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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돌아왔다-172화 (172/239)

#172화. 만찬 자리

“레베카 양, 혹시 오늘 미스터 용과 저녁을 같이할 시간이 될까요?”

해리는 수철에게 묻지 않고 레베카에게 먼저 물었다. 레베카가 수철의 일정을 조율하고 있으니까 그렇겠지만.

레베카는 해리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원래 ECM에서는 오늘 만남 후 앨범 흥행을 축하하는 파티를 겸해서 수철을 환영하는 만찬회를 열려고 했었다. 그런데 금별에서 다른 일정을 이유로 거절했었다. 만찬 자리보다 BBC 출연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해리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막상 수철을 만나고 나니, 저녁 식사 정도는 같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것이다.

레베카는 잠시 고민했다. 에이전트의 습성을 잘 아는 해리가 이렇게 묻는 게 의외였다.

“이사님의 마음이 어떤지 알겠습니다. 괜찮다면 잠시 통화하고 말씀드려도 될까요?”“네, 그렇게 하세요.”

해리가 끄덕이자 레베카는 다시 복도로 나갔다.

레베카가 밖에서 통화하는 동안 셋은 대화 없이 멀뚱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레베카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능할 거 같습니다. 8시 전에만 마친다면 내일 일정에 큰 무리가 없을 거 같습니다. 대신 술은 권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내일 일정이 오전 7시부터라서요.”

7시? 방송 촬영이 오후 1시라고 들었는데?

수철이 갸웃하는데, 해리가 몸을 세우며 레베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양해해 줘서 고마워요. 레베카 양의 말대로 8시 전에 마치고, 오늘 건배는 샴페인 대신 홍차로 할게요. 하하.”

해리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의 웃음엔 술을 한잔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엿보였다. 레베카도 그의 마음을 알기에 옅은 미소만 보였다. 해리가 수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철, 모든 일정이 다 끝나고 편안한 시간이 생기면 나와 술 한잔할 시간을 주겠어요?”

해리가 웃음기를 빼고 물었다. 이번엔 농담이 아니었다. 수철과 한잔하며 교감하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수철은 끄덕였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 * *

급하게 마련된 호텔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해리와 맥을 비롯한 ECM 간부 몇 명과 마케팅 직원 몇 명이 동행했다. 수철은 이동 중에 레베카에게 물었다.

“내일 촬영이 1시라고 하지 않았나요?”“네, 맞아요. 촬영은 1시부터 시작돼요.”“그런데 아침 7시부터 일정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수철은 설마 해리에게 엉뚱한 말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1시 촬영이라도 2시간 전에 도착해야 해요. 피디와 작가들을 만나서 미리 체크할 사항이 있어요. 그리고 대기실에서 대기하다가 분장도 받아야 해요. 그러니까 11시까지는 도착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도 4시간이나 남는데?

“그전에 의상실에 들려서 의상을 챙겨야 하고, 샵에 들려서 구두도 챙겨야 해요. 그리고 스킨케어도 받아야 하고요.”

“스킨케어요?”

수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베카는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소리 내며 웃었다.

“하하, 알아요. 그런데 놀랄 필요 없어요. 간단히 받는 거니까요. 아무래도 방송을 타는 것이라서, 소위 화면발이라는 것을 받으려면 그렇게 해야 해요.”“……시간은 얼마나?”“90분 정도 걸릴 거예요.”

“90분이요?”

수철의 질색하는 눈동자가 레베카의 눈앞에 멈췄다.

90분씩이나 다른 사람의 손이 얼굴 위를 왔다 갔다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니 끔찍함을 넘어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방송 펑크 내고 튈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스킨케어가 싫다고 도망칠 수는 없지만.

레베카는 웃음을 머금은 채 얼굴을 붙였다.

“수철 씨는 피부가 좋고, 청결 상태도 양호하니까 쉽게 끝날 거예요.”

레베카는 수철의 얼굴 상태를 살피며 얘기했다. 수철은 가까이 얼굴을 대고 자신의 피부를 살피는 레베카를 피해 목을 뒤로 뺐다.

“그럼, 안 받아도?”

피부 상태가 좋으니까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냉정했다.

