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마일스와 함께한 이틀
―와! 수철! 수철은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에요!
맨 처음 전화 온 사람은 ‘레인’을 부를 미아였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듣고 정말 놀랐어요. 수철은 완전 기대 이상이에요! 아니, 내가 지금까지 만나 뮤지션 중에 최고예요. 게다가 가사는 정말.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감동이에요. 특히나 마지막에 ‘내 눈빛, 레인이 되어.’ 이 부분은 내 심장을 파고들었어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드는 정도가 아니에요. 내가 가사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한참을 칭찬을 하던 미아가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가 울렸다. 다음 전화도 미아와 다르지 않았다. ‘밤사이 친 거미줄’을 부르게 될 맥스였다. 우선 탄성부터 내질렀다.
―와! 수철!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네?”
―이건 프로도 보통 프로가 아니잖아요? 나를 속인 겁니까?
“속이다니요?”
―정말 놀랐다는 뜻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계속 격양되어 있었다.
맥스는 수철이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 정도로 알고 있었다. 수철이 앨범 만들 계획이라는 말만 하고 연주도 잠깐만 같이했기 때문이었다.
―수철의 진짜 정체가 뭡니까? 음악 공부하는 학생 아니었어요?
“전, 그렇게 얘기한 적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누가 봐도 수철은 아직 학생이잖습니까. 게다가 악기를 잘 다루니까 그렇게 생각한 거죠!
맥스는 계속 음악에 대해서 칭찬하다가 앨범에 참여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거리에서 남의 노래를 부르며 버스킹을 하는 맥스에겐 그럴 만했다.
―지이잉.
다음에 이어진 전화도 칭찬 일색이었다.
―작사는 처음이라고 하더니,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쓴 거예요? 정말 처음 맞아요?
“…….”
“너무 좋아서 그래요. 완전 맘에 들어요. 이런 가사를 부를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감사해요.
음악을 들을 때 노랫말에 비중을 많이 둔다는 앨렌은 음악보다 가사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다.
―처음 보자마자 이건 내 가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목이 퍼스 날라리인데도 자신의 가사 같다고 했다.
―가사에 거짓이 하나도 없어요.
그녀는 그렇게 표현했다. 거짓말만 가득한 팝과는 다르다고 추켜세웠다.
벌써 음악에 사로잡혀서 정신이 몽롱할 정도라느니, 가사가 날카롭게 감성을 건드려서 눈물이 났다느니.
듣기 민망하고 쑥스러울 정도의 칭찬이 쏟아졌다.
어찌 됐건 수철은 사람들의 우호적인 반응에 만족했다.
“음악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가사도 우려했었는데 좋아해 줘서 고맙고요. 우선 앞으로의 일정을 말씀드릴게요.”
수철은 흥분하는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차분히 앞으로의 일정을 얘기했다.
“보내 드린 가사와 데모 반주로 먼저 연습하시고, 악기 녹음이 끝나면 다시 완성된 반주를 보내 드릴게요. 그걸로 2주간 연습을 하고 바로 녹음을 진행할 거예요.”
먼저 보내 준 가사와 멜로디 라인이 들어가 있는 데모 버전으로 음악을 익히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악기가 들어간 최종 버전을 보낼 테니 2주간 파이널 연습을 하라는 말이었다.
“보컬 녹음은 말씀드렸듯이 선택이에요. 사는 곳에서 녹음해서 보내 주셔도 되고, 아니면 시드니로 오셔서 저와 같이 녹음해도 돼요.”
수철은 앨범에 참여할 보컬들에게 선택권을 줬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고, 하는 일들이 있어서 시드니에서 녹음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모두가 수철의 배려를 거절했다.
―그럴 순 없죠. 수철을 만나야겠어요, 이런 가사와 곡을 만든 사람을 말이에요. 휴가를 내서라도 시드니로 갈게요.
모두 하나같이 시드니에 와서 녹음하겠다고 했다. 수철을 직접 만나서 같이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네, 알겠어요. 그러면 저도 좋죠.”
