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수철 씨―!
오늘은 어제보다 편하다. 스킨케어를 받지 않아도 되고 샵을 돌지 않아도 된다.
“편한 거로 입어도 된다고요?”
“네.”
“어제랑 같은 걸 입어야 방송이 연결되는 거 아닌가?”“작가가 상관없대요.”
수철은 급격히 기분이 좋아졌다. 컨디션도 급격하게 좋아졌다.
“머리도 분장실에서 세팅하면 될 거 같아요.”
오늘은 편하게 연주 한번 하고 오면 되는 거였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 * *
“한 번만 맞춰 보고 점심 먹으러 가자.”
“오케이.”
오늘은 공연을 해야 하기에 촬영 전에 만나서 합주를 했다. 같이 연주해 본 지가 오래돼서 한번은 맞춰 봐야 했다.
“역시 우리는 원팀이 맞아.”
예상대로 음악은 한 번만에 척척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다니니까 옛날 공연할 때 생각난다.”“맞아, 브라이튼(Brighton)에서 파티할 때도 생각나고, 한국에서 녹음할 때도 생각나.”“하하, 재밌었지. 한국 음식들 너무 그립다.”
옛날얘기를 하며 걷던 알베르토가 수철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수철, 영국에 온 김에 아예 눌러앉는 게 어때? 영준처럼 말이야. 이렇게 멤버들 다 모여서 같이 지내면 좋잖아? 공연도 자주 하고.”
“좋은 생각이야!”
알베르토의 말에 다들 좋은 생각이라며 농담 삼아 거들었다. 하지만 영준이 형은 침묵을 지켰다. 수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내가 하나의 밴드에 묶여 있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 안 해?”
수철이 빙그레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모두의 표정이 돌변했다.
“뭐?”
“하하! 수철, 너 좀 바뀐 거 같다?”“맞아, 방송 한번 출연하더니 뻔뻔해졌는데? 하하.”
수철은 오랜만에 멤버들이랑 다 같이 있으니까 마음이 든든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 * *
―분장실로 이동하실게요.
어제와 같은 순서를 밟으면서 방송 준비가 시작됐다.
―감독님, 카메라 위치 조정 좀 할게요.
―네, 좋습니다, 조명도 체크해 주세요.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어제와 많이 달랐다. 무대 세팅도 달라졌고, 조명과 카메라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생동감이 넘쳤다.
“어서들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미의 모습도 어제와는 달랐다. 멤버들이 모두 출연했지만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짧은 대화만 던질 뿐, 특별한 코멘트 없이 관객처럼 음악을 즐겼다.
“드럼 시작하는 부분부터 다시 한번 찍을게요.”
촬영 시간도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세팅하고 리허설하는 시간이 길었지, 실제로 연주는 두 번씩 하고 끝났다. 구경 온 관객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서 피디의 허락하에 앙코르 곡을 한 곡 더했다.
원래는 ‘Film music without film’과 ‘Sleepless In Island’ 두 곡을 하기로 했었지만, 결국 ‘Two People In London’까지 하면서 앨범에 실린 세 곡을 다 하게 됐다.
한 곡 더!
한 곡 더!
세 곡을 다 했음에도 관객들은 강력하게 한 곡 더를 외쳤다. 촬영장에서 공연장의 분위기가 연출됐다. 앨범 ‘ABYSS’의 찐팬들이 방청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그렇게 하세요.”
결국 피디는 난감한 웃음을 보이며 오케이 사인을 줬다. 촬영장에서 열성적인 방청객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시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영화 없는 영화음악이 그녀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Suppose you don’t have ears―! ……It’s Like a Film Music Without Film―!”
제시의 노래가 시작되자 남자 방청객들은 눈을 감고 음미했고, 여자 방청객들은 눈을 반짝이며 피아노 치는 수철의 모습을 지켜봤다.
* * *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자, 마시자!”
방송이 끝나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긴장을 풀고 편한 모습으로 저녁 식사와 술을 즐기기 시작했다. 제시는 이 시간을 위해 내일 오전 일정을 모두 비워 놨다.
