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개굴개굴
수철은 방청객들이 자유분방하면서도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지미의 무례함을 즐기러 찾아온 사람들 같았다.
당신은 당신이 천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에 출연자가 어떻게 대답할지 눈빛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
와―
지미! 지미!
지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방청객을 향해 팔을 들어 빙빙 돌렸다. 한껏 들떠서 방청객의 환호에 맞춰 춤까지 췄다. 잔뜩 입이 벌어진 채로 고개를 휙 돌리며 수철과 눈을 마주쳤다.
어서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라는 뜻이었다. 수철은 지미를 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노튼 씨는 유능한 진행자가 맞는 거 같아요. 지금 방청객의 모습을 봐도 그렇고요. 하지만 저는 천재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게 제 답변이에요.”“하하, 질문이 잘못됐다는 얘긴가요?”“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천재인지 아닌지는 제가 말할 게 아니라 노튼 씨가 말해 주시는 게 맞을 거 같은데요? 저는 천재가 어떤지 기준이 없거든요. 하지만 노튼 씨는 유능한 진행자이시니까 천재를 만나 보셨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제가 천재 같은가요?”
그 말에 지미는 빙그레 웃었다. 잠시 말을 멈춘 채, 수철을 바라봤다. 노련한 진행자답게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하하. 미스터 용은 꽤 논리적이군요? 자신이 어떤지는 남의 평가다, 그래서 자신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저한테 얘기해 달라?”“네, 거울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거울로 볼 수 없다…….”
지미는 수철의 말을 한번 곱씹고는 묘한 미소를 보였다.
“역시 예술가답군요?”
머리를 끄덕이고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빠르게 전환했다. 방청석으로 시선을 옮기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천재인지 아닌지는 방청객의 판단에 맡겨 볼까요? 여러분이 미스터 용의 거울이 되어 주세요, 잠시 후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요!”
천재라는 말도, 거울이라는 단어도 지미에게는 한낱 말장난을 치는 도구에 불과했다.
짝짝짝!
수철의 생각이 무색하게 방청석에서는 지미의 말에 동의한다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미는 귀에 손을 대고 그 박수 소리를 듣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아까 적어 놓았던 큐 카드를 펼쳤다.
[난 유능한 진행자가 아니야, 하지만 영국에선 탑인 게 확실하지. 케인을 포함한 다른 진행자들은 모두 별로거든. 우웩!]
큐 카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우우우―!
짝짝짝!
그 모습을 본 방청객들은 다시 손을 빙빙 돌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그들은 지미의 광팬들 같았다.
잠시 방청객의 환호를 즐기던 지미는 고개를 돌려 수철을 봤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무례함을 퇴색시키기 시작했다.
“미스터 용의 답변은 꽤 훌륭했어요. 거울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았고요. 혹시 제 질문이 불쾌했다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쇼는 쇼일 뿐이니까요.”
“네.”
수철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런 자리라는 걸 레베카에게 미리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미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다시 방청석을 봤다.
“누구라고는 말 안 하겠지만, 가끔 제 얘기를 마음에 담아 두는 영화배우가 있어요.”
하하하!
방청객들은 지미가 누굴 말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은 스타고, 저는 일개 쇼 프로의 진행자라서 그분이 화를 내면 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 사람을 방송에 출연 못 하게 하는 것뿐이죠.”
하하하!
짝짝짝!
와―
지미! 지미!
무슨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지미의 한마디 한마디에 방청객들은 열광했다. 지미는 그들의 교주 같았다. 흐뭇한 웃음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ABYSS에 실린 곡들에 관해 여쭤볼게요.”
지미는 웃음기를 지우고 본격적으로 앨범과 음악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무례한 질문은 일종의 관문이었다. 정상적인 인터뷰로 들어가는 관문. 지미는 그렇게 사람들의 집중력을 고조시킨 후 프로그램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젊은 층이 ‘Sleepless In Island’에 유독 열광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미는 계속해서 정상적이고 쉬운 질문을 던졌다. 한바탕 무례한 분위기를 겪고 나니 지금의 질문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까와 다르게 진지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끌어갔다.
