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절친이 되다.
클럽 안은 온통 흑인들만 가득했다. 내부도 온통 검은색이었고, 조명도 어두웠다. 서로 어떻게 얼굴을 분간할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흑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광경이 그랬다. 깜깜했다. 게다가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어서 분위기가 다소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수철은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해 보였다. 특히 마커스는 자신의 아지트에라도 온 듯이 행동이 가벼워지고, 표정이 밝아졌다. 다가오는 사내를 보고 손을 번쩍 들었다.
“헤이!”
“헤이! 마커스! 오랜만이야!”
둘은 서로를 반기며 손을 맞잡고 흑인 특유의 인사를 나눴다.
“이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네?”
다른 사람들은 클럽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수철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 않은 것 같았다. 클럽 안에 동양인은 수철과 이언이 전부였고, 백인도 윌리엄과 빈센트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윌리엄입니다.”
마커스의 소개로 모두 클럽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클럽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의 등장에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클럽 사장은 일행을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클럽에서는 흑인들이 돌아가며 레게와 아프리카 토속 음악을 하고 있었다. 타악기를 두드리며 자신들만의 음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연한다는 느낌보다는 리듬을 즐긴다는 느낌이었다. 기타도 멜로디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뜯으며 리듬을 맞추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보컬은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관객들은 다 알아듣는 눈치였다. 같이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탔다. 이곳은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수철에겐 이들의 공연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간결하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것만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들의 무대는 공연이라기보다 행위 예술처럼 보였다. 마치 그들의 신에게 뭔가를 말하는 것처럼.
신이시여―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소서.
수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자, 이제 같이 한잔 마셔 볼까?”
영업시간이 끝나고 손님들이 모두 사라지자 클럽 사장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테이블을 몇 개 붙여서 자리를 크게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파티를 즐겨 보자는 분위기였다.
“마커스, 네가 온다는 소식에 급하게 준비한 거야.”
사장은 주방에서 거대한 랍스터와 와인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를 본 마커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와―!”
탄성을 지르며 먹음직스럽게 세팅된 랍스터와 사장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사장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랍스터가 네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 맞지?”“물론이지! 이번 생에서는 바뀌지 않을 거야.”
마커스는 랍스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예전에…….”
알고 보니 사장은 한때 마커스의 광팬이었다. 모든 공연을 쫓아다닐 정도였다고 했다.
“이 클럽을 하게 된 것도 마커스 때문이에요. 공연은 안 하고 야생동물만 쫓아다니니까요. 하하.”
마커스가 태즈메이니아에 내려가서 야생동물에 빠져 있자 사장은 마커스의 공연을 볼 수가 없어서 심심해하다가 클럽을 오픈한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그럼 마커스가 유명 클럽을 탄생시킨 거군요?”“역시 마커스의 영향력은 대단하네요, 하하!”
다른 사람들도 사장의 너스레에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마커스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마커스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계속해서 즐겁고 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다 같이 사장이 가져온 랍스터에 와인을 즐겼다. 음식이 줄어들고, 와인 병이 비어 가자 사장이 마커스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마커스, 음식값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알지?”
그 말에 마커스가 씨익 웃었다.
“당연히 알지!”
잡고 있던 랍스터 다리를 내려놓고 손가락을 쪽 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슬슬 음식값을 계산해 볼까?”
말을 하고는 무대로 올라갔다. 그런데 베이스는 대신 스틱을 들고 드럼 앞에 앉았다.
두둥! 쿵쿵!
드럼 페달을 몇 번 밟고 탐을 몇 번 두드리더니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자, 랍스터 드신 분들은 모두 나오세요! 같이 계산해야죠.”
마커스가 웃으며 소리를 쳤다.
“오케이, 마커스.”
말뜻을 눈치챈 이언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마커스에게 내 베이스 실력을 검증받을 시간이 왔군요.”
무대에 올라가더니 일렉베이스를 집어 들고는 벨트를 몸에 걸쳤다. 그러자 윌리엄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럼 수철에게 피아노 좀 들려줘 볼까?”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무대로 올라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악기는 놔두고 다른 악기를 집어 들었다. 페드로만이 테이블에 앉은 채로 타악기인 젬베(djembe)를 무릎 사이에 끼우고 무대와 마주 앉았다. 이제 남은 악기는 색소폰을 포함한 관악기 몇 개와 기타, 그리고 처음 보는 아프리카 타악기 몇 개였다, 빈센트는 수철의 눈치를 보다가 얼른 타악기를 집어 들었다.
