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65화 (165/239)

#165화. 굿 뉴스

필립 윤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반쯤 감겨 있던 수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와! 감독님! 반가워요! 전 잘 지냈어요, 감독님도 잘 지내셨어요?”

수철은 얼른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내서 한 모금 들이켰다.

―네, 잘 지냈어요. 자주 연락했어야 하는데, 너무 정신이 없었네요. 그래도 이렇게 수철 씨 목소리 들으니까 정말 반가워요!

필립 윤의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느껴졌다. 옆에 수철이 있었으면 덥석 껴안았을 거 같았다. 그건 수철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감독님 목소리 들어서 너무 반가워요.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건 저도 죄송하고요.”―하하, 우리 둘 다 바쁜 사람이잖아요.

필립 윤은 서로 소원했던 사이를 시원한 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기쁜 소식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수철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에 바로 직감했다. 칸 영화제의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일 것이 분명했다.

수철은 이미 필립 윤 감독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 수많은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그중에서도 선댄스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 덕분에 한국 언론에서도 쾌재라며 대서특필을 했다고 들었다.

―‘백자의 눈물’이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공식적으로 초청됐습니다.

역시 수철의 예상이 맞았다. 기쁜 소식이었다. 박 대표에게 듣는 것보다 필립 윤에게 직접 들으니 더 기뻤다.

“축하해요, 감독님. 정말 기쁜 소식이에요.”

아직 수상하지 않았지만, 필립 윤 감독이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칸은 그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영화제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부터 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걸 잘 아는 수철은 필립 윤이 뜻을 이룬 것처럼 느껴졌다.

―네, 감사해요. 같이 작업한 수철 씨에게 축하를 받으니까 더 기분이 좋네요. 개인적으로 예술성과 상업성을 두루 갖춘 작품이라고 인정받은 게 가장 기분이 좋아요.

자기 자랑을 잘 하지 않는 필립 윤은 기분이 좋은지 자랑을 더 얹었다. 물론 수철도 듣기 좋은 말이었다.

‘상업성을 인정받았다니.’

지금까지 필립 윤 감독의 작품은 상업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들었었다. 항상 작품성에만 집중하다 보니 상업성엔 무게를 실지 못하는 감독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백자의 눈물이 예술성과 상업성을 두루 갖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니. 그것도 칸 영화제에서.

필립 윤 감독이 자랑할 만했다. 쾌재를 부를 만했다. 상업성이라는 단어는 필립 윤 감독에게 트라우마 같은 거였었다.

수철은 프랑스 심사 위원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고유한 역사적인 정서.

그걸 담아낸 작품을 상업성이 있다고 봐 줬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 박 대표의 말대로 프랑스 예술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보다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자의 눈물을 주의 깊게 봐 줬으니.

“백자의 눈물을 많은 사람이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저까지 뿌듯해지네요.”

상업성을 인정받았으면 더 많은 곳에 작품이 소개될 수 있다. 수철은 예산이 부족해서 고생하던 필립 윤의 지난 모습이 떠올랐다. 돈이 없어서 후반 작업을 멈춰야 했던 시기가 생각났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칸의 무대에 서게 된 필립 윤을 생각하면 한편으론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하하, 그렇게 되길 바라야죠.

“꼭 그렇게 되실 거예요.”―네. 저도 기대하고는 있어요. 하하.

필립 윤은 여유로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이었다.

―제 얘기는 이쯤하고. 이제 수철 씨 얘기를 해야죠. 제가 전화한 건 수철 씨에게 기쁜 소식이 있어서예요.

“……저에게요?”

―네, 수철 씨가 영화음악상 후보에 올랐거든요. 작곡자로서요.

“네? 제가요?”

―네, 용수철 작곡가 선생님이요. 백자의 눈물이 가장 뛰어난 영화음악이 사용된 작품 중에 하나라는 얘기인 거죠. 축하해요, 수철 씨.

“……감사해요, 감독님. 기쁜 소식 맞네요.”

수철은 필립 윤의 축하에 감사를 표했지만 속으로는 갸웃했다. 칸 영화제에는 음악상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화제의 중심에 섰으면 영화음악도 관심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칸 영화제에선 영화음악에 대한 섹션이 없다고 들었다. 수철이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필립 윤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랑 음악 감독은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어요. 다른 영화제에서도 계속해서 음악에 관한 얘기가 나왔었거든요. 수철 씨 소개해 달라는 감독들도 많았고요. 가끔은 영화보다 음악이 더 이슈가 됐다니까요? 하하!

