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70화 (170/239)

#170화. 힐끗힐끗 쳐다보는 여직원

해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을 바라보는 대표의 시선을 잠시 외면했다. 궁금해하는 그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대표님은 비틀스(The Beatles), 퀸(Queen), 오아시스(Oasis), 자미로콰이(Jamiroquai)가 그냥 미국을 휩쓸었다고 생각하세요?”

“…….”

대표는 너무나 유명한 밴드의 이름을 대며 되묻는 해리를 멀뚱히 쳐다봤다.

‘그냥 휩쓸지 않았으면 어떻게 휩쓸었다는 얘기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영국 사람이 아닐뿐더러 질문의 의도도 파악할 수 없었다.

“물론 음악이 신선하면서도 중독성 있고, 밴드가 사람들을 끄는 매력을 갖췄다는 게 흥행의 첫 번째 이유죠. 그런데 그뿐일까요? 그렇게까지 흥행하는 데 매너지먼트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요?”

‘기껏 이 말을 하려고 말장난을 한 건가?’

음악 전문가가 아닌 투자 전문가라 그런지 대표는 해리가 말장난한다고 받아들였다.

“매너지먼트의 역할이 커요? 허허,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잔뜩 긴장시켜 놓고 너무 당연한 답변을 내놓은 해리를 보며 대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다리를 꼬았다.

“네, 당연하죠. 그런데 어떤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지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죠. 미국 시장을 공략하는 맞춤형 매너지먼트를요.”

그 말에 대표는 다시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였다.

“맞춤형 매너지먼트라니요?”

눈에 힘을 주며 되묻는 대표를 해리는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봤다.

“우리는 미국인을 다루는 법을 잘 알거든요. ‘음악은 영국에서 발생하고 미국에서 흥행한다.’는 말, 그냥 생긴 말일까요? 설마 영국에서 히트한 음악들은 미국에서도 다 히트한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시죠?”

그 말에 대표는 뜨끔했다. 해리의 눈초리가 자신의 생각을 꿰뚫는 거 같았다.

“네, 뭐. 그거야…….”

대표는 무안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해리는 대표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미국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에서의 흥행이 전 세계 흥행의 척도가 되니까요. 수익은 말할 것도 없고, 뮤지션으로서의 성공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죠. 미국에서 흥행해야 월드 스타라는 말이 따라붙으니까요.”

“…….”

대표는 탁자 위에 팔을 올려놓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신중해야 합니다. 만약에 예상치 못한 실수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곳이니까요. 그곳의 매너지먼트 산업이 그렇습니다. 전 세계에서 스타가 되고 싶어서 몰려든 뮤지션들이 줄을 서 있으니까, 굳이 실패한 뮤지션에게 기회를 줄 이유가 없죠. 차갑고 냉정한 곳입니다.”

어느덧 대표는 진지한 모습으로 해리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잠시 해리가 말을 멈춘 틈을 타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계속 뜸을 들일 겁니다.”

“뜸이요?”

“네, 안달이 잔뜩 날 때까지 뜸을 들인 다음 한방에 빵! 터트리는 거죠. 몸값이 치솟을 데까지 치솟고, 군침을 흘릴 대로 흘렸을 때 영웅처럼 등장하는 거죠. 미국인들은 영웅을 좋아하거든요.”“그러다 시기를 놓쳐서 식어 버리면요?”“그럴 일은 없습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선 계속 이벤트가 벌어질 테니까요. 이슈가 꾸준히 생길 거고, 미국 언론은 그 기사를 받아쓸 겁니다. 계속 부채질을 할 거란 얘기죠.”

“그렇군요.”

해리의 확신에 찬 말투에 대표도 어느덧 설득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게 있습니다.”

“어떤?”

“미국에서 높은 개런티를 제시한다고 해서 덥석 물면 안 됩니다. 지금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칫 더 큰 기회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우선은 전 미국인들이 볼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을 먼저 잡고 들어가야 합니다. 인기 뮤지션을 초청해 단순히 인터뷰를 하는 쇼 프로그램이 아니라, 실제로 라이브 공연을 하는 핵심 프로그램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대로 진가를 보여주는 거죠. 물론 그전에 밑 작업은 충분히 해놔야 하고요.”

“밑 작업이라면?”

“홍보 시스템을 돌려야죠. 뉴욕에 있는 광고판에 광고도 걸고, 언론에 보도 자료도 충분히 실어야죠. 그리고 영향력 있는 인터넷 언론이나 커뮤니티에서 이벤트를 하며 꾸준히 입소문을 생산해야죠. 미국인들이 딱 좋아하는 사전 영상도 만들고요.”

“아…….”

대표는 새삼 해리가 ECM의 마케팅 이사라는 게 실감 났다. 미국 시장에 관해 자신보다 더 알았으면 더 알았고, 경험과 연륜도 훨씬 많을 텐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한 다음은 일회성 이벤트 공연이 아닌, 미국 투어 공연을 바로 올리는 겁니다.”

“바로요?”

“네, 저희가 그간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그렇게 바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 미국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는 방법입니다. 월드 뮤지션이 되는 정석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다음 앨범이 나오면 같은 시스템을 한번 더 돌리고, 또다시 투어 공연. 그다음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하는 것이 베스트입니다. 미국은 그런 곳이니까요.”

미국이 그런 곳이라는 말이 대표의 머릿속에 박혔다.