“헤이, 수철! 수철도 뭐 하나 해야지?”
마커스가 드럼에 앉아 스틱을 탁탁 부딪치며 소리를 쳤다.
“네? 저도요?”
수철은 멀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랍스터 안 먹었는데.”
중얼거리며 무대로 다가갔다.
“전 어떤 악기를 할까요?”“남은 것 중에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어. 대충 분위기만 맞추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베이스를 잡는 건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커스의 앞에서 마일스의 앨범에서 들었던 베이스 테크닉을 흉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다.
관악기는 불기 힘들고.
어쩔 수 없이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서 의자에 발을 걸치고 앉았다.
“그럼 A플랫 블루스로 먼저 손 좀 풀어 볼까요?”
마커스의 한마디에 바로 연주가 시작됐다. 드럼과 베이스와 피아노의 리듬이 짝짝 맞아떨어졌다. 다들 자기 악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실력을 보였다. 술을 한 잔씩 마신 탓인지 연주는 오히려 더 부드럽게 흘러갔다.
수철도 같이 32마디의 흐름을 맞췄다.
32마디가 끝나자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돌아가며 16마디씩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
마커스는 아직도 에너지가 넘치는지 과격하게 드럼을 두드렸다. 빠르게 스틱을 움직이며 드럼을 두드리는 모습이 진짜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모습 같았다. 이언도 기다렸다는 듯이 숨겨 놓았던 베이스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슬랩을 치고 길게 무빙을 하며 마커스의 베이스를 흉내 냈다. 마커스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이언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어느 악기가 메인 악기인지 모를 정도로 현란한 연주를 뽐냈다.
그리고 수철의 타임.
수철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난 삼아 시작한 연주는 수철이 너무 내달리는 탓에 정신이 바짝 들어 버렸다. 뉴캐슬의 마지막 연주가 떠오를 정도였다. 수철이 너무 앞서 나가니까 다들 정신이 혼미해졌다. 수철의 연주가 고조되자 따라갈 엄두가 안 났다.
어느 순간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악기를 멈추고 멍하니 수철을 바라봤다.
“하하, 수철. 어떻게 기타까지!”
마커스는 수철을 보며 실소를 내뱉었다. 그 옆의 이언은 넋이 나가서 바라봤다.
“수철, 너 정말…….”
* * *
“조심히 가세요.”
“연락해.”
“모두 잘 가세요.”
새벽이 훌쩍 지나서야 사람들은 헤어졌다. 윌리엄은 약속이 있다며 친구의 집으로 갔고, 빈센트와 페드로는 이언의 집으로 갔다. 마커스는 수철이 집으로 초대하자 좋다며 따라왔다.
“여기가 수철이 음악을 완성한 곳이군.”
마커스는 수철이 작업하는 방을 휙 한번 둘러보고는 발코니로 나왔다.
둘은 새벽 별이 떠 있는 본다이 비치를 바라보며 맥주병을 부딪쳤다. 마커스는 음악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과 기억에 남는 공연을 얘기하며 음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했다. 수철은 듣기만 했다. 듣기만 해도 마커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오랜 연륜과 수많은 공연 탓에 이야기들은 모두 다채로웠다. 간혹 마커스가 수철에게 질문하면 수철은 솔직하게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둘은 하룻밤 새에 급격히 친해졌다.
“벌써 해가 뜨려고 하네. 하하.”“하하. 그러네요. 피곤하시죠? 인제 그만 주무시겠어요?”“그래, 그래야겠어.”
둘은 여명이 밝아 오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수철은 자기의 방을 양보하고, 거실의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피로한 탓에 금세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으으윽.
한참을 자고 눈을 떴을 땐 벌써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오후를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수철이 기지개를 켜는데, 마커스가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수철은 물을 얼른 물을 따라서 한 잔 건넸다.
“속 괜찮으세요? 뭐 좀 먹으러 갈까요?”
어제 과음을 한 탓에 뭔가 속을 풀 음식이 필요했다.
“응, 좋지.”
마커스는 눈꺼풀이 부어서 눈을 잘 뜨지 못한 채 끄덕였다.
* * *
수철은 지나다니다 눈여겨 봐둔 한식집으로 마커스를 안내했다. 설렁탕집이었다.
“한식 드셔 본 적 있으세요?”“아니, 없어. 건강한 음식이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먹어 보는 건 처음이야.”“그럼 한번 드셔 보세요. 만족하실 거에요.”