필립 윤은 수철이 만든 음악이 후보에 오른 건 당연하다며 껄껄 웃었다.

―영화음악상이 없는 영화제들이라서 그냥 넘어갔지만, 아니었으면 수철 씨는 저희랑 계속 같이 다닐 뻔했어요. 하하.

기분이 좋은지 연신 껄껄댔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감독님, 제가 듣기론 칸 영화제도 영화음악상이 없다고 들었는데요?”―네, 맞아요. 공식적으로는 그래요. 하지만 공식적인 섹션에만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 뿐, 다른 건 다 똑같아요.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하고, 수상도 같은 장소에서 해요. 물론 다음 날이지만요.

“아, 그렇군요.”

―네, 레드카펫만 밟지 않는 거죠.

필립 윤은 수철이 실망했다고 느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음악상이 공식적인 섹션에 빠져 있다고 해서 전통과 권위가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른 상들만큼이나 관객과 관계자의 관심이 높은 상이에요. 그리고 프랑스에선 거대한 영화음악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칸 영화제를 통해서 작곡가들에게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요.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자의 눈물을 작업하면서 찾아봤었던 영화음악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칸에서 큰 이슈를 만들었던 음악들이 많았다.

―아, 그리고 정확한 명칭은 칸 사운드트랙상이에요. 영화음악 협회와 비평가 협회 그리고 음악산업 관련 단체에서 주는 상이에요. 그들이 공정하게 투표를 해서 수상자를 선정하는 거죠.

“네, 잘 알겠어요. 자세히 설명해 줘서 감사해요.”

필립 윤은 수철이 궁금하지 않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영화제를 방문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어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는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늘어놨다. 오랜만에 수철과 통화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수철도 필립 윤의 자랑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한 거예요. 이 기쁜 소식을 수철 씨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

필립 윤은 잔뜩 신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그의 언어에서 거짓 없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어때요, 수철 씨? 올 수 있겠어요?

“네? 어딜요?”

느닷없는 물음에 수철은 멈칫했다.

―어디긴요? 칸이지요.

“아, 칸이요……?”

수철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갑자기 물어봐서 그런 것도 있지만 친구들 만나러 영국을 한번 가야 하니까 그 참에 프랑스를 방문해서 필립 윤을 만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미리 박 대표와 상의를 해야 한다.

“감독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거예요?”―프랑스요.

“벌써요?”

―네, 아직 2주 남았지만, 겸사겸사 만날 사람도 있고 해서 일찍 왔어요.

“칸 영화제 시작이 2주 남았다고요?”―네, 2주 후부터 수상을 놓고 10일간의 레이스가 펼쳐져요. 그래서 저랑 음악 감독은 어제 도착했어요.

시간이 촉박하다. 필립 윤은 2주면 수철이 준비하기에 넉넉할 거라 생각하고 말을 꺼냈겠지만, 수철은 앨범을 끝낸 이후에도 계획과 일정이 있었다. 호주 근처의 피지,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를 여행하며 원주민들의 전통 음악을 접해 볼 생각이었다.

수철이 대답을 망설이자 필립 윤이 눈치를 채고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급작스럽게 물었죠?

“네, 좀…….”

―미안해요, 사실 에피소드가 좀 있었어요.

에피소드?

―행사가 나누어져 있다 보니까 진행이 매끄럽지 않은 점이 있었어요. 거기서는 당연히 작곡가자 같이 오는 거로 알고 있더라고요. 음악 감독을 백자의 눈물 주제곡을 만든 작곡가로 착각하고 있었어요.

“아…….”

―그래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수상 후보가 됐다는 소식은 일찍 알았는데, 음악상 후보가 됐다는 것은 오늘에야 안 거예요. 서로 오류가 있었어요. 미리 통보하지 않은 저의 실수도 있고, 확인하지 않은 주최 측의 실수도 있고요. 어찌 됐건 수철 씨에게 미안해요.

필립 윤의 감정이 확 느껴졌다.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해 온 것이었다.

―수철 씨가 불편하면 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리 수상 같은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요. 음악 감독이 하면 돼요.

필립 윤은 부담 갖지 말라고 하면서도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아니에요, 감독님. 참여하는 방향으로 진행해 볼게요.”―진짜요? 가능하겠어요?

“정확한 날짜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지만 가능은 할 거 같아요. 저도 영국에 갈 계획이 있었고, 영화제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해요. 그곳에서 감독님을 만나면 더 신나지 않을까요?”―하하, 당연하죠! 너무너무 신나는 일이죠. 하하, 고마워요.

