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해리와 맥
밖에서 볼 때와 달리 건물 내부는 밝았다. 1층 로비의 한편에는 그동안 ECM을 거쳐 간 아티스트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빌 에반스, 칙 코리아 같은 레전드 재즈 피아니스트들을 시작으로 마일스 데이비스와 마커스 M의 사진도 눈에 띄었다.
사진 밑으로는 그들이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형상화한 캐릭터 인형이 쭉 전시되어 있었고, 다른 쪽 벽에는 그동안 ECM이 수여받은 갖가지 상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ECM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음반 산업에 미치는 어마한 영향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수철은 허리를 굽히고 캐릭터 인형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트럼펫을 부느라 잔뜩 부풀어진 마일스 인형의 볼은 손가락으로 콕 찔러 보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베이스를 메고 있는 어린 시절의 마커스 M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정말 대단하죠?”
진열되어 있는 상패를 살펴보는 수철에게 레베카가 말을 붙였다.
“네, 엄청나네요.”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유럽에서는 ECM이 재즈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죠. 수많은 뮤지션이 이곳을 거쳐 갔으니까요.”
레베카는 재즈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레베카의 말대로 ECM은 재즈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제 그만 올라갈까요?”
레베카가 시간을 확인한 후 중앙의 넓은 계단으로 수철을 안내했다. 수철은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 * *
복도를 돌아서 사무실로 들어서려는데, 유리창 너머로 수철을 발견한 해리가 잔뜩 입을 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레베카가 앞장서 손잡이를 밀어서 문을 열었다. 수철이 들어섰다.
“미스터 용! 어서 오세요!”
해리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하하.”
손을 내밀었다.
“네, 안녕하세요. 해리 존슨 이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철도 같이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
해리는 매서운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첫인상이 똑똑하면서도 인자한 동네 아저씨 같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넓은 하관에 번진 부드러운 미소는 백만 불짜리라고 할 정도로 멋있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고루 섞여 있는 수염은 그의 미소를 더 멋있게 만들었다. 수철은 문득 할아버지 3인방이 생각났다. 그중에서도 정 선생 할아버지의 50대 모습 같았다.
“편하게 해리라고 불러요.”“네, 그럴게요. 해리도 절 수철이라고 불러 주세요.”
수철을 보는 해리의 입에서는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수철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자. 이쪽으로 앉죠.”
해리는 수철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수철이 자리에 앉자 등 뒤에 서 있던 레베카가 허리를 굽혔다.
“수철 씨.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저는 담당자랑 프로모션 스케줄을 확인해 볼게요.”
레베카의 속삭임에 수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베카는 해리와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해리의 눈에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철을 힐끗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는 모습이 보였다. 해리는 빙그레 웃으며 다가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커피 마시겠어요?”
“네, 주세요.”
해리는 직접 원두커피를 만들어 와서 수철에게 내밀고, 마주 앉았다.
“그럼 수철, 우리 무슨 말부터 할까요?”
“……?”
“그동안 쌓인 얘기가 너무 많아서 어떤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하.”
“아, 네. 하하.”
해리의 웃음에는 반가움과 궁금함과 미래에 대한 기대 등이 모두 섞여 있었다. 수철도 그걸 알기에 따라서 웃었다.
잠시 너스레를 떨던 해리는 박 대표 얘기부터 꺼냈다.
“디데이 뮤직의 박 대표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세요. 일 처리가 시원시원하시고, 그릇도 크신 분이세요. 일을 진행하다 보면 오히려 내가 배울 때가 많아요. 하하.”“네, 그렇죠. 하하.”
“그런 의미에서 수철은 좋은 회사를 만났어요. 앞으로 수철에게 큰 디딤돌이 되어 줄 회사가 분명해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해리가 어린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는 박 대표를 제대로 보고 있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수철이 작곡하고 프로듀싱한 앨범이 모두 큰 흥행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동안 작, 편곡 의뢰가 많았죠. 굉장히 좋은 조건에 큰 금액을 제시했는데도 박 대표님께서는 단칼에 거절하시더라고요?”
