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레베카
수철은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긴 시간을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게 이제 실감이 났다. 잠시 후 움직이기 시작하는 비행기. 수철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작은 유리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활주로가 보였다. 순간 비행기는 동체를 들고 하늘로 향했다. 급하게 상승했다. 순식간에 도시가 작게 보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휴.
이제 꼬박 하루를 비행기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그래도 다행히 지난번보다는 훨씬 몸이 편하다. 이번엔 일등석이다. 박 대표가 한사코 주장해서 일등석에 타게 됐다. 잠시 창밖의 하늘을 보던 수철은 피식 웃음이 났다.
―호주 공기가 좋은 건가?
박 대표는 그렇게 물었었다. 수철이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피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갸웃하면서. 박 대표는 수철의 급작스런 변화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설 때가 됐지. 더 이상 피할 이유도 없고.
수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설 때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피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어떡할래? 이참에 내가 스케줄을 좀 잡아볼까?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문의와 요청이 쇄도해서 거절하기가 난감했었거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연예인도 아닌데.”―아, 오해는 하지 마. 중요한 스케줄만 잡겠다는 거야. 자잘한 건 다 빼고.
“중요하다면, 어떤?”―우선 ECM 방문해서 해리는 만나야 할 거 같고, BBC 인터뷰 정도 하나 하는 거지. 멤버들은 다 출연했는데 네가 빠지니까 그쪽에서 프로그램 짜는데 많이 부족했다고 하더라고. 해리도 그런 얘기를 하고.
“아…….”
―멤버들 에이전시에서도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하니까, 이번에 그 부분을 채워 주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정도는 네가 해야 할 몫이기도 하고. 이건 회사가 아니라 음악 선배로서 얘기하는 거야. 작곡하고 프로듀싱했으면 멤버들이 활동하는 데에도 도움을 줘야지.
“네, 알겠어요. 그럼 쌤이 알아서 일정을 잡아 주세요.”―그래, 영국 일정은 ECM과 BBC만 잡을게. 그리고 칸 영화제는 지금으로선 예측이 불가능해. 어떻게 일이 벌어질지 말이야. 그러니까 우선은 필립 감독과 상의하고, 추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조율하도록 하자.
“네, 알았어요.”
―그리고 네 일정을 도와줄 사람을 한 명 붙일 거야. 매니저라고 생각하면 돼.
“매니저요?”
―그래, 이번 일정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야.
수철은 회사에 소속되고 나서 박 대표의 새로운 면을 많이 보게 됐다. 영어가 능통해서 해외의 관계 업체랑 자유롭게 소통했고, 그들과 함께 일을 만들어 가는 비즈니스적인 면모도 많이 보여 줬다. 금별 기획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회사 대표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대신 예전처럼 음악적으로 소통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수철은 그것이 아쉬웠다. 직원을 뽑았다고는 하지만 수철이 보기엔 박 대표가 혼자서 일을 다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박 대표는 직접 일을 주도하는 성격이니까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다.
박 대표가 바빠진 건 수철의 앨범이 잘나가는 이유가 컸다. 처음엔 박 대표의 회사가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예전의 음악 선배 같은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달라지겠지.’
나중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박 대표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저기요, 와인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수철은 좁은 통로를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을 마시고 준비한 안대를 착용하고 눈을 감았다. 장거리 비행에선 잠을 많이 자는 게 지루함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으으윽.
얼마나 잤을까?
몇 번을 자다 깨다 하고, 몇 번의 기내식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던 수철은 눈을 뜨며 기지개를 크게 켰다. 어느새 비행기는 런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으로 약 40분 후에 목적지인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현재 런던의 날씨는 흐리며, 온도는…….]
안내 멘트가 나오고 몇십 분 후, 비행기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두 번째 비행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서 그런지, 지난번보다는 덜 힘들었다. 일등석이 편한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런던의 하늘이 나타나고, 도시가 보이고, 드디어 비행기는 히드로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역시 이번에도 땅을 밟는 순간 땅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다. 한동안 장거리 비행은 못 할 거 같았다.