수철은 그들의 의지를 꺾을 생각이 없었다. 같이 녹음하면 당연히 더 좋은 앨범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시드니로 오겠다는 사람 모두에게 경비와 호텔을 제공할 생각이다. 피처링에 대한 감사비도 최고 수준으로 책정할 생각이다.
* * *
작업도 다 했고, 이메일도 다 보냈고, 통화도 다 했고.
미뤄 뒀던 청소까지 다 하고 자료까지 다 정리했는데도 아직 녹음까지 며칠의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수철은 휴가를 주기로 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작업한 자신에게.
이틀 동안.
이번엔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립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거였다. 수철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기로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티 중심가에 있는 시디샵으로 향했다. 매장을 뒤져 마일스와 마커스가 같이 연주한 음악이 들어 있는 앨범을 모두 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헤드폰을 쓰고 그들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두 다리를 쭉 뻗었다.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헤드폰을 통해 들리는 마일스의 음 하나하나에,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끝이 보였다. 바람을 불어 넣느라 볼록해진 볼이 보였다.
‘풋!’
마치 마일스가 트럼펫을 들고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마커스의 베이스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확실히 젊은 시절 마커스의 베이스는 힘이 넘쳤다. 며칠 전의 모습과는 사물 달랐다.
젊은 패기라고 할까.
베이스의 현에 닿는 손끝에 에너지가 넘쳤다.
‘이래서 마일스 아저씨가 마커스를 그렇게 아꼈겠지.’
마일스의 마음을 알 거 같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음악에서도 마커스의 슬랩 베이스 향연이 펼쳐졌다.
두꺼운 베이스 줄을 튕기며 연주하는 마커스의 젊은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혼자서 두 대의 베이스를 연주하며 앨범의 다이내믹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일스의 신기루 같은 트럼펫 소리를 잘 받치고 있었다.
* * *
수철은 비치의 야외 테이블에서 과일 주스를 마시며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지이이잉.
드디어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존이었다.
“어떻게 됐어?”
―찾았어, 전화번호와 주소는 문자로 보내 줄게.
“고마워. 주말에 전화해, 내가 밥 살게.”―오케이!
수철은 존에게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합주실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시드니의 합주실은 아직 잘 모르니까.
수철은 존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고 합주실에 전화해서 바로 시간을 예약했다.
“지금 가면 최대한 몇 시간을 쓸 수 있을까요?”―음, 지금 오시면 12시간은 가능하세요.
“네, 그럼 그렇게 잡아 주세요.”―12시간을 다요?
“네.”
수철은 예약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부터의 시간이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수철은 집으로 돌아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시디를 모두 꺼내 들었다. 물병을 챙겨서 곧장 합주실로 향했다.
끼이익.
합주실의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시디플레이어에 마일스의 시디를 밀어 넣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수철은 잠시 음악을 들으며 숨을 고른 후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반쯤 열린 피아노 뚜껑 사이로 수철이 누른 건반의 망치가 현을 두드리는 게 보였다. 조금씩 망치들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수철은 본격적으로 마일스와 교감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다.
예전에 도어스에서 몇 번 이렇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어쩌다 작업실에서 이렇게 한 적이 있지만 한두 시간이 전부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12시간 연주하는 건 처음이다. 제대로 힐링하는 시간이다.
수철은 쉬지 않고 연주했다. 건반에서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마일스와 주고받는 선율에 휩싸여 있었다.
이 공간에는 마일스와 수철, 단둘만이 있었다.
둘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서로 섞이며 공간 구석구석을 훑었다.
처음엔 수철이 마일스의 연주에 끼어들며 말을 걸었지만, 나중엔 오히려 수철의 연주에 마일스가 답하는 거처럼 들렸다. 둘은 시공간을 넘어 그렇게 서로 소통했다.
같이 있는 거 아니야?
누군가 들었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정신없이 마일스와 떠들고 놀다 보니, 어느새 12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아쉬웠지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또 봐요.