“제가 고맙죠.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주셨는데요.”―하하, 역시 수철 씨는 여전히 말을 이쁘게 하는군요.

“…….”

―그럼 언제쯤 시간이 가능할까요? 미리 숙소와 스케줄을 준비해 놓을게요.

“아니에요, 감독님. 그건 회사랑 먼저 상의해 봐야 해요.”―회사요? 회사가 생겼어요?

“네.”

―아, 그렇군요. 그사이에 소속사가 생겼군요? 축하해요.

필립 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수철에게 회사가 생겼다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네, 감사해요. 그런데 최근에 생긴 건 아니에요. 예전부터 절 돌봐 주시던 분이세요. 감독님 만나기 전부터요.”―아하, 네, 기억나요. 음악을 전공하셨다던.

“네, 맞아요. 저에겐 스승 같은 분이세요. 감독님의 작품에도 관심이 많으시고요.”―아이구, 그렇군요? 언제 한번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하하.

필립 윤은 금세 기분이 바뀌어서 웃음을 보였다. 수철은 잠시 필립 윤과 박 대표가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 결정되면 전화 주세요. 기다릴게요.

“네,”

스케줄을 확정해서 다시 통화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8, 2, 1, 0…….

수철은 박 대표에게 전화하려고 버튼을 누르다 멈췄다. 그보다 먼저 할 일이 떠올랐다. 빨리 믹싱과 마스터링을 마치고 완성본을 보내야 한다. 통화는 그다음에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 * *

“정말 이렇게 가도 괜찮은 건가요?”

엔지니어는 믹싱하면서 당황했다. 그의 얼굴엔 며칠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수철이 예상했던 상황이다.

“네, 다 의도된 것입니다.”

엔지니어의 계속되는 질문에 수철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엔지니어와 달리 수철은 해맑은 얼굴이었다.

“톤은 신경 쓰지 마시고 전체 밸런스만 잡아주세요. 리버브(Reverberation, 목욕탕의 울림 같은 효과)도 많이 주시지 마시고요.”

엔지니어는 불안함에 전체적으로 보컬에 리버브를 더 넣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거친 부분이 많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수철은 이 정도가 엔지니어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수철은 그것보다 조금 더 야생적인 사운드를 원했다.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음…….”

엔지니어와 간극이 생겼다. 그는 수용하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수철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수철은 스튜디오에 돈을 내는 손님이다. 수철의 의도를 따르는 건 서비스업을 하는 엔지니어로서는 당연히 할 일이다. 물론 그렇게 따지고 들 관계는 아니지만.

* * *

“어서 오세요, 또 뵙네요.”

“네, 안녕하세요.”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는 수철을 환영했다. 쉬지 않고 앨범을 계속 내니 최고의 고객이다.

“일찍 오셨네요?”

“네.”

엔지니어도 마스터링 스튜디오에 와 있었다. 수철이 도착하기도 전에 와서 마스터링 엔지니어랑 상의하고 있었다. 끝까지 자신이 녹음한 소리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전문가다웠다. 그런 덕분에 음악은 마스터링을 거치며 사람들이 들을 만하게 포장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하하.”

엔지니어도 그제야 한숨 돌리고 웃음을 보였다.

이로써 ‘SUNSET’의 제작 과정은 모두 끝이 났다.

후읍.

밖으로 나온 수철은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봤다.

이번 앨범은 수철에게 많은 의미를 가져다줬다. 다양한 경험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선셋으로 시작해서 선셋으로 끝난 앨범.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추억할 앨범이다.

이제 이 앨범에 정성을 쏟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사할 일만 남겨 놨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목소리와 연주를 듣고 즐거워한다는 소식.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한 시기다.

* * *

―내가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한 건가?

“아니에요, 쌤. 잠시만요.”

수철은 얼른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정신을 차렸다.

“제가 먼저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어제 마스터링이 끝나고 엔지니어와 저녁을 먹느라 시간이 늦어서 전화를 못 했었다.

―누가 먼저 연락하든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예상했겠지만 이번 앨범은 ECM에서 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 그래서 영향력 있는 몇 군데를 놓고 얘기 중이야. 그중에서 최근 실적이 좋고,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데랑 계약해야지.

이번 앨범은 색깔이 달라서 ECM이 아닌 다른 곳이랑 유통 계약을 진행하겠다는 얘기다.

―이번 기회에 미국 시장도 노려봐야지.

“미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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