‘영국 맞네.’
호주와 다른 색의 하늘을 보니 영국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 * *
“안녕하세요, 수철 씨! 드디어 만나는군요.”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수철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사람이 보였다. 브라이언 김이었다. 박 대표의 요청으로 나온 것이었다. 수철이 다가가니 한눈에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수철도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동안 도움을 많이 주셨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감사드려요.”
수철은 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브라이언은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젊고, 키가 컸다. 수철이 생각했던 법정에서 큰소리를 내며 변호하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농구 선수 같은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수철. 반갑습니다. 저는 레베카입니다.”
브라이언과 인사를 하고 나니 옆에 서 있던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오피스룩을 입은 수철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다. 단아한 모습의 단발머리에 보조개가 쏙 들어간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박 대표가 얘기한 이번 유럽 일정에서 수철을 케어할 매니저였다.
“안녕하세요, 용수철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철은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백인이었다. 한눈에 봐도 한국계 혼혈임을 알 수 있었다. 한국어 발음도 유창했다.
“가실까요?”
* * *
호텔은 역시나 엘진 그룹 계열의 호텔이었다. 시드니에 있는 것과 같은 호텔이지만 왠지 건물이 시드니보다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흐릿한 날씨 탓인지, 오래된 건물이 많은 영국의 분위기 탓인지, 호텔의 첫인상이 그랬다.
수철은 도착해서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왔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하며 브라이언과 레베카와 얘기를 나눴다.
“궁금하신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저는 별로…….”
브라이언은 그간 있었던 진행 상황을 간략하게 수철에게 설명했다. 주로 계약 관계와 법적인 얘기들이었다. 수철은 박 대표가 다 알아서 하고 있기에 궁금하지 않았지만, 예의상 브라이언의 얘기를 귀 기울여서 들었다. 브라이언도 어려운 이야기까지 세세하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꼭 알아야 하는, 굵직굵직한 핵심 부분만 간단하게 얘기했다. 변호사여서 그런지 요약을 잘했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계약과 관련해서는 머리 아파 하던 수철의 귀에도 쏙쏙 잘 들어왔다.
“매주 박 대표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의문이 생기면 박 대표님께 여쭈시면 될 겁니다.”“네, 그렇게 할게요.”
브라이언이 오늘 찾아온 용건을 마무리하자, 셋은 잠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용건만 얘기하고 바로 일어나기가 머쓱해서였다. 수철은 브라이언과 레베카가 서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수철은 이번 기회를 통해 브라이언 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너무 큰 도움을 받았어요. 정말 감사드려요.”“하하, 감사는요. 제 일을 한 것뿐인데요. 오히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수수료에 보너스까지.”
수철은 박 대표가 브라이언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쌤은 참 대단하셔.
박 대표의 비즈니스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다룰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사람한테 팍팍 쓰면서 의욕을 만들어 주는 걸 보면.
“저는 영준 씨에게도 감사해요. 수철 씨를 만나게 해주셨으니까요.”
브라이언의 말은 두 가지 의미였다. 영준이 형이 좋은 성품의 사람이라는 것과 수철의 앨범이 크게 흥행해서 일할 맛이 난다는. 그래서 영준이 형이 더 고맙다는.
“네, 저도 영준이 형에게 늘 감사해요. 저에겐 항상 든든한 형이죠.”“저도 그래요. 벌써 인연이 10년이나 됐거든요.”
와, 10년.
정말 오래된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나러 가실 거죠?”
영준이 형을 만날 거냐는 얘기였다.
“네, 저녁때 만나기로 했어요. 멤버들 모두요.”“그렇군요. 그럼 만나서 좋은 시간 보내시고, 전 이만 일어날게요. 다른 일이 있고, 레베카와도 이야기를 나누셔야 하니까요.”
브라이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조만간 또 뵐게요.”“네, 안녕히 가세요.”
브라이언은 수철과 악수하고 레베카와 눈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이제 제 차례군요.”
브라이언이 떠나자 침묵을 지키던 레베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의자를 옮겨서 수철과 마주 앉았다.