“아니요, 꼭 받는 게 좋아요. 수철 씨는 이번이 첫 방송이잖아요? 앞으로 많은 매체에서 수철 씨가 출연하는 장면을 가져다 쓸 텐데, 괜히 후회할 일을 남길 필요가 없죠. 지금은 오글거릴 수도 있지만 다 끝나고 나면 만족할 거예요.”

레베카는 스킨케어를 받아 본 선배로서 말했다. 하지만 수철의 귀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레베카는 빙그레 웃으며 다음 일정을 계속 읊었다.

“스킨케어 끝나면 헤어샵을 들를 거고요, 헤어가 끝나면 레스토랑으로 이동해서 간단한 음식을 드신 후 스튜디오로 이동할 거예요. 그리고 대기실에 가서는…….”

레베카의 말이 길어질수록 수철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수철 씨의 모습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건데, 이 정도의 수고는 들여야죠.”

“…….”

말만 들어도 벌써 피로가 몰려드는 것 같았다.

진즉에 말해 주지. 마음에 준비라도 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레베카가 빠르게 말을 붙였다.

“의상 협찬 조율하고, 주 거래처 샵과 예약 시간을 맞추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저도 조금 전에 확정된 일정을 받았고요.”

“……네.”

수철은 힘없이 대답했다. 레베카는 옅은 미소를 띠며 바라봤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만 이 꽉 물고 하자.

이렇게 다짐하는데, 갑자기 제시가 떠올랐다.

며칠 전 모습이 생각났다. 자기랑 맞지 않는다고, 언젠간 자유를 되찾을 거라고 주먹을 쥐던.

제시, 네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해.

수철도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 * *

급하게 만든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호텔에는 고급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뷔페식으로 세팅이 되어 있어서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집어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레베카도 이번엔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수철은 좋아하는 씨푸드를 접시 한가득 담았다.

“건배할까요?”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모여 앉자 해리가 잔을 들었다. 사람들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 사람들의 잔엔 와인이 들어 있었고, 해리는 아까의 장난을 실현하려는 건지, 진짜 홍차가 들어 있는 잔을 들었다. 수철은 물이 담긴 와인 잔을 들었다.

“앨범 ‘ABYSS’의 흥행을 축하하고, 아울러 새롭게 상승하는 앨범 ‘INTERSECTION’의 대박을 기원합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 ECM을 방문해 준 이번 앨범의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수철을 환영합니다! 건배!”

“건배!”

해리가 건배사를 하고 건배를 외치자 사람들은 모두 건배를 외치고 잔을 입에 갖다 댔다. 수철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옆에 앉아 있는 레베카도 마찬가지고.

어느 정도 식사를 하고 해리와 대화를 나누는데, 사람들이 수철의 주위를 기웃하는 모습이 보였다. 해리는 빙그레 웃으며 수철에게 몸을 기울였다.

“수철, 사람들이 사인을 받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 말에 수철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봤다. 수철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미스터 용, 괜찮다면 같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수철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네, 좋아요.”

사람들과 같이 서서 사진을 찍었다. 레베카는 그 모습을 미소로 바라봤다. 해리도 슬쩍 껴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제 이름도 좀 적어 주시면 좋겠어요. 캐서린이라고요.”

사람들은 줄을 서서 시디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만찬 자리는 어느새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하는 팬미팅 자리가 됐다. 수철은 이렇게나마 유명세를 치렀다.

* * *

수철이 떠나고 아쉬운 간부 몇 명의 술자리가 이어졌다. 이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호텔 바(BAR)로 이동했다.

“생각할수록 참 재밌는 거 같아, 하하.”

“뭐가?”

“어떻게 자기 나라 음악가가 외국에서 이렇게 인기가 높은데 모른 척 조용할 수 있지? 마치 천대하는 거 같지 않아?”

그 말에 해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수철이 만든 팝 음악은 모두 음악 차트의 탑을 휩쓸었다고 들었어.”“그래? 그럼 장르 때문인가?”“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우리와 문화적으로 다른 분위기도 있고.”

해리는 위스키를 온더록스 잔에 부어서 얼음과 함께 휘휘 저었다.

