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73화 (173/239)

#173화. 짓궂은 진행자

‘영국까지 와서 꽃단장하게 될 줄이야.’

수철은 피식 웃음이 났다. 입은 웃고 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고개를 저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욕실로 가서 샤워하며 잠을 깼다. 그리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가벼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려고 가까운 공원을 몇 바퀴 뛰었다. 땀을 조금 흘리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와서 수프에 빵을 찍어서 간단히 이른 아침을 먹었다.

전화가 진동했다. 레베카였다.

―잘 주무셨나요?

“네.”

―컨디션은요?

“나쁘지 않아요.”

―10분 후에 도착하니까 천천히 내려오세요.

* * *

“이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옷으로 선택하시면 돼요.”

의상실에 도착하자 직원이 준비해 놓은 의상들을 보여 줬다. 협찬이 가능한 옷 중에 선택하라는 거였다. 구두를 고르러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철은 그중에서 가장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옷과 구두를 선택하면 됐다.

레베카는 옆에서 조언만 할 뿐, 이걸 골라라, 저걸 골라라 선택을 강요하진 않았다. 수철이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수철의 기분을 맞췄다. 방송 촬영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출연자의 컨디션과 기분 관리다.

아침 일찍부터 의상실로, 구두 샵으로, 스킨케어를 받으러, 미용실로. 레베카가 안내하는 곳으로 다니다 보니, 수철은 엄마 손에 이끌려 다니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레베카는 이동 중간중간에 방송국에서 바라는 방송 기준에 관해서 간간이 설명했다. 수철이 불편하지 않은 정도로만.

“어때요?”

스킨케어를 받고 나오는 수철을 보며 복도에 앉아 있던 레베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뭐.”

긴장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또 할 생각은 없지만.

“거봐요, 해 보면 괜찮다니까요?”

레베카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며 미소를 지었다. 수철은 별다른 대꾸를 안 했다. 좋은 경험 정도로만 생각했다.

“레베카, 난 헤어스타일까지 바꿀 생각은 없어요.”

수철은 혹시 마찰이 생길까 봐 이동 중에 미리 얘기했다. 아무리 방송이라도 불편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베카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세요.”

“괜찮아요?”

“네, 제가 보기에도 지금 헤어스타일이 수철 씨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긴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시크한 눈빛도 매력적이고요.”

“…….”

“헤어 디자이너와 상의해서 손질만 조금 하세요. 원하시면 두피 케어도 받으시고요.”“머리 손질만 받을게요.”“네, 그렇게 하세요. 필요하면 방송국 분장실에서 좀 더 만지면 되니까요.”

사각사각.

헤어 디자이너의 빗과 가위가 움직이는 모습이 거울로 보였다. 수철은 그 모습을 보며 제시가 떠올랐다. 매일 이것을 반복하는 제시의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이러니까 시간만 나면 조는 거지. 코까지 골면서.

홍보 기간이라지만 얼마나 일정이 많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분방한 만큼 답답할 만도 했다.

나중에 새로운 곡을 한 곡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제시를 위로할 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 * *

휴.

드디어 방송 출연 전의 모든 준비를 마쳤다. 무사히 끝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레베카는 시간을 체크한 후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곳으로 수철을 안내했다.

“프로그램명은 지미 노튼 쇼이고, 진행자 지미는…….”

레베카는 다시 한번 오늘 방송에 관해 설명했다. 진행자 지미 노튼이 어떤 사람인지와 프로그램에 관해 얘기를.

“촬영은 이틀 동안이지만 방송은 하루에 다 해요. 1, 2부로 나눠서요. 방송 시간은 한 시간이에요. 촬영은 오늘내일 합쳐서 6시간 이상이 될 거고요.”

보통 다른 출연자들의 촬영 시간을 보면 그 정도 된다고 했다.

“방송은 전 세계에서 볼 수 있어요. 수철 씨의 얼굴이 전 세계에 노출되는 거죠.”

