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달라진 사람들
“내일은 하루 쉬시고, 3일 차에 ECM을 방문해서 해리 존슨 이사를 만나게 될 거예요. 오후 3시 약속이니까 호텔에서 점심을 하신 후 출발하면 될 거예요.”
“네.”
“그리고 4일 차와 5일 차에 BBC 촬영이 있어요.”
“이틀이나요?”
“네, 첫날은 수철 씨와 제시가 같이 출연해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될 거예요. 주로 앨범 ‘INTERSECTION’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될 거고요. 그리고 두 번째 날은 ‘KAE Sound Mirror’ 팀 전체가 출연해서 공연 형식으로 진행될 거예요. 간단한 인터뷰도 하고요.”
“아, 그렇군요.”
“수철 씨가 피아노를 치게 되는 거로 들었는데, 혹시 모르셨어요?”“아니에요. 그건 알고 있는데, 이틀이나 하는 줄은 몰랐어요.”
수철은 박 대표에게 BBC에 출연한다는 소식만 들었었다. 출연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 담당자가 수철이 팀과 같이 출연해서 연주해 주길 바란다는 요청이 있었고. 수철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여기 방송이 그렇더라고요. 스튜디오 사용이 한정되어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 녹화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들었어요.”
레베카는 미국과 달라서 방식이 스피디하지 못하다고 했다. 담당자가 예약을 잡아 놓지 않으면 스튜디오 사용에 제한을 받는다고 했다.
“아, 그렇군요? 전 ‘Sleepless In Island’와 ‘Film music without film’ 두 곡을 하는 거로 알고 있어요.”“네, 맞아요. 영국에선 이 두 곡이 빅 히트를 기록했으니까요.”
레베카는 잠시 수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4, 5일 차는 그렇게 BBC와의 스케줄이 있고요, 그리고 6일 차는 ECM에서 진행하는 프로모션 행사에 참여하실 거예요.”“6일 차도 스케줄이 있는 건가요?”
“네.”
너무 빡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일 차면 프랑스 가기 전날까지 스케줄이 있다는 얘기였다. 박 대표가 너무 많이 잡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의 표정을 읽은 레베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붙였다.
“디데이 뮤직 대표님의 요청이 있었어요.”
“요청이요?”
“수철 씨가 개인 시간을 충분히 쓰게 하라고요.”
“아…….”
“원래는 내일도 스케줄이 있는데, 오늘 친구분들 만나고 술을 마시면 하루 휴식이 필요할 거 같아서 ECM 방문을 이틀 후로 잡은 거예요.”“아, 그런 거였군요.”
수철은 빡빡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빡빡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박 대표도 수철의 성향을 아니까 꼭 소화해야 할 중요한 일정만 뽑아서 스케줄을 만든 거였다.
“수철 씨가 방송 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카메라 플래시도 싫어하고요.”“네, 저는 그런 쪽 체질이 아니라서…….”
수철은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레베카는 빙긋 웃었다.
“그래서 스케줄을 최소한으로 한 거예요. BBC 이틀 녹화는 어쩔 수 없는 촬영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거고요.”“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그럼 6일 차 ECM 프로모션을 계속 얘기할까요?”
“네.”
“이날은 앨범 ‘ABYSS’와 ‘INTERSECTION’ 두 개 앨범에 관한 프로모션 행사예요. 원래는 가장 최근에 발매한 ‘INTERSECTION’만 프로모션을 하는 건데, ECM에서 요청이 있었어요. 지난 ‘ABYSS’ 앨범 프로모션 때 수철 씨가 참석하지 않았으니까 이번에 한번 더 하는 게 어떻겠냐고요. 아직도 ‘ABYSS’에 대한 인기가 식지 않았거든요.”“네, 알겠어요. 그렇다면 참석해야죠.”
수철은 선뜻 대답했다. 멤버들에게도 ECM에게도 미안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을 이어가던 레베카가 수줍은 듯 입을 뗐다.
“참고로 저도 ‘ABYSS’의 팬이에요.”
“아…….”
수철은 방긋 웃는 그녀를 보며 길게 탄성만 냈다.
감사합니다. 제가 만든 음악의 팬이 되어 주셔서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한 번도 그런 아이돌스러운 말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 소리만 길게 냈다.
레베카는 수철의 그런 모습이 귀여운지 피식 웃었다.