마커스는 수철이 알려주는 방식대로 설렁탕을 먹기 시작했다. 국에 밥을 말고 수철이 잘라 놓은 김치를 수저에 얹어서 먹었다.
한 입 먹어 본 마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세웠다. 그러다 김치만 몇 개 집어먹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혀를 내밀었다. 맵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금세 적응하고 김치를 수저 위에 잔뜩 올려서 한 그릇 뚝딱 먹어 치웠다.
“한 그릇 더 드실래요?”
수철은 마커스가 국물을 다 들이켜고도 아쉬운 눈치길래 물었다. 마커스는 바로 끄덕였다.
* * *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본다이로 비치로 돌아온 둘은 파라솔 아래서 차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하하, 벌써 석양이 지다니.”
마커스는 유난히 짧은 하루를 아쉬워하며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봤다. 수철은 그 옆모습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마커스, 잠깐 집으로 들어갈까요? 들려주고 싶은 게 있어요.”
수철이 묻자 마커스는 시간부터 확인했다.
“오래는 못 있을 거 같은데?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잠깐이면 돼요.”
* * *
수철은 집으로 돌아와 며칠 전 녹음했던 시디를 꺼냈다.
“재미난 상상을 하다가 만들어 본 거예요. 저 혼자 소장하려고 만든 건데, 마커스에게는 꼭 들려주고 싶어요.”
시디를 시디플레이어에 집어넣고 헤드폰을 꽂아서 마커스에게 내밀었다. 마커스가 헤드폰을 쓰자 수철은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잠시 멈춰 봐!”
마커스는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헤드폰을 벗었다. 수철을 빤히 바라봤다.
“이거, 설마 혼자서 다 연주한 거야……?”
“네, 헤헤,”
수철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수철이 무안할 정도였다.
“음…….”
마커스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헤드폰을 썼다.
“다시 들어 볼게.”
“네.”
수철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마커스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음악을 음미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한 번 더 들어 볼게.”
음악이 끝나자마자 한 번 더 들었다. 그렇게 두 번을 듣고서야 마커스는 헤드폰을 벗었다.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창가로 가서 잠시 밖을 내다보고는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았다.
탁!
빙그레 웃다가 느닷없이 느닷없이 수철의 등을 탁 쳤다.
손바닥이 커서 등이 아플 정도였다. 수철이 쳐다보자 마커스는 눈에 힘을 줬다.
“마일스를 생각하며 만든 거군. 빈 공간은 마일스를 위해 남겨 놓은 거고.”
역시 마커스였다. 수철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네, 맞아요.”
수철이 끄덕이자 마일스는 계속해서 연주자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베이스는 자코를 선택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연주할 수 있는 거지?”
흉내 낸다고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었다.
“앨범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요. 마커스가 자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음.”
마커스는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수철을 바라봤다.
“드럼은 버디 리치(Buddy Rich)고, 기타는 리오넬 루케(Lionel Loueke)인데, 피아노랑 이 생소한 드럼 연주자는 잘 모르겠어. 피아노는 어딘가 익숙한데 알 듯 모를 듯하네. 클래식 같은데?”“피아노는 모차르트를 흉내 내 봤어요. 마일스 아저씨와 모차르트가 같이 연주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들어서요.”“시간을 뛰어넘은 거네?”
“네.”
“이 특이한 드럼 소리는?”“장고라는 악기인데, 한국 전통악기예요. 김덕수라는 유명한 연주자분을 흉내 내 본 거예요.”
마커스는 그 후로도 수철의 음악을 몇 번 더 반복해서 들었다. 어디선가 마일스의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다음엔 자코가 아닌 자신을 연주자로 해서 한 번 더 녹음해 보라고 농담을 던졌다.
“어떻게 사람들의 특색을 이렇게 간결하게 뽑아 낼 수가 있지? 그만 놀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하하”
수철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커스는 자신의 앨범 작업에 수철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연주자뿐만이 아니라 편곡자로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수철은 흔쾌히 허락했다. 마커스의 앨범엔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둘은 이번 앨범을 통해 절친이 되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제 그만 가 봐야겠어.”
시간이 되자 마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철은 바닷가까지 따라 나와서 마커스를 배웅했다.
“좋은 시간이었어. 계속 연락하고 또 보자고.”“네, 마커스 조심히 가세요. 다시 만나길 기대할게요.”
“빠이.”
“빠이.”
마커스는 수철과 포옹하고 돌아섰다.
수철은 어둠 속으로 마커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