그간 받아야 했을 플래시 세례를 한꺼번에 다 받게 된다는 말로 들렸다. 그래도 레베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철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으니까. 매니저가 꼭 필요하다던 박 대표의 말을 새삼 실감했다.

“박 대표님께도 방송 시간을 알려 드렸고요. 그리고 출연료와 광고비 부분은 브라이언 김이 맡아서 박 대표님께 직접 보고하고 상의한다고 알고 있어요. 발생한 비용은 우리 회사와 디데이 뮤직이 별도로 정산하는 거로 알고 있고요.”

레베카는 계속해서 그동안 쌓인 수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아서,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기대하는 눈치라는 말을 했고, 이 프로그램의 시간대가 좋아서 비싼 광고가 많이 붙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원래는 코미디언 출신인데 똑똑하고 말을 잘해서 10년 동안 진행자가 바뀌지 않았어요. 물론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그렇지만요.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지미가 왕이래요.”

“왕이요?”

“프로그램이 지미의 주문대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만큼 오랫동안 했고, 여전히 시청률도 잘 나와서 가능한 얘기겠죠. 그리고 농담이겠지만 지미의 말 한마디면 피디도 목이 날아간다고 하더라고요? 호호.”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알 거 같았다.

“아, 그리고 이건 꼭 알아 두는 게 좋아요.”

“……?”

“지미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로 유명해요. 당혹스러운 질문을 잘 던지죠. 그것도 은근슬쩍이요.”

“아…….”

“그래서 출연자가 난관을 겪는 일이 많아요. 심지어 출연자가 흥분해서 촬영 도중에 나가 버리는 해프닝이 발생한 적도 있어요. 대화 중에 사생활이 들통이 나서요.”

“폭군이네요?”

“폭군?”

“피디도 자르고, 출연자도 막 대하면 폭군 아니에요?”“호호, 그러네요. 폭군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만나 보면 달라요. 재밌고 조금 짓궂은 코미디언 정도로 생각하면 돼요.”

지미의 당혹스러운 질문 때문에 예상 질문을 뽑아서 미리 답변을 준비하는 출연자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수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스타가 아니라 앨범의 작곡가로 출연하기 때문에. 게다가 수철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대단한 시비를 걸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다.

* * *

“일찍 와 있었네?”

“어, 제시. 어서 와.”

수철이 방송국에 도착해서 대기실에 있는데, 제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철이 먼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인사해, 제시. 여긴 레베카야.”

수철은 제시에게 레베카를 인사시켰다. 그러자 제시는 자신의 에이전트를 수철에게 인사시켰다. 그렇게 서로를 소개하며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스탭이 문을 두드리고는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분장실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수철은 어색했지만, 제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익숙하게 이동했다.

몇 번 스펀지를 두드리고 몇 번 브러시가 오가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서 기다리다가 스탭과 함께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쇼 프로그램 세트장에는 진행자와 출연자가 대화를 나누는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고, 등 뒤로는 런던의 야경이 보였다. 맞은편에는 카메라들이 출연자를 노려보듯이 쭉 서 있었다.

“스탭이 큐 사인을 주면 그때 이쪽으로 입장하시면 돼요.”

제시와 수철은 입장하는 동선부터 작가에게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한두 번의 리허설을 했다. 작가는 프로그램 순서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뒤늦게 도착해서 분장을 마치고 돌아온 지미가 수철과 제시와 인사를 나눴다.

그가 자리에 앉자 분장사가 다시 한번 그의 상태를 확인하며 스펀지를 두드렸고, 스탭이 분주히 움직이며 소파 위치와 마이크 상태 등을 체크했다. 지미는 BBC 로고와 프로그램 제목이 박힌 두꺼운 큐 카드(cue―card)를 훑어봤다.

촬영이 가까워지자, 지미는 자신의 테이블 앞으로 몸을 내밀고는 수철과 제시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노련한 진행자답게 수철과 제시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는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오늘 진행은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들고 있는 대본에 뭔가를 노트했다. 시청률을 끌어올릴 적당한 멘트를 적는 것 같았다.