“제 가방에 ‘ABYSS’와 ‘INTERSECTION’ 시디가 모두 들어 있는데, 이따가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네? 네, 그럼요. 해 드릴게요. 아니, 당연히 해 드려야죠.”
수철은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대답했다. 레베카는 한 번 더 웃고는 말을 이었다.
“6일 차 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 전달받지 못했어요. 이틀 후 ECM 방문 때 장소와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거예요.”
“네, 알겠어요.”
“영국에서의 일정은 여기까지예요. 그리고 다음 주는 프랑스로 간다고 들었어요.”“네, 맞아요. 칸으로 가죠.”“그렇군요? 거기서의 일정은 아직 통보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혹시 칸에서도 같이 가시나요?”“당연히 동행해야죠, 제가 매니저이자 수행 비서인데요. 호호.”
레베카는 앳된 소녀같이 방긋 웃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는 더하다고 들었어요.”
“네? 뭐가요?”
“에이전트가 운전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매일 붙어 다닌다고요.”“아,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저는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수철의 말에 레베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에이전트, 매니저는 너무 많은 일을 한다는 눈치였다.
“아, 그리고 BBC와 ECM 프로모션에서 전문 통역이 동행할 거예요. 소통이 어려우면 그분의 도움을 받으면 돼요.”“레베카 씨가 있는데 왜 굳이…….”“통역이 필요하냐고요?”
“네.”
“저는 매니저 역할에 충실해야죠. 그리고 제가 사실 한국어에 많이 서툴러요. 특히 전문 용어는요. 그러니까 전문 통역사분이 있는 게 맞죠. 특히 방송과 프로모션 행사인데 실수하면 큰일이잖아요?”
“아…….”
맞는 말이었다. 수철은 너무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는 계속해서 박 대표의 얘기를 덧붙였다. 런던지사 담당자와 상의하며 자잘한 인터뷰나 도움이 안 될 것은 빼고, 굵직한 것만 잡으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ECM을 가는 것도, BBC 출연도 다 그런 이유로 잡은 거였다. 꼭 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ECM은 당연하고, BBC는 한번 출연함으로써 다른 출연 요청이나 인터뷰는 생략해도 될 거 같았다. 대표로 굵직한 것 하나 하는 것이 BBC 출연이었다.
“수철 씨는 스케줄이 많다고 생각하죠?”
잠시 생각에 잠긴 수철을 보며 레베카가 물었다.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해가 돼요. 조금 바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요.”“호호, 수철 씨 바쁜 거 아니에요. 무척 한가한 거예요.”
“네?”
“보통 수철 씨 정도의 뮤지션들은 이것의 네 배는 소화해요.”
“진짜요?”
“수철 씨는 6일 동안 3개의 스케줄이잖아요?”
“그렇죠.”
“제가 예전에 에이전트를 맡았던 뮤지션들은 보통 6일이면 12개 정도는 소화해요. 빡빡하게 짜면 하루에 3개도 소화하고요.”
“네? 진짜요?”
수철은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자신의 일정이 한가한 걸 넘어서 초라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철 씨는 좋은 회사 만나신 거예요. 개인 시간을 많이 쓰게 배려하라는 회사가 어디 있나요? 멀리까지 와서요.”
수철은 그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실 수철이 사람들 앞에 나서겠다고 했을 때 기뻐한 건 박 대표였다. 그래서 수철은 자신이 박 대표를 배려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알고 보니 착각이었다. 박 대표가 수철을 배려한 거였다. 새삼 죄송하고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 왔어요. 저기 사거리 지나서 내리시면 돼요.”
레베카는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 앞까지 태워다 줬다.
“이틀 후 2시에 모시러 갈게요.”
해리를 만나기로 한 약속이 3시니까 호텔로 데리러 오겠다는 얘기였다.
“네, 오늘 감사했어요. 그럼 이틀 후에 뵐게요.”“아, 참! 이것 좀. 헤헤.”
레베카는 인사하다 말고 가방을 뒤져서 시디를 꺼내 내밀었다. 아까 사인을 받기로 한 시디였다.
수철은 펜을 건네받아 큼직하게 이름을 적고 날짜를 적었다.
사인을 한 적이 있었나?
기억이 안 났다. 레베카에게 처음 해 주는 것 같았다. 시디를 건네며 인사차 물었다.
“퇴근하시는 거예요?”“아니요,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해요.”
