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미국을 다루는 법
수철은 유명 연예인이 된 듯한 제시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앞 좌석에서 운전하는 기사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런 질문은 자제했다.
“많이 바쁜가 봐? 어제 파티에도 못 오고.”
수철은 물으면서도 제시가 안쓰러웠다. 짙은 화장 뒤로 힘든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서.
“말했잖아, 아직도 ‘INTERSECTION’ 홍보 기간이라서 스케줄이 많다고.”
제시는 얼굴을 내밀며 손가락으로 아랫눈시울을 눌렀다. 스케줄이 많아서 피곤하다는 장난이었다.
“오늘은 다 끝났고?”“아니, 저녁 때 인터뷰 하나 더 해야 해. 그런데 넌, 앨범은 다 끝내고 온 거야?”
제시는 자신의 얘기는 그만하고 싶은지 말을 돌렸다.
“응.”
수철이 대답하자 제시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줘.”
“뭘?”
“앨범.”
“아직 안 나왔어. 나오면 보내 줄게.”“에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했을지 잔뜩 기대했는데.”
“무슨 짓? 하하.”
수철은 크게 웃었지만, 제시는 아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럼 언제 들어 볼 수 있는 거야?”“음원 풀릴 때 메일로 보내 줄게.”“알았어, 어떤 가사를 썼는지도 정말 궁금해.”“기대는 하지 마, 아직 작사는 초보니까.”“핏, 말은 항상 그렇게 하지. 한국인의 특징인가?”
“……?”
“영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겸손이 지나쳐.”
“…….”
차는 어느새 바쁜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 도착했다. 작은 레스토랑이 보였다. 제시가 예약한 곳이었다. 제시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하고 싶어서 이곳으로 잡았다.
“어제는 잡지 촬영이 있었어. 에이전시에서 잡은 거라서 어쩔 수 없었고.”
제시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어제 올 수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관해서 설명을 붙였다. 수철은 말없이 제시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까지는 즐기고 있지만 언제 튕겨 나갈지 나도 몰라. 나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 들거든. 하하.”
제시는 연예인 같은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했다.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푸념하는 자신의 모습이 멋쩍은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난 스타가 될 생각은 없거든.”
제시는 잠시 이런 시간을 즐기다 갑갑하거나 지겨워지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에이전시 없이 혼자 자유롭게 활동하며 집시처럼 세상을 떠돌 거라고 했다.
“돈은 충분히 모았으니까. 흐흐.”
다시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건 좋은 얘기지만 수철은 제시가 돈을 좇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시를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건 자신이니까. 호주에서 자유롭게 잘살고 있었는데.
‘ABYSS’의 보컬을 제안한 게 화근이었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어떻게 활동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팀 말이야.”
수철은 제시가 두 개의 팀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걸 깜빡했다. 두 앨범의 색깔이 다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데. 새로운 팀에 대한 조언도 수철이 했었는데. 깜빡 놓치고 있었다.
“새로 팀을 짠 거지?”“응. 프로젝트 팀이지, 셋이서 하는.”
“셋?”
“네가 만든 특이한 소리는 현존하는 악기로는 연주할 수 없으니까 컴퓨터로 시퀀싱(Sequencing)하는 멤버 한 명이랑 기타, 베이스 그렇게 셋. 나까지 하면 넷이 되는 거지.”
“드럼은 없고?”
“드럼은 시퀀싱으로 다 해. 특이한 악기가 많으니까 컴퓨터로 다 하는 거지. 그 친구가 드럼도 하고, 신디사이저도 하고, 시퀀싱도 하고. 가장 바빠. 하하.”
제시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멈추고 얼굴을 내밀었다.
“근데 왜 모른 척해? 네가 이렇게 하라고 한 거잖아?”“난 드럼을 빼라는 말은 안 했지. 신디사이저로 새로운 악기만 소화하라고 한 거지.”“그게 그거지, 뭐. 결국은 시퀀싱하라는 얘기잖아.”“그래, 그 부분은 그렇지.”
둘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음식에 집중했다. 제시가 영국에 올 때마다 꼭 들르는 단골집이었는데, 이제는 영국에 있다 보니까 자주 온다고 했다. 제시가 단골이 될 만큼 음식은 독특하면서도 맛있었다. 인도의 카레 향이 물씬 나는 씨푸드 음식이었다.
“한국 에이전시는 정말 대단하던데?”
