는 이런 데에 써야 할 거 같았다.

* * *

수철은 앤디가 번역한 가사에 장르를 선택하고 멜로디를 붙이기 시작했다. 멜로디가 완성되자 바로 편곡을 시작했고, 편곡하고 나서는 악기를 넣어 데모를 만들었다.

―확인하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속속 도착하는 앤디의 나머지 가사도 수철의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더는 가사 번역을 놓고 진을 빼지 않아도 됐다. 모든 가사는 그렇게 잘 마무리됐다.

수철은 나머지 가사에도 장르의 옷을 입히고, 편곡의 색채를 더했다. 연주자들이 다 정해져 있어서 악기 구성을 하는 데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수철이 넘겨주기만 하면 다 알아서 채울 사람들이다.

수철은 6곡 모두 데모를 완성했다. 비워 놨던 여백에 소리를 다 채워 넣었다.

휴―!

수철은 작업을 모두 마치고 발코니에 서서 잠시 바다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마음이 뿌듯했다. 이번 앨범은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서 좋았다.

날씨가 정말 좋네.

화창한 날씨 탓에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철은 파라솔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바다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감상했다. 밀크티를 마시며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한가로이 구경했다. 작업을 끝내고 나니 마음이 여유로웠다.

수철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만들어 놓은 음악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했다.

그리고 이번 앨범에 참여할 모든 연주자에게 작업한 데모를 보냈다. 세션에 앞서 음악의 분위기를 참고하라는 이유에서다.

미리 들어 보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서로 의견을 나누자는 생각에서다.

이제 악기 녹음만 하면 음악은 마무리된다. 그다음엔 보컬 녹음과 믹싱, 마스터링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번 앨범은 모두 끝이 난다.

* * *

―드디어 시작한 거예요?

“네, 가사도 다 만들었고, 음악도 다 만들었어요. 이제 악기 녹음만 남겨 놓고 있어요.”

음악을 완성하자 수철은 본격적으로 앨범에 참여할 보컬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시나리오가 나왔으니까 목소리 배우를 섭외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크의 표현대로 하면 그렇다.

어떤 보컬을 섭외할 건지는 이미 리스트가 다 만들어져 있다.

이들에겐 모두 공통점이 있다. 수철이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이라는, 모두가 그때 만난 인연들이다. 클럽에서, 펍에서, 거리에서, 수철은 이들과 친분을 쌓으며 노래하는 몇 명을 눈여겨봤었다. 같이 어울리며 맥주를 마시고 잼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수철은 자신이 앨범을 하게 되면 노래를 불러 달라는 얘기를 직설적으로 했다. 사람들은 수철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내 목소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해요. 기꺼이 달려갈 테니까. 하하.”

사람들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속내는 엇갈렸다.

수철이 음악을 한다고 소개했지만, 그들은 수철이 누군지 모른다.

물론 같이 잼을 해 본 뮤지션들은 수철이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묻기도 전에 먼저 전화번호를 내밀었다. 기다릴 테니 꼭 연락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반신반의했다.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진짜 앨범을 할까?

한다고 해도 설마 연락할까?

그런 생각이었다. 술김에 좋다고 하고, 수철이 전화번호를 묻자 번호를 내밀었지만 설마 다시 연락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때까지는 그랬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음악을 보내 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수철이 진짜 앨범을 시작한다고 알려 왔다. 가사와 음원을 보내겠다고 연락을 해 왔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진지함이 묻어났다.

―네, 어서 보내 주세요. 어떤 음악인지 궁금해요. 수철 씨가 제 목소리를 듣고 어떤 음악을 만들었을지 정말 궁금해요.

“이메일 주소 알려 주세요. 바로 보내 드릴게요.”

수철은 리스트에 있는 모두에게 전화해서 다시 한번 앨범 참여 의사를 확인한 후,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가사와 멜로디 라인이 들어가 있는 데모 음원을 보내기 위해서다.

―제 이메일 주소는…….

사람들은 서둘러서 자신의 이메일을 알려 줬다.

이전까지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수철이 앨범을 낸다는 소식에 하나같이 기뻐했다.

―여행하면서 쓴 가사라고요? 전부 다요?

“네, 그래서 앨범 제목도 SUNSET이에요. 도시는 달라도 SUNSET은 항상 같았으니까요.”―와, 기대돼요. 어서 보내 주세요. 어떤 곡이 완성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여행 중에 느낌을 담았으면 우리도 가사에 포함되는 거 아닌가요?

사람들은 수철이 앨범을 시작했다는 소식과 잊지 않고 자신들에게 연락했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 * *

‘어디 보자.’

수철은 이메일을 보내기에 앞서 다시 한번 가사를 펼쳐 놓고 노래할 보컬과 음악을 서로 연결했다.

이번엔 장르도 다 다르고, 노래할 가수도 6명이나 되니까 헷갈리지 않게 확인 작업이 필요했다.

이름과 이메일 주소, 가사와 음악을 다시 확인하면서 여행 중 만났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 무대에서 마이크를 위로 들어 올리며 샤우팅을 하던 모습, 거리에서 귀를 막고 소리에 집중하며 아카펠라를 하던 모습.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수철은 그 장면을 확대해서 이번엔 그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레인, 밤사이 친 거미줄, 크림 스파게티, 그리고 새롭게 제목을 붙인 국도 위의 캥거루, 로컬 카우보이, 퍼스 날라리.’

국도 위의 캥거루는 실제로 캥거루를 보고 만든 것이 아니다. 도로를 달릴 때마다 나타나는 표지판을 보고 만든 가사다. 캥거루를 조심하라는 표지판, 캥거루가 다치게 되면 어디로 전화하라는 표지판. 사람들이 얼마나 동물들을 아끼는지, 동물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철은 길 변에 차를 세우고 그 느낌을 적었다.

로컬 카우보이는 젊은 여성이 아버지를 도와 낮에는 작은 목장을 운영하고, 밤에는 기타를 메고 거리에서 노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만든 가사다. 그녀의 미소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퍼스 날라리는 클럽에서 쓴 가사다. 맥주를 마시며 라틴 음악을 듣는데, 남자들이 번갈아 가며 한 여자를 유혹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 친구가 있는데도 그랬다. 남자가 술을 가지러 가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잠시 한눈만 팔면 남자들이 달라붙어서 전화번호를 물었다. 신기한 건 여자는 모두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줬다. 그러면서도 남자 친구가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공연을 봤다. 수철은 그 장면들을 가사로 스케치했다.

보컬을 정하면서 한 가지 재밌었던 건 선택한 보컬이 제시와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특히 ‘레인’이 그랬다. ‘레인’을 작곡하면서 분위기가 제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보컬을 정하고 보니 그 사람에게서도 제시와 비슷한 필이 느껴졌다. 자유분방한 파란 눈의 그녀, 미아는 톰보이 스타일의 미녀였다. 말괄량이 같다가도 분위기가 바뀌면 시크한 미소를 보이는 그녀가 ‘레인’을 부르게 됐다. 가사의 느낌과 잘 어울렸다.

* * *

―지이잉.

이메일을 보낸 지 30분이나 지났을까.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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