해리는 박 대표를 칭찬하면서도 섭섭하기도 했다며 얘기를 덧붙였다. 수철은 이런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박 대표가 알아서 거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대표님께 제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제 앨범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요.”
수철은 박 대표가 자신의 생각을 전한 거니까, 회사에 섭섭함을 갖지 말라는 의미로 말을 했다. 해리는 이해한다며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앨범에 집중이라면, 이번에 발매하는 앨범을 말하는 건가요? 제목이 SUNSET이라는?”“네, 맞아요. 그 앨범이에요.”“그렇군요. 아쉽게도 우리가 추구하는 앨범과는 방향이나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이번엔 함께하지 못하죠. 하지만 분명 좋은 성과를 거둘 거예요. 수철이 만들었으니까요. 하하.”“네, 그러길 기대하고 있어요.”
수철은 해리와의 대화가 사무적으로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주제를 바꿨다.
“여기 임원들 대부분이 ABYSS의 팬이에요. 나도 마찬가지고요.”“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INTERSECTION은 아직 적응 중이에요. 하하.”
“하하.”
수철은 적응 중이라는 말에 해리를 따라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수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인을 받아 달라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만나고 싶어 했는데, 제가 단호하게 다 막았어요. 하하.”
“아, 네.”
“나도 수철의 팬이니까 사인은 내가 제일 먼저 받아야겠죠?”“그럼요, 언제든지 해 드릴게요.”
수철이 공손하게 말하자 해리는 눈을 마주치며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지금 ‘KAE SOUND MIRROR’가 페스티벌을 휩쓸고 다니는 거 알죠?”“네, 얘기 들었어요.”“인기가 갈수록 폭발적이에요. 그만큼 수철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요.”
그 말에 수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정통 재즈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진 건가요?”“초반엔 딴지를 거는 평론가들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어요. 그런 이슈를 다 덮을 만큼 사람들의 호응도가 높으니까요. 재즈 페스티벌 주최 측이 앞다투어 섭외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페스티벌 측에서도 흥행을 고려해 팀을 섭외한 거라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작, 편곡을 통해 수철의 능력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에 아무도 거기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해리는 계속해서 그간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ABYSS의 곡들은 아직도 자신에게 감동을 선사한다는 찬사를 덧붙였다.
수철은 묵묵히 얘기를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곡이 가장 마음에 드셨어요?”
해리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처음엔 ‘Film music without film’이…….”
처음엔 ‘영화 없는 영화음악’이 좋았는데, 요즘은 ‘Sleepless In Island’가 좋다고 했다. 해리는 마치 수철의 광팬이라도 되는 것처럼 음악에서 받은 느낌을 세세히 묘사했다. 말을 하는 동안에는 시선을 수철의 눈에 고정했다.
“그리고 INTERSECTION은…….”
ABYSS에서 받았던 느낌에 이어서 INTERSECTION의 느낌까지, 해리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자기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수철을 못 만났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그가 수철을 엄청난 작곡가로 생각하는 건 확실했다.
“음.”
수철은 얘기를 들으면서 해리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케팅 이사와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학식이 깊은 음악가와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세세하게 음악이 주는 작은 터치까지 읽고 있었다. ECM의 이사로서 오랫동안 음악을 접했기에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음악의 흐름과 편곡의 의도를 정확히 집고 있었고, 첨가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 악기 얘기도 꺼냈다.
수철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단지 수철은 간결한 걸 좋아하고 해리는 화려한 걸 좋아한다는, 취향의 차이 정도?
어찌 됐건 음악을 보는 해리의 눈은 어지간한 음악가 이상이었다.
똑똑.
해리가 수철의 곡에 대한 느낌을 마무리 지을 때쯤 노크 소리와 함께 팀장이 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와.”
해리의 손짓에 팀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맥 팀장이 ‘ABYSS’와 ‘INTERSECTION’의 마케팅을 맡고 있는 실무 담당자예요.”
해리의 소개에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용수철입니다.”“안녕하세요, 저는 맥 스미스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맥이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수철은 가볍게 맞잡았다가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수철 씨를 직접 만나니까 긴장이 되네요. 하하.”