“예를 들면?”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동료가 시선을 맞추며 물어왔다. 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악가를 예술가로서 리스팩하는 것보다 스타로서 기대하는 게 큰 모양이야. 다양한 탤런트를 가진 스타 말이야.”“소위 말하는 연예인이라는 부류 얘기군.”“그래, 연예인과 음악가는 분명히 다른데,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모양이야. 거기에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수철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꺼려해서 노출이 많이 안 됐다고 들었어.”“그렇군. 한국 시장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가졌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

동료는 해리의 말에 대꾸하며 잔을 들어 부딪쳤다. 해리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디나 다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유럽과 시장이 다르다고 해서 편견을 갖는 건 위험해.”“그래, 맞는 말이야. 나도 조심해야겠어.”

술자리 분위기가 부드러워서 그런지 동료는 해리의 말에 빠르게 수긍했다. 해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갈수록 수철이 확실하게 발돋움하는 것엔 문제가 없을 거야. 한국에서든, 어디서든 말이야. 천재성은 누를 순 없지.”

해리는 확신에 찬 눈빛을 반짝였다.

“그래, 그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해리의 말에 같은 자리에 있던 서너 명의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오늘 수철과의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내 생각엔 말이야.”

그때 해리의 얘기를 들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동료가 얼굴을 내밀었다.

“수철 같은 사람은 여기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너무 아깝잖아, 그런 곳에서 재능을 썩히는 게.”“허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곳이라니? 지금 한국에 소속사도 있고, 그 회사 대표도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어디서 활동할 건지는 수철이 선택할 몫이야. 아무리 재능이 탐나고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

해리는 날을 세우며 강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리고 한마디 더 얹었다.

“그리고 난 한국에 있다고 해서 재능을 썩힌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미 우리가 그걸 경험하고 있잖아? 우리가 지금 여기 모여서 잔을 부딪치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이고.”

해리는 다소 철학적인 말을 하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동료는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자네 얘기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인물이 좀 더 뛰어놀 수 있는 큰 그라운드가 여기에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는 아무도 선뜻 토를 달지 않았다. 해리조차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때 다른 동료가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시간이 갈수록 수철의 영향력이 한국에서 확대된다고 해도, 이번 ‘INTERSECTION’ 앨범은 우리에게 해당 사항이 없잖아? 그곳의 기획사가 한국어 판권을 갖고 있으니까.”

그 말에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린 ABYSS만 기대할 수 있지.”“아쉽군, 그 거대한 아시아 시장이 들썩이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해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시아의 잠재력이 움직인다면 엄청난 돌풍이 일어날 게 확실하기에.

“아쉽긴 해도 그 지역은 어차피 우리는 공략할 수 없는 곳이야. 한두 번 도전해 본 것도 아니잖아?”

“…….”

모두가 말이 없었다. 해리가 넉넉한 웃음으로 동료들을 바라봤다.

“하하, 이만 잊어버려. 그건 처음부터 우리가 따 먹을 수 있는 사과가 아니었어. 그리고 수철이 영어 버전이라도 우리와 계약해 준 게 어디야? 그런 면에서 디데이 뮤직에도 감사해야지. 기꺼이 우리에게 맡겨 줬으니까 말이야. 지금 큰 수익을 안겨 주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 말에 잠시 어두웠던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해리는 잔을 내밀어 일일이 건배하고 한 모금 들이켜고는 내려놓았다.

“금별 기획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여기 런던에 있는 지사에 대해서는 좀 알지. 음악뿐만이 아니라 광고, 영화, 드라마 다 손대고 있잖아.”“그래, 그렇지. 그런데 이번에 ‘INTERSECTION’ 한국어 버전을 갖고 그 회사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어마어마해.”“어마어마하다니?”

“영향력이 말이야. 이곳의 웬만한 회사는 능가할 정도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국을 빼고는 유럽에서 그 회사와 맞붙을 만한 회사가 없어.”

그 말에 모두 잔을 든 채로 멈췄다.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해리를 봤다.

“그 정도야?”

“그래, 내 생각에는 아마 그 회사는 곧 아시아권 시장을 주름잡는 중심 플랫폼이 될 거야.”

“……!”

“생각해 봐.”

“……?”

“그런 회사가 수철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거, 뭔가 미래가 보이지 않아?”

“……!”

“게다가 거기서 수철에게 아주 특별 대우를 한다던데?”

“……!!”

* * *

으으윽.

수철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창가로 다가가 커텐을 열며 기지개를 켰다. 긴장이 돼서 깊게 잠을 자지 못했다. 방송 출연 때문이 아니라, 스킨케어, 헤어샵 등이 신경 쓰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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