“아, 그렇군요.”
괜히 여기까지 운전하게 해서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바로 갔으면 편했을 텐데.
“레베카, 이틀 후에 같이 점심을 먹는 게 어떨까요? 같이 먹고 같이 출발하면 좋을 거 같은데요.”“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그날 호텔 점심 식단이 어떤지 확인해 볼게요.”
“식단을요?”
“제가 베지테리언(Vegetarian) 이거든요.”“아, 네. 그렇군요.”
서로 잠시 뻘쭘한 눈으로 마주 봤다.
“그럼 내일 오후에 전화드릴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레베카가 먼저 마지막 인사를 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수철은 손을 흔들었다. 레베카가 창문을 닫고 출발하자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철은 비 오는 거리에서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 * *
“헤이! 드디어 영웅이 나타나셨군!”
영웅?
제일 먼저 수철을 발견한 알베르토가 소리를 쳤다. 특유의 걸음걸이로 다가와 손을 맞잡고는 어깨를 부딪치며 껴안았다.
“헤이! 수철!”
“요! 수철!”
샘과 데이비드도 잇달아 다가와 수철을 껴안았다.
“야, 너희들 정말 잘나가는 거 맞나 봐? 향수가 고급스러운데?”
수철은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멤버들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패션도 달라졌고, 덥수룩하던 수염도 깔끔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몸 관리를 하는지 옷을 입은 맵시도 달라 보였다.
“수철, 왜 그래? 우린 재즈 뮤지션이야. 락커가 아니라고!”
알베르토는 능청스럽게 아니라고 했지만, 관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모두가 다 예전보다 핸섬해져 있었다.
“수철아! 어서 와! 장거리 비행하느라 고생했다.”
뒤늦게 도착한 영준이 형이 등 뒤에서 나타났다.
역시 한국인의 인사는 다르다. 따뜻하다. 장거리 비행의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은 영준이 형 같은 한국 사람밖에 없다.
“형!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그래, 잘 왔다. 오느라 수고했어. 사람들이 널 많이 기다렸어. 나도 그렇고.”
수철은 그 말에 대꾸하기가 무색했다. 너무 늦게 온 것도 있지만 이마저도 필립 감독이 영화제에 초대하지 않았으면 더 늦어졌을 것이다. 무안함에 말을 돌렸다.
“그런데 형, 이제 여기에 정착하신 거예요?”
영준이 형의 모습이 점점 영국 사람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깔끔하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덧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래, 정착했지. 강의도 그만뒀으니까.”
“네? 진짜요?”
수철은 장난삼아 물었는데, 영준이 형은 진짜 영국에서 정착할 생각이라고 했다.
“2년짜리 예술인 비자도 받았어.”“아, 저는 몰랐네요.”“너야 호주에서 작업하느라 정신없었을 테니까.”
수철은 아차 싶었다. 영준이 형은 박 대표의 후배니까 소식을 다 듣고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앨범 ABYSS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하던 강의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완전히 왔다는 건 의외였다.
“내가 기다리던 상황이 벌어졌는데 당연한 선택이지!”
영준이 형은 자신의 선택에 주저하지 않았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지금이 내 전성기거든. 하하.”
전성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앨범을 통해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에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ABYSS 덕분에 내 옛날 앨범도 매출이 제법 쏠쏠해. 벌써 200%를 넘었어.”“와, 좋은 소식이네요.”“굿 뉴스지, 머지않아 300%도 넘길 거 같아. 하하.”
기쁜 소식이었다. 그만큼 앨범 ABYSS의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빠른 시간에 지난 앨범의 매출이 두 배로 올랐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동안 매출이 저조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 오랜만에 한잔해야지?”
“건배!”
수철은 오랜만에 만난 멤버들과 술잔을 부딪쳤다.
“하하!”
“하하!”
그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떠들며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 분위기는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졌다.
* * *
“수철!”
제시가 검은 승용차 뒷좌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수철은 호텔 앞에 서 있다가 얼른 차에 올라탔다.
“잘 지냈어? 얼굴이 좀 탔네?”
자리에 앉자 제시가 수철의 얼굴을 살폈다.
“호주에서 여행을 좀 많이 했거든.”“하하. 그러네. 너도 오지(Aussie, 호주인을 부르는 속어) 다 됐구나?”
제시는 검게 그을린 수철을 보며 웃음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