맥이 건너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수철이 대꾸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맥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저는 수철 씨의 자켓 사진을 본 게 전부거든요. 거기서 수철 씨의 모습이 너무 영화배우 같았어요. 지금 실물도 그렇고요.”
맥은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는 상반됐다. 상석에 앉은 해리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의 모습을 자켓 사진으로만 본건 해리도 마찬가지였다.
수철은 맥의 말에 어비스 앨범을 녹음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 자켓 사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한국에서 멤버들과 사진을 찍었었다.
“아, 네.”
수철은 별다르게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만 대꾸했다. 해리는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칭찬을 건네는 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분위기를 끊었다.
“자네도 수철에게 할 얘기가 있지 않나?”
“네, 있습니다.”
해리의 물음에 맥은 빠르게 대답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업무 관련한 부분은 ‘디데이 뮤직의’ 박 대표님과 계속 소통하고 있으니까, 이 부분은 회사에서 직접 듣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얘기는 이번 앨범의 반응 정도입니다.”
그 말에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범의 반응을 어서 얘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우선 평론가들이 ‘INTERSECTION’의 특이점으로 뽑은 부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는 이번 앨범이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흐름으로 이루어졌다는 부분입니다. 새로운 악기의 등장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 말에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철은 피식 웃음이 났다. 평론가들의 생각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과 소리를 분리하다니, 같은 건데.
맥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순서를 적지 않아서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이 없는 자연의 소리를 많이 썼다는 점과 우리가 도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노이즈를 배경으로 썼다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이 주는 불편함을 감소시킨 건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 점을 높게 평가한 거죠.”
평론가답네.
수철은 절반쯤 동의했다. 절반쯤은 그런 이유로 노이즈를 넣은 게 맞기 때문이다. 영리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불만 사항도 꽤 있었습니다.”
맥이 눈치를 살피며 다소 목소리를 낮췄다. 해리가 바로 대꾸했다.
“말해 봐.”
“제목이 없고, 순서가 없는 것에 평론가들이 제일 짜증을 냈습니다. 특정하기 힘들어 불편하다고요.”“하하, 그럴 만하지.”
해리가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야겠어. 그 사람들 불편하게 말이야. 하하.”
평론가들이 불편했다는 말에 해리는 통쾌해했다. 음반사와 평론가의 관계를 알 것 같았다.
“이런 시도를 환영하는 소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편해했습니다.”
그 말에 해리는 천천히 끄덕이고는 맥과 시선을 맞췄다.
“그 소수의 이야기를 극대화시켜 봐. 무슨 말인지 알지?”“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리의 말에 맥은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새로운 시도의 앨범이라는 타이틀로 방향을 맞추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대중들은 처음엔 독특하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갈수록 자꾸 생각해 보게 된다는 반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분위기군.”
“네, 맞습니다. 그리고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입체감을 가장 높게 평가했고, 이어서 이런 형태의 앨범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에 의견이 모였습니다. 동서양 소리의 전환을 얘기하며, 기존 사운드에는 한계가 왔고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것에 반기를 드는 신선한 시도라는 평이 많았습니다.”“그 사람들은 늘 그렇게 얘기하지, 뒷북을 치면서 말이야. 그래도 이번엔 평론가들보다는 멘트가 훨씬 낫네.”
맥의 말을 다 들은 해리는 자신의 의견을 한마디 덧붙이치고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로 수철을 봤다.
“어때요, 수철. 이제 이곳의 분위기를 알겠죠?”“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큰 도움이 됐어요.”
수철은 예의상 그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의 평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음반사의 일이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 양은 밖에 있는 건가?”
해리가 느닷없이 맥에게 물었다.
갑자기 레베카를 왜?
수철이 갸웃하는데, 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말하고는 복도로 나갔다.
수철은 깜빡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고, 여전히 레베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똑똑.
잠시 후, 맥이 레베카와 함께 돌아왔다.
레베카는 들어오며 잠시 수철과 눈을 마주치고는 해리를 봤다.
“찾으셨나요? 해리 이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