수철은 이제야 레베카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오똑한 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외모였다.
“기다리게 해서 괜히 미안하네요.”“호호,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이게 제일이거든요. 수철 씨 기다리고, 케어하는 거요.”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자신이 매니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시켰다. 레베카는 매니저라기보다는 에이전트에 가까웠다. 영국에서는 경험 많은 에이전트로, 한국으로 따지면 실장급이었다.
“그런데 발음이 다르시네요?”
수철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대화 중 툭툭 튀어나오는 독특한 발음과 억양이 영국 사람이 아닌 거 같았다.
“아, 저는 뉴욕에서 왔어요. 런던에 온 지는 이제 1년 되었고요.”
“그러시군요.”
“네, 참고로 말씀드리면 어머니가 한국 분이시고, 아버지는 미국 사람이세요. 제가 혼혈이라는 뜻이죠. 만날 때마다 사람들이 궁금해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녀는 다시 보조개를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친근함이 묻어났다. 아직 나이가 어린데도 노련한 에이전트의 느낌이 물씬 났다.
“오늘 어떻게 이 자리에 오시게 된 거예요? 제 말은 이번 일정 동안 저를 도와주실 거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박 대표님과 연결이 됐는지 궁금해서요.”“저는 금별기획 런던지사 소속이에요. 작년까지는 뉴욕지사에 있었고요. 이번 수철 씨 유럽 일정 동안 파견 나온 셈이죠.”
“아, 그렇군요.”
이 부분까지는 듣지 못했었다. 유능한 에이전트가 수행해서 서포트할 거라고만 들었었다.
“한동안 우리가 같이 다니게 될 텐데, 친해질 겸 제 소개를 좀 드릴까요?”
“네? 네.”
수철은 적극적인 레베카의 모습에 잠시 멈칫하며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본 레베카는 다시 미소를 보였다.
“저는 수철 씨에 대해서 많이 아는데, 수철 씨는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게 공평하지 않은 거 같아서요. 혹시 불편하세요?”
그는 수철의 표정을 살피며 부드럽게 물었다. 수철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레베카 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말해 주세요.”
수철이 급하게 대답하자 레배카는 잠시 보조개를 보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블루노트 레코드에서…….”
그녀의 경력은 꽤 화려했다. 블루노트 레코드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고, 초창기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의 에이전트를 한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는 자넷 잭슨과 같이 일을 했었다고 했다. 불과 수철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데, 경력이 화려했다.
“와, 대단하신 분이네요?”
수철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자 레베카는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수철 씨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까 부끄럽네요. 수철 씨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잖아요.”
레베카는 두 손을 들어 수철을 가리켰다. 수철은 레베카가 예절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을 잘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대단한 사람들의 에이전트를 해서인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까지 있었다.
“자넷은 에이전트를 한 건 아니고, 공연 일부분을 담당했었어요. 정확히는 공연과 관련된 광고 스폰을 관리하는 일이었죠. 아시겠지만 자넷이 입는 의상이나 액세서리, 슈즈가 모두 유명 브랜드잖아요? 유명한 가수들은 대부분 그래요. 그래서 그들을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고 부르죠. 특히 자넷은 몸동작이 많아서 화려해 보이고, 눈에 띄어 스폰이 많이 붙었어요.”
레베카는 자넷 잭슨을 편하게 자넷이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친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까…….”
그녀의 경력을 눈여겨본 금별에서 높은 연봉의 스카우트를 제시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흔쾌히 수락을 했고.
미국의 뉴욕지사에서 일하다가 1년 전에 런던에 온 것이었다.
“혹시 나이를 여쭤봐도 될까요?”
수철은 그녀의 나이가 궁금했다. 자신의 또래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은 경력을 갖고 있어서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물었다.
“25살이에요. 한국 나이로는……. 몇 살 더 많겠죠?”
나이를 더 올려서 말하는 게 불편했는지 적당히 웃어넘겼다. 웃는 그녀의 볼에 또다시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그럼 일정을 말씀드릴게요.”
레베카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수철이 영국에서 소화해야 할 일정을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