와―
하하하!
재밌는 건 방청객의 모습이었다. 지미의 장난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수철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방청객들은 수철이 진지하게 음악적인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걸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모습을 보여 줬다.
와―
짝짝짝!
수철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방청석에서는 연신 탄성과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그럼 이제, 앨범 ‘ABYSS’의 팬들이 보내온 질문을 여쭤볼게요.”
지미는 팬들이 보내온 질문도 소개했고.
저요! 저요!
즉석에서 방청객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쇼가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 * *
“지미가 수철이 진땀 빼며 당황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수철은 전혀 그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않았어.”
수철이 화장실에서 나오려는데 방송국 복도에서 얘기 소리가 들렸다. 방청객들이었다.
“난 수철이 앨범에 관해서 차분하고 친절하게 답하는 것이 좋았어. 사적인 질문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았고. 그 시크한 눈빛은 정말, 으으으.”
두 손을 쥐며 좋아서 몸서리를 쳤다. 수철은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왔다.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오자 여전히 방청객들이 남아있었다.
제시는 이미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제시를 경외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시는 인기 스타가 맞았다. 그들의 눈빛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제시의 보이시한 매력에 반해서 찾아온 젊은 여성들이었다.
수철은 촬영 전 스탭들이 그들의 환호성을 자제시키느라 바빴던 모습이 떠올랐다.
제시는 이 분위기가 익숙한 듯 그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일일이 사인을 해 줬다.
배신자들.
수철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시를 둘러싼 방청객들을 보니 그랬다.
아까는 지미의 신호에 맞춰 아바타처럼 움직이더니. 수철과 제시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이제는 돌변해서 팬임을 자처하며 수줍은 눈빛을 보내고 있다. 이중인격자들처럼. 하지만 지미의 말처럼 쇼는 쇼일 뿐이었다.
그들은 제시와 수철을 보러 온 게 맞았다. 시디를 내밀며 사인을 받는 걸 보면.
이런 사람들이 왜 아까 지미에게 그렇게 열광을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는데, 누군가 수철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저기 수철이 있다!”
“와!”
뒤늦게 수철을 발견한 사람들이 이번엔 수철에게 몰려들었다.
“아까 찾았는데 안 계셔서 간 줄 알았어요.”
화장실 갔을 때를 말하는 거 같았다.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사람들은 포즈를 취하며 같이 사진을 찍더니 바로 시디를 내밀었다. 시디에는 이미 제시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수철은 정신없이 사인을 시작했다. 이 모습을 제시가 빙그레 웃으며 보고 있었다.
“우리도 사진 한 장 찍을까요?”
방청객들이 다 빠지고 나서야 뒤늦게 지미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스탭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젊은 여자 스탭들과 작가들은 사인 요청을 하며 수철을 둘러쌌다. 스탭들 사이에선 제시보다 수철이 더 인기였다.
“수철,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지미는 가기 전에 격하게 포옹했다. 자신도 ABYSS의 팬이라며 엄지를 세웠다.
레베카는 지미가 사라진 후, 격한 포옹의 의미를 말해 줬다.
“수철 씨가 마음에 들었고, 오늘 촬영이 좋았다는 의미, 그리고 아까 무례한 건 방송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의미. 그렇게 3가지가 포함되어 있어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포옹할 때 그의 눈빛이 그랬다.
“수철,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거야?”“응, 가서 좀 쉬려고.”
“부럽다.”
“넌?”
“난 또 갈 곳이 있어.”
계속 스케줄이 있는 제시는 호텔에 가서 쉬겠다는 수철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수철은 아차 싶었다. 괜히 피곤한 티를 내서. 제시에 비하면 이제 방송 하나 한 건데.