해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표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보통 공연 기획사에서 뮤지션을 섭외할 때 신선도를 따진다는 거 아시죠?”“네, 노출이 많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티켓 판매율에서 차이가 난다고 알고 있어요.”“정확합니다. 인지도가 조금 낮더라도 신비주의같이 방송 매체에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 뮤지션의 티켓 구매율이 훨씬 높습니다. 사람들은 TV나 광고에서 자주 보는 뮤지션에게는 돈을 쓰지 않거든요.”“맞아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선 나부터가 그러니까요.”

대표도 해리의 말에 공감하며 끄덕였다. 해리가 눈을 맞췄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리가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이 데이터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글쎄요. 그건 잘.”

대표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해리가 말을 이었다.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이 이런 식으로 티켓 구매율에서 가장 차이가 크게 납니다.”“그럼 다른 나라는 다르다는 건가요?”“네, 영국을 포함한 유럽은 미국의 절반도 안 됩니다.”

“그래요?”

대표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해리의 설명을 기다리며 미간을 좁혔다. 해리가 다시 입을 뗐다.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유럽은 예술인의 공연을 보러 가고, 미국은 스타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겁니다.”

“……!”

“물론 극명하게 갈리는 건 아니지만 수치상으로 보면 그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미국은 스타를 만드는 것에 열광하고, 스타를 무너트리는 것에 즐거워하죠.”

“아…….”

대표는 시선을 멀리 둔 채 천천히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해리가 마치 미국을 다루는 매뉴얼을 머릿속에 꿰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솔하게 행동하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미국은 오랫동안 이런 시스템이 먹혀 온 곳입니다. 그래서 공연 제안이 오더라도 선뜻 응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거죠.”“그렇군요, 이제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대표는 충분히 이해가 됐다는 눈빛을 해리에게 보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좀 더 여쭤봐도 될까요?”

대표는 그 후로도 궁금한 것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해리는 모든 질문에 경쾌하고 막힘없이 답변해 줬다. 덕분에 대표의 신뢰도가 무한 상승했다.

“오늘 해리 이사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네요. 하하.”“별말씀을요. 알고 계신 것에 제가 조금 보충했을 뿐인데요.”

해리는 겸손함을 보이며 자칫 불편할 수 있었던 자리를 잘 마무리 지었다.

* * *

“어떻게 됐어? 성과가 있었어?”

해리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동료 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프로모션의 절반을 부담하기로 했어.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거로 했고.”“퍼펙트네. 역시 해리, 자네는 협상의 달인이야! 그런 깐깐한 노인네를 설득하다니.”

양복을 벗어서 걸어놓던 해리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인데 어설픈 자존심 세우기 따위는 필요 없잖아?”“그렇지. 자존심, 가식, 그런 거 다 필요 없지. 목표만 달성하면 되니까.”

“뭐?”

해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왜?”

“말이 너무 무섭잖아,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니?”“아니 먼저 그렇게 말하길래…….”“내 말은 굳이 다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어.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말이야.”

“…….”

해리의 말에 동료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해리는 옷을 걸어 놓고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사람도 없는 사무실에서 기다리고?”“오늘 미스터 수철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

해리가 시간을 확인했다.

“30분 남았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날 기다린 거야? 왜, 사인이라도 받으려고?”“하하, 왜 이러시나? 내가 미스터 수철의 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치가 있지. 사인은 해리, 자네에게 부탁하겠네.”“하하, 그 부탁은 거절하겠네. 며칠 후 프로모션 때 사인 행사도 같이 열리니까 그때 자네도 줄을 서면 되겠구만.”

“뭐라고? 하하.”

“하하. 볼만하겠어. 자네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줄 서 있는 모습이. 사진 한 장 찍어서 1층 로비에 걸어 놔야겠네. 하하.”

해리는 생각만 해도 재밌다며 껄껄 웃었다.

“이것 좀 보게.”

같이 껄껄 웃던 동료가 웃음을 멈추고 매출 그래프가 그려진 리스트를 내밀었다.

“음.”

리스트를 보는 해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승세가 너무 빨리 꺾이는 거 같지 않아?”

해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가 물었다. 해리는 보던 리스트를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꺾였다고 할 수 없지. 그냥 착시현상이야.”

“착시현상?”

“그동안 상승세가 너무 가팔랐잖아?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둔화한 거처럼 보이는 거지. 이 정도면 준수한 상황이야.”

해리의 설명에도 동료는 여전히 갸웃했다.

“ABYSS 앨범이 너무 빅히트를 쳐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

해리는 끄덕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상했었잖아? 이번 앨범은 ABYSS와 색깔과 많이 달라서 충성 고객이 아니면 폭을 넓히기가 어려울 거라고.”“그렇긴 하지만 유독 40대 이후에서 정체되어 있다는 게 문제잖아. 우리는 그 나이대 사람들에게 의존도가 큰데.”“긍정적으로 생각해, 대신 젊은 층을 많이 확보했잖아? 그리고 40대 이후가 그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야, 사운드가 익숙하지 않아서 받아들이기 어려우니까. 정통 재즈가 아니어도 ABYSS까지는 어떻게 수용을 했지만, 이번 INTERSECTION은 완전히 다르잖아.”

해리가 이번 앨범의 상승세가 꺾인 이유를 정확하게 집어냈다.

“그건 그렇지.”

동료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의 등 뒤로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철이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복도를 지나다니는 젊은 여직원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해리와 수철이 만나게 될 회의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모습이 유리창으로 보였다.

해리는 빙그레 웃었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외모에 대한 소문까지 회사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 * *

“여기예요.”

레베카가 오래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ECM 영국 지사였다. 건물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작은 학교 같은 건물이었다. ‘ECM RECORDS’라는 명패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았다.

“들어갈까요?”

“네.”

레베카의 말에 수철이 먼저 두꺼운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