제시가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닦으며 수철을 바라봤다.
“한국 에이전시?”
“금별기획이라는 곳 말이야.”“아, 금별기획? 그런데 네가 거길 어떻게 알아?”“내 에이전시가 그러는데…….”
제시는 얼마 전 금별에서 발매된 한국어 버전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수철은 제시가 이 앨범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게 놀라웠다.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수철은 의아해하며 얘기를 들었다.
“앨범이 나오기도 전에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영상에 음악을 붙여서 돌렸대. 뮤직비디오처럼 말이야.”
이 정도는 흔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데가 많으니까.
“그리고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일주일 만에 12번의 공연을 했대. 그것도 방송에서 말이야.”
“정말?”
“그래, 더 놀라운 건 비행기를 타고 일본 중국 태국 베트남을 옮겨 다녔다는 거야. 이 정도면 홍보를 떠나서 미친 거 아냐? 한국에서는 이렇게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건가?”
영국 같으면 소속 아티스트를 혹사시킨다고 손가락질받을 일이었다. 거의 하루에 두 탕씩 뛰었다는 얘기니까. 그것도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금별기획이 그런 곳이 아닌데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에이전트는 어떻게 일주일 만에 이럴 수 있냐고, 한국 가수는 로봇이냐고, 이런 회사는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어. 이 정도면 기네스에 올려야 된다고 하더라고. 하하.”
제시는 웃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며 머리를 저었다. 제시가 놀라는 것도, 에이전트가 혀를 내두르는 것도 당연했다. 수철도 믿기지 않으니까.
이 정도면 미리 스케줄을 다 잡아 놓고 움직였다는 것이고, 영향력이 큰 방송에만 출연했다는 얘기다. 그것도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이게 쌤이 얘기한 금별의 영업력인가?’
수철이 한국어 버전을 받았을 때가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마스터링이 막 끝난 음원을 시드니 떠나기 일주일 전에 처음 들었었다. 그리고 기껏해야 8, 9일이 지났다. 그런데 벌써 제시가 알 정도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국 회사는 정말 대단해. 어떻게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홍보를 하는지.”
그 말에 수철도 동의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한국 회사들은 정말 치밀하게 홍보하는 거 같아. 나도 같은 한국인이지만 정말 놀랄 때가 많아.”“하하. 너랑은 맞지 않지.”
수철의 성향을 잘 아는 제시는 그런 회사와 수철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웃음을 보였다. 그러곤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엔 유럽의 영향으로 아시아의 판매량이 늘어날 거라 예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야. 아시아가 난리 나서 유럽의 매출이 더 오르길 기대하는 상황이래. 하하.”“그래, 그렇겠네. 언어는 달라도 음악은 같으니까.”
제시에게 이런 얘기를 듣다 보니 박 대표에게 들었을 때보다 더 생생한 현장의 얘기를 듣는 거 같았다.
“조만간 그 회사가 아시아 시장을 잠식할 거라고 했어. 이렇게 빨리 붐을 만들어 갈 정도니 안 봐도 뻔하대.”
제시 에이전시의 예측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예측이었다. 금별이니까.
“수철, 근데 너.”
“……?”
“몰랐었어?”
“뭐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잖아? 네가 그 회사랑 계약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지?”
제시는 이해가 안 된다며 빤히 쳐다봤다.
“난 잘 몰라, 회사에서 알아서 하니까. 신경 안 쓰거든.”
“?”
제시는 갸웃했다. 계약 관계를 철저히 하고 고지의 의무가 막중한 영국 에이전시와 계약한 제시로서는 이해 못 할 말이었다.
“머리 아프니까 얘기 안 해 줘도 괜찮다고 했어.”
“…….”
제시는 여전히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이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에이전시는 여기랑 다르다고 들었는데. 진짜 그래?”“여기보다 좀 더 끈끈하지.”
“끈끈?”
“친밀하다는 뜻이야. 특히 지금 우리 회사는 더 그렇고.”
“더 끈끈?”
“하하, 그래. 더 끈끈. 암튼 그 얘기는 그렇고.”
수철은 갸웃하는 제시를 보며 말을 돌렸다.
“‘INTERSECTION’은 분위기가 어때?”
앨범이 나온 지가 4개월이 넘었다. 박 대표에게 영국의 반응을 듣고 있지만 제시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제시는 대답 대신 팔을 벌렸다.
“……?”
“내 모습을 봐, 어떤 거 같아?”
