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61화 (161/239)

#161화. 괜히 최고가 아니다

그들이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스텝들은 마치 스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멈춰 서 있었다. 다른 방에서 작업하던 사람들까지 몰려나와 최정상 뮤지션들의 등장을 구경했다.

‘와―!’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져서 바라봤다. 그들은 마치 전장을 휩쓸려고 등장하는 어벤저스 같았다. 악기를 메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영웅들 같았다. 오늘 수철에겐 그들이 영웅이다. 적어도 이번 앨범에선 악기 상태나 연주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하이, 수철.”

“어서 오세요.”

그들은 수철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수철도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수철은 잠시 헤어졌던 전우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날 공연이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묶어 놓았다.

“수철, 무슨 곡부터 시작할까요?”

테이블에 모여 앉자 윌리엄이 대표로 물었다.

“곡 순서는 편하게 하셔도 돼요. 대신 아직 락 드러머가 안 안 왔으니 락 음악만 빼고요.”“그럼 레인부터 할까요?”“네, 그렇게 하세요.

커피를 마시며 곡의 순서와 진행을 잠시 상의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피를 다 마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작할까요?”

“네.”

각자의 악기를 꺼내 튜닝을 하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 * *

원 트립플, 투 트립플, 쓰리 트립플, 포!

페드로가 박자를 주자 연주자들이 각자의 악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역시.’

녹음은 수철의 예상대로 순탄하게 진행됐다.

이렇게 편한 녹음은 처음이었다. 너무 편해서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수철은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화음을 감상만 하면 됐다.

“메트로놈 주세요, 다시 한번 갈게요.”

“네.”

요구사항은 연주자들과 엔지니어 사이에서만 오갔다. 이번에는 이렇게 저렇게 다시 연주해 보겠다며.

“방금 한 건 킵하고, 새롭게 한 번만 더 받아 주세요.”

엔지니어에게 계속 녹음 트랙을 요구했다. 확실히 최정상급 뮤지션들은 달랐다. 자기 손끝에서 나오는 연주는 자기가 책임졌다. 순식간에 음악의 맛을 극대화하는 연주들이 채워져 갔다.

“8번째 마디에서 끊어서 갈게요.”

게다가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프로듀서였다. 자기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떻게 하면 가장 빛이 날지 잘 알고 있었다.

‘아함!’

덕분에 수철은 긴장감이 맴도는 컨트롤 룸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하품하진 않았지만,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방향이 맞지 않으면 바로 얘기해 줘요.”

연주자들은 녹음을 시작하기 전에 수철에게 딱 한마디만 했었다. 수철이 생각하는 방향과 악기 녹음이 맞지 않으면 바로 지적해 달라고.

그 말에 수철은 처음엔 제법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 조금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방향이 틀릴 일이 없었고, 이들이 그런 말을 한 건 형식상일 뿐이었다.

수철은 엔지니어 옆자리에 마치 보조처럼 앉아 있었다. 연주자들과 엔지니어와의 대화를 지켜봤다. 자리를 비워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디렉터인지라 컨트롤 룸을 떠날 순 없었다.

* * *

헤이, 루카스!

헤이, 페드로!

루카스와 페드로.

두 드러머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연주자들이 녹음을 마치고 잠시 쉬러 부스 문을 열고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루카스가 페드로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둘은 서로를 격하게 반기며 포옹했다.

“헤이, 이언!”

“헤이, 루카스! 오랜만이야.”

루카스는 오랜만에 만난 이언과도 악수를 나눴다.

“루카스, 인사해. 여기는…….”

페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루카스를 소개했다.

* * *

원 투 쓰리 포!

잠시 후, 락 곡의 녹음이 시작됐다. 이번엔 페드로가 아니라 루카스가 스틱을 잡았다. 루카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템포를 세고 먼저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른 연주자들도 순서대로 음악에 합승했다.

불과 인사를 나눈 지 10분밖에 안 됐다. 그래도 예외는 없었다. 음악은 한 방에 다 맞아떨어졌다. 수철은 첫 소절만 듣고 알았다, 이번에도 참견할 게 없다는 것을.

“자, 바로 갈게요.”

“네.”

원, 투, 원 투 쓰리 포!