“오늘 수고하셨어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제시는 떠나기 전에 레베카와도 인사를 나눴다. 수철은 제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제시, 잠깐만.”
“어, 왜?”
수철은 무슨 일이냐며 쳐다보는 제시에게 몸을 기울였다.
“넌 오늘이 두 번째잖아? 여기 방송 출연이.”
“그런데?”
“네가 처음 나왔을 때도 지미가 난처한 질문을 던졌었어?”“물론이지, 지미는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제시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너에겐 무슨 질문을 던졌는지 물어봐도 돼?”“이혼한 남자 중에 어느 남자를 제일 사랑했냐고.”
“뭐!”
너무 놀라서 제시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수철에게 던진 질문은 무례한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시가 당황하는 수철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안 궁금해?”“……뭐라고 했는데?”“다음에 이혼할 남자가 가장 사랑할 남자가 될 거라고 했어.”
“뭐? 하하!”
수철은 너도 대단하다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제시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왜 웃어? 사실인데.”
“…….”
수철이 멈칫하자 제시는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수철도 따라서 피식 웃었다.
“내일 연습실에서 봐.”“알았어, 내일은 방송 끝나고 다 같이 모여서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자. 오랜만에.”
“그래, 그러자.”
제시는 손을 흔들며 다음 스케줄을 향해 사라졌다.
* * *
“카메라 데뷔 무대를 마친 소감이 어때요?”
수철을 데려다주기 위해 운전대를 잡고 가던 레베카가 물었다. 수철은 긴장이 풀린 탓에 멍하니 졸린 눈으로 있다가 대답했다.
“재밌었어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한두 번 당황하는 모습은 연출됐지만, 그래도 무사히 잘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연주만 하면 되니까 오늘보단 쉬울 거예요.”
“네.”
“난처한 질문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요. 호호.”
레베카는 짧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까 그 부분은 잘 편집될 거예요. 자칫 논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논란이요?”
“네, 그런 천재 비하 같은 말은 그럴 수 있죠.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여기도 심의 규정이라는 게 있거든요.”
“아…….”
“불쾌하지 않았어요?”“음, 글쎄요. 조금 그랬던 거 같기도 해요. 불쾌보다는 불편?”
그 말에 레베카가 수철을 휙 한번 쳐다봤다.
“수철 씨는 생각보다 예민하지 않고 무덤덤하네요?”
“그런가요?”
수철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레베카는 잠시 미소를 보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꿨다.
“두 가지가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두 가지요?”
“하나는 동양인 비하 느낌을 줄 수 있고요.”
“동양인 비하?”
수철은 레베카의 말을 들으며 아까 그런 게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양인이 천재 소리를 들으며 영국 시장을 휩쓸고 있으니까 질투하는 거죠. 비하하면서요.”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음, 그렇군요. 다른 하나는 뭐예요?”“은근히 재즈를 무시하는 풍토가 있어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요.”
“그게 무슨?”
“천재가 왜 클래식을 하지 않고, 대중음악을 하냐는 거죠. 여기서는 재즈도 대중음악이니까요.”
그 말에 수철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재밌네요.”
“재밌어요?”
“그렇잖아요? 그런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말이 어딨어요? 서로 달라서 비교가 안 되는 건데.”
수철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이건 무례가 아니라 바보 아닌가?
고개를 저었다.
레베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한 거예요. 여기가 나름 엄격하거든요, 차별에 대한 시청자의 항의도 거세고요.”“네, 전 걱정 안 해요. 제시에 비하면 전 아무 일도 없었던 건데요, 뭐.”
수철은 제시의 말이 떠올라 다시 웃음이 났다. 제시가 여장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는 운전하는 내내 촬영장에서 나온 작가들의 얘기와 방청객의 반응을 들려줬다.
수철은 흥미로웠다. 덕분에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게 됐으니까. 그러면서 이 사람들의 생각을 깨는 음악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꺼내 한 줄 노트를 했다.
개굴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