수철은 오랜만에 마일스와 깊은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인적은 사라지고, 거리는 깜깜했다. 수철은 밤거리를 한없이 걸었다. 이 느낌을 깨고 싶지 않았다.
* * *
다음 날 수철은 다소 부스스한 얼굴로 맨리의 녹음실에 나타났다. 악보를 옆에 끼고 컨트롤 룸에 들어섰다.
“오셨어요?”
엔지니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
“네,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마시고 시작할게요.”
수철은 꾸벅 인사하고 커피를 타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편안하게 목을 기대서 눈을 감고 잠시 명상에 잠겼다.
“음”
수철은 밤새 길을 걸으며 마일스가 시간과 공간이 달라서 만나지 못했던 음악가들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마일스가 모차르트를 만났었다면? 만약에 마일스가 리오넬 루케(Lionel Loueke)를 만났었다면? 만약에 마일스가 김덕수 아저씨를 만났었다면?
수철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음악가와 마일스를 조합해 봤다. 그들이 한 팀이 되어 연주하는 모습을 그려 봤다.
두 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상상은 계속됐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본다이 비치 백사장에 앉아 상상 속의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었다.
꿈속에서도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수철은 녹음실에 전화해서 스케줄을 잡았다.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급하게 악보를 챙겨서 녹음실로 달려갔다.
“음.”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수철은 두꺼운 부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드럼부터 시작할게요.”
수철은 버디 리치(Buddy Rich)를 생각하며 드럼 스틱을 잡았다.
탁탁, 타다닥!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드럼을 두드렸다.
“다음은 베이스 연주할게요.”
수철은 스탭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일렉베이스를 집어 들었다.
둥, 두웅― 두, 둥!
베이스 연주자는 마커스가 아닌 자코 파스토리우스(Jaco Pastorius)로 정했다. 자코는 마커스가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밝힌 베이시스트다. 정말 훌륭한 연주자인데,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다행히 앨범을 통해 그의 플레이를 들어 봤고, 연주가 기억에 남았었다.
수철은 이렇게 트럼펫을 제외한 다른 악기들을 하나하나씩 연주해 갔다. 상상을 현실로 이끌어 냈다. 같이 공존할 순 없지만 그래도 같이 연주하고 싶다는 욕망을 해소해갔다.
수철은 그들의 특성을 세세히 떠올리며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음악을 만들어 갔다.
수철의 악기가 쌓일수록 수철의 반대편에 앉아 트랙에 소리를 받는 엔지니어는 사색이 되어 갔다. 그는 녹음실 지붕에라도 올라가서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소리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리 지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충격에 충격을 더하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과연 오늘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 * *
“초대로 할게요.”
녹음이 끝나고 저장할 트랙의 제목을 묻는 엔지니어에게 수철은 그렇게 대답했다.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서, 전설의 뮤지션들을 초대해서 한자리에서 같이 연주했으니까.
좀 더 정확한 제목을 정하자면 ‘빙의’가 될 것이다. 수철이 잠시나마 그들에게 잠시 빙의한 것과 같았다.
수철은 시디를 받아서 작게 메모했다.
for 마일스로 적었다가 to 마일스로 바꿨다.
친구를 위하여가 아닌 친구에게로. 시간은 떨어져 있지만 같이 연주하고 싶은 친구에게로. 그래서 트럼펫의 자리는 비워 뒀다.
* * *
‘이걸 어떻게……!’
트랙을 지우려고 마우스를 잡은 엔지니어의 손이 떨렸다.
수철이 시디를 건네받고 나자 녹음한 걸 지워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소장용으로 한 장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옅은 조명 아래에 엔지니어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 * *
수철은 마일스와 이틀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즐거운 힐링의 시간이었다. 녹음한 시디를 듣는 수철의 미소가 밝게 빛났다.
며칠 후,
저벅저벅.
그들이 나타났다. 악기를 메고 걸어오는 그들의 모습 뒤로 엄청난 아우라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