이들은 점심 전에 대부분의 곡을 끝내려고 쉬지 않고 녹음에 집중했다.

나이 탓인지 연륜 탓인지 이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들만의 녹음 루틴이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는 녹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연은 밤에 하지만 녹음은 다르다고 했다.

“오전 일찍 시작하는 게 좋아요. 에너지가 가득 차 있을 때 말이에요. 저녁에 녹음하는 건 연주를 억지로 짜내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면 나중에 다시 하게 돼요. 마음에 안 드니까요.”

오전에 전체 악기 녹음을 다 마치고, 점심을 먹고 각자 악기를 쌓아 가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물론 수철도 동의했다. 수철도 오전에 진행하는 게 훨씬 좋다. 그렇게 하자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먼저 알아서 얘기해 주는 게 고마웠다. 게다가 이들은 거기에 맞춰 시간까지 정확히 조절했다. 각자가 프로듀서이자 디렉터였다. 수철은 구경꾼이었다. 악기 녹음하는 시간은 그랬다.

* * *

“무슨 악기부터 하시겠어요?”“기타부터 할게요.”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각자의 악기를 별도로 음악 안에 쌓기 시작했다. 엔지니어의 물음에 이언이 먼저 기타를 들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타가 끝나자 바이올린, 관악기도 순서대로 들어가 음악에 다이내믹을 더했다.

“이번엔 다르게 한번 해 볼게요. 새로운 트랙으로 열어 주세요.”

이들은 모두 두세 가지의 다른 버전으로 각자의 악기를 연주했다. 수철이 믹싱할 때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게 선택의 폭을 넓혀 놓았다. 역시 최고들은 달랐다.

“와우― 빈센트!”

오늘은 특히나 빈센트가 대단한 연주력을 선보였다. 다른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빈센트의 바이올린 솔로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빛을 발했다. 덕분에 모든 장르에 입체감이 더해졌다.

발랄해지고, 강렬해지고, 화려해지고, 경쾌해지고.

모든 장르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락에서 바이올린이 이렇게까지 멋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새로운 트렌드로 락 밴드에 전자 바이올린이 등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훌륭한 연주 감사해요.”“수철이 디렉터를 잘한 덕분이죠.”“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요?”“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집중하게 만들잖아요. 간섭하지 않고, 존중해 주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그것이 최고의 디렉터죠.”

최고의 연주자는 멘트도 최고였다.

오늘 녹음은 서로가 서로에게 만족하는 시간이었다. 연주도 훌륭했지만, 분위기도 훌륭했다. 각자 맡은 파트에만 집중하면 끝이었다. 그다음엔 할 일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수철은 앞으로 할 음악도 이들과 계속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편해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이틀을 예상했던 6곡이 하루 만에 다 끝났다. 우르르 한 번에 들어가서 녹음하고 추가할 악기들은 엔지니어와 상의하고, 각자의 순서에 맞춰 후다닥 채워 넣었다.

“잠시만, 커피 한 잔 하시고 계세요.”

녹음이 끝나자 수철은 엔지니어와 반주를 만들 믹싱에 관해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사이 연주자들은 자신의 악기를 챙기고 커피를 마셨다.

“하하, 역시 수철은 대단해요.”

스튜디오 창가에 서서 맨리 비치를 바라보고 있는 마커스에게 윌리엄이 커피를 들고 다가갔다. 마커스가 고개를 돌렸다.

“왜요? 또 놀란 게 있으세요?”

마커스는 으레 윌리엄이 또 뭔가 감탄사를 내뱉을 거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윌리엄은 들고 있던 커피를 마커스에게 건네고 시선을 창밖의 맨리 비치에 뒀다.

“녹음할 때는 악기들이 각자 노는 거 같으면서 다 합쳐 놓으니까 결국은 선셋이 되었잖아요.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그 말에 마커스는 빙그레 웃었다. 창밖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커스는 같은 생각을 했다는 말은 생략하고 윌리엄의 눈을 봤다.

“우리에게 대단한 친구가 한 명 생긴 거 같아요.”

그 말에 윌리엄은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겸손한 친구죠, 겸손한 천재.”“겸손한 천재…….”