분장사는 수시로 그의 분장 상태를 확인했다.

* * *

“안녕하세요! 지미 노튼쇼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시간이 되자 감독의 큐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와―!

짝짝짝!

지미가 테이블에 앉아서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자 방청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오늘 모실 뮤지션은 앨범 ‘ABYSS’로…….”

지미는 먼저 오늘 출연자가 얼마나 핫한 뮤지션인지를 설명했다.

“용― 수철! 제시― 프레스톤!”

자리에서 일어나며 출연자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리고 출연자가 등장하는 입구를 향해 두 팔을 쭉 벌렸다.

와―!

방청객들의 큰 환호가 시작됐다. 수철과 제시는 지미가 외치는 소리에 맞춰 입장했다. 지미는 단상에서 내려와 입장하는 수철과 제시와 반갑게 악수했다.

와―!

짝짝짝!

방청객들은 입장하는 수철과 제시를 향해 연신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라이브가 아니지만, 라이브의 분위기가 연출됐다.

수철과 제시가 소파에 앉자 지미는 큐 카드를 집어 들었다.

수철과 제시가 앉은 소파는 방청객을 향해 있었고, 지미는 왼편 테이블에 앉아 출연자를 바라봤다.

“먼저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해 주시겠어요?”

지미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철과 제시는 사전에 연습한 대로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지미가 큐 카드를 보며 자율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간략하게 앨범이 빅히트한 소감을 묻고는 수철과 제시가 어떻게 만나게 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엔 제시가 대답을 했다. 멤버 중 한 명인 영준을 먼저 알고 있었고, 호주 공연을 하면서 수철을 만났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수철의 제안으로 가사를 쓰고, 보컬로 참여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제시는 중간중간 수철과 눈을 마주치며 자신의 말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두 장의 앨범을 같이하면서…….”

지미는 계속해서 제시와 그간 두 장의 앨범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물었다. 제시는 이미 한번 출연한 적이 있기에 주로 수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예상했던 질문들을 던지며 부드럽게 인터뷰를 끌어가던 지미의 눈빛이 어느 순간 바뀌기 시작했다. 큐 카드를 만지작거리더니 묘한 미소를 보였다.

“미스터 용은 천재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몸풀기는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눈빛이었다.

“…….”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들어온 질문이라서 수철은 멈칫했다. 대답하지 못하고 지미를 쳐다봤다. 지미는 테이블에 앉은 채로 수철에게 몸을 기울였다.

“미스터 용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나요?”

레베카가 말한 날카로운 질문이란 게 이런 건가? 당혹스럽게 한다는?

이 정도면 당혹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 무례한 거였다.

순간 웅성이던 관중들이 조용해졌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지미 노튼 씨, 노튼 씨는 자신이 유능한 진행자라고 생각하세요?”

“네?”

수철의 당돌한 물음에 지미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웃음을 보였다.

“하하, 미스터 용, 그렇게 빠져나가면 안 되죠. 질문자는 저예요. 제 질문에 먼저 답해 보세요. 그럼 제가 유능한 진행자인지 아닌지 말씀드릴게요.”

지미는 말을 하면서 큐 카드에 뭔가를 적었다.

“제 답변은 여기 있어요. 미스터 용이 천재인지 아닌지 밝히면, 나도 내가 유능한 진행자인지 아닌지 밝힐게요. 바로 여기에 적힌 답변을 공개할 겁니다. 방청객들이 제 증인이에요.”

지미는 말을 하며 큐 카드를 방청석을 향해 보였다.

하하하!

카메라가 큐 카드를 클로즈업해서 잡자,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철과 제시만 큐 카드에 무슨 말을 적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미는 경험 많은 진행자답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 줄 알았고,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어서 극대화 시키는 재능이 있었다. 사람들이 괜히 그의 쇼를 보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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