자신이 스케줄이 많아서 지칠 정도로 앨범 분위기가 좋다는 뜻이었다. 수철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남은 음식에 집중했다.
* * *
식사를 한 곳이 호텔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 제시는 수철을 데려다주고 가겠다고 했다.
제시는 피로가 쌓였는지 차에 타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수철은 그 모습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곡 쓰고, 앨범 만들어서 던져 주고, 그다음은 알아서 활동하라고 방치한 느낌이 들었다.
덜컹.
차는 다시 도시에 들어섰다. 이곳은 늘 그렇듯 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 덜컹대는 소리에 제시가 눈을 떴다.
아하함.
하품하고는 수철을 봤다.
“나, 코 골았어?”
“아니.”
제시는 잠시 비 오는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너무 피곤한 티를 많이 냈지? 음식 먹다가 체하지 않았어?”“전혀,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 그 집 음식 잘하던데?”
제시는 피식 웃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잘 해내고 있으니까.”“걱정 안 해. 날 걱정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네 걱정까지 해?”“풉, 암튼 나 미국 공연도 가게 될 거야. 에이전시에 컨택이 많이 와서.”“좋은 소식이네. 미국 사람들에게 내 실력을 제대로 한번 보여 줘 버려. 아주 정신 못 차리게 말이야.”
수철은 말하면서 뭔가 어색했다. 기획사 매니저 같은 말투였다. 힘을 내라고 응원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 참, 나 다음 주에 칸에 가.”“칸? 영화제 말하는 거야? 프랑스?”“응, 음악상 후보에 올랐거든.”“뭐? 칸 영화제 후보에 올랐다고?”
제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영화가 아니라 음악으로.”“와! 이게 무슨 일이야?”
제시는 입을 한껏 벌리고 수철을 바라봤다.
“일단 축하해!”
“고마워.”
“이럴 게 아니라 파티를 해야지! 어때? 내 스케줄 다 끝나고 새벽에라도 멤버들 부를까?”“아니야, 나중에 다 끝나고 나서 하지 뭐. 수상한 것도 아니고 후보에 오른 건데.”“후보에 오른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래?”
“…….”
제시가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런데 왠지 상도 탈 거 같은데?”
“글쎄, 그건…….”
“너, 진짜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대단하다. 영화음악은 또 언제 한 거야?”“예전에, 한국에서.”“칸의 음악상 후보라니, 와!”
제시는 계속 탄성을 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마주쳤다.
“아 참, 너 용수철이지?”
“?”
“그냥 잘나가는 작곡가로 착각했었어.”
“…….”
제시는 흐뭇한 미소로 수철을 보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 보니, 나도 칸 시즌에 거기서 공연한다.”
“그래?”
“응.”
“INTERSECTION?”
“아니, ABYSS. 그리고 니스(Nice)에서도 공연할 거야. 칸에서 가까운 도시지.”
“그것도 ABYSS?”
“아니, 그건 INTERSECTION.”
* * *
“미국에서 공연 요청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동양인으로 보이는 관련 업체 대표가 탁자 위에 손을 올린 채 비스듬히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해리는 정자세로 앉아서 정중하게 답변을 했다.
“네, 이번 달 들어서 공연 제안이 급격히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의외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열풍이 거세다고 하더군요.”
ABYSS 앨범이 유럽 흥행에 이어 미국에서까지 좋은 반응을 얻자, 미국의 공연 기획사에서 제시와 멤버들이 소속되어 있는 에이전시로 공연 요청이 오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접한 해리는 새로운 프로모션을 진행해 볼 생각에 관련 업체를 방문해서 대표와 미팅을 진행 중이다. 중국인 자본가인 그는 ECM의 프로젝트에 많은 돈을 투자한 투자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리는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
“좋은 소식이군요.”
대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매만졌다. 미국에서의 흥행은 큰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에.
대표를 바라보던 해리가 미소를 멈췄다.
“그런데 모두 거절하라고 했습니다.”
“네?”
대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왜요!”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는 해리의 발언에 미간을 좁히며 몸을 세웠다.
흥행하려면 미국은 꼭 가야 하는데 거절이라니.
굴러들어 온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것 같은 기분에 대표는 해리를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하지만 해리는 비웃기라도 하듯이 묘한 미소를 띠었다.
“대표님은 미국을 다루는 법을 잘 모르시는군요?”“미국을 다루는 법이요?”
대표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