마커스는 창밖으로 보이는 수평선에 시선을 옮긴 채 윌리엄의 말을 곱씹었다. 윌리엄도 같이 창밖 멀리에 시선을 뒀다. 맨리 비치에서는 젊은이들이 여유롭게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 * *

녹음이 끝나자 수철은 약속한 대로 모두를 끌고 펍으로 갔다. 뉴캐슬에서 먼저 떠난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서다.

수철은 앤디의 도움으로 연주자들을 모두 친구의 가게로 안내했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테이블 두 개를 선점했다.

“음, 정말 맛있군요.”

수철이 주문한 맥주를 가져오자 한 모금씩 마신 사람들은 모두 맥주 맛에 만족했다. 나초에 치즈를 찍어 먹으며 분위기를 내기 시작했다.

“Cheers!”

“Cheers!”

악기 녹음을 모두 마친 개운함에 테이블 위에 맥주잔이 빠르게 쌓여 갔다. 수철도 사람들과 건배하며 속도를 맞췄다. 맥주 몇 잔 들이켜고 입을 뗐다.

“이제 편하게 불러 주세요. 제가 나이도 가장 어리고…….”

수철은 사람들에게 편하게 대해 달라고 했다. 한국처럼 나이 문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 존대를 받는 건 불편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겠다고 했다. 앞으로 계속 만남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한 번 더 할까요?”

“네! 건배!”

건배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에게 맥주는 술이 아닌 거 같았다. 끊임없이 건배하고, 끊임없이 들이켰다.

“하하!”

“하하!”

웃음소리도 더 커져 갔다. 가게는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차 시끌벅적했다.

“오랜만에 시드니에 왔는데 이번엔 내가 다른 곳으로 안내해 볼까요? 지금부터는 내가 한잔 살게요.”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마커스가 다른 곳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다.

“안 돼요, 마커스. 오늘은 제가 다 살 거예요.”

수철은 마커스가 사겠다는 말에 제동을 걸었다.

수철이 너무 빠르게 대꾸하자 모두의 시선이 수철을 향했다.

마커스는 늘 그렇듯 아저씨 미소로 바라봤다.

“수철은 여기서 산 거로 충분해. 부담 갖지 않아도 돼.”“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하기로 했었잖아요.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그 말에 마커스가 수철에게 몸을 기울였다.

“수철, 그거 알아?”

“……뭘요?”

“수철은 관광객이야.”

“관광객이요?”

“우리에게 비하면 말이야. 우린 여기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

“그러니까 우리도 한잔 사야지. 관광객에게 계속 얻어먹을 수는 없잖아?”

그 말에 모두 껄껄 웃었다.

“하하! 맞아요, 수철은 관광객이죠!”“하하, 그렇죠. 관광객에게 계속 술값을 내게 할 순 없죠.”

관광객이 아니라 앨범의 디렉터로 한잔 사는 건데. 게다가 지난번 뉴캐슬에서 먼저 떠난 미안함도 있어서 사려는 건데.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좋은 장소도 수철보다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지 않겠어요?”

마커스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했다.

“하하, 그렇죠. 우리가 수철보다 더 많이 알죠.”“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우리가 수철을 이기는 게 생겼네요? 하하!”

마커스의 말에 모두 껄껄대며 웃었다. 수철보다 앞서가는 게 생겼다며 모두 큰소리로 마커스의 말에 동조했다.

“…….”

수철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마커스의 말이 다 맞기 때문이다.

“자, 수철. 그렇게 꽁해 있지 말고 어서 가자고.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지?”

마커스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수철을 이끌었다. 수철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 대세를 따를 수밖에.

“미안해할 필요 없어. 여기서 수철이 샀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마커스는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가는 수철의 등을 두드렸다.

* * *

두 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도착한 곳은 센트럴 스테이션 근처의 클럽이었다.

“여기는 기차 다니는 소리가 커서 사람들이 음악 소리는 크게 신경을 안 써. 하하.”

기차 지나다니는 소리 때문에 클럽의 방음 문제가 줄어들었다는 얘기였다. 마커스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두둥! 딱, 따닥! 쿠구궁!

클럽에 다가가자 타악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뭐지?’

클럽 문을 열고 들어선 수철은 처음 보는 광경에 순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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