“CHEERS!”
지금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잔에 샴페인을 채워서 내밀었다. 완전체가 된 멤버들은 다 같이 잔을 부딪쳤다.
수철이 영국에 온 이후 다 같이 모여서 술자리를 갖는 건 처음이다.
“하하, 진짜?”
“그래, 그랬다니까? 하하.”
멤버들은 그동안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수철에게 꺼내 놨다. 덕분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네 시간 후에 다시 올게요. 필요하면 한 시간 정도는 더 써도 괜찮아요.”
레베카는 수철이 오랜만에 멤버들과 다 같이 어울리는 만큼 시간을 넉넉하게 쓰게 했다. 4시간 후에 오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내일도 일정이 있지만 멤버들이 다 같이 가는 자리여서 서로 부담이 없었다. ECM 프로모션에 가서 작은 공연을 하나 하면 된다. 물론 수철은 남아서 사인회에 참석해야 하지만.
수철보다 오히려 제시가 더 할 일이 많다. 제시는 그다음 날도 프로젝트팀과 ‘INTERSECTION’ 앨범의 공연을 해야 하고, 사인회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제시는 복잡한 걸 잊고 이 시간을 더 즐기고 싶어 했다.
“CHEERS!”
* * *
“왔어?”
“응.”
“컨디션은?”
샘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수철이 물었다.
“괜찮아.”
샘은 괜찮다며 미소를 보였지만 얼굴엔 어제 꽤 많이 마신 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거 마시면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
수철은 샘에게 따뜻한 밀크티를 내밀었다. 샘은 드럼을 쳐야 하기에 수철은 샘의 컨디션을 살폈다.
“아, 좋다.”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샘이 몸을 떨었다. 이제야 술이 좀 깬다며 수철을 봤다.
“드럼 좀 두드리다 보면 다 깰 거야. 이 맛에 연주하는 거지 뭐. 하하.”
“뭐? 하하.”
원래 드럼은 술이 좀 덜 깼을 때 필이 잘 나온다며 샘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드럼을 두드려서 땀을 좀 흘리고 나면 술이 다 깬다고 했다.
“그렇게 술이 다 깨면 끝나고 또 한잔하고, 다음날 또 드럼 두드리면서 깨고. 그게 드러머의 삶이자, 예술가의 삶 아니겠어? 하하.”
“하하.”
수철은 샘의 궤변에 따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오셨으면 10분 후에 시작할게요.
ECM 프로모션은 작은 공연장에서 진행됐다. 특별 이벤트에 당선된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왔다. 공연은 앙코르를 포함해서 짧게 다섯 곡을 했다.
“오빠들은 여자 친구 있어요?”
공연 후에는 팬들이 질문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한 장씩만 받아 가세요.”
팬들은 공연장을 나가면서 팀의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한 장씩 받아 갔다. 이로써 멤버들의 공식적인 프로모션 행사는 끝이 났다.
“먼저 갈게, 프랑스 잘 갔다 오고, 와서 바로 연락해!”“그래, 알았어. 전화할게. 잘 가.”
멤버들은 공연이 끝나고 모두 돌아갔다.
“우리도 갈까요?”
“네.”
수철은 멤버들을 배웅하고 레베카와 사인회장으로 이동했다. 멤버들은 이미 사인회를 했기 때문에 같이 갈 필요가 없었다.
“수철 씨, 어서 오세요.”
사인회장은 맥이 나와 있었다. 해리를 포함한 다른 간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줄을 서서 사인을 받겠다고 농담을 던지던 간부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힘드시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라고 했지만, 사인회는 힘든 일이었다. 꼬박 3시간을 앉아서 사인만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주최 측에서 시간에 제한을 둬서 일찍 끝난 거였다.
“팔 아프죠?”
레베카는 팔목을 주무르는 수철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에요, 이 정도는 뭐.”
난이도로 따지면 이번 일정 중에 사인회가 가장 힘들었다.
* * *
프랑스로 가는 건 기차를 타는 것도 좋고, 페리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는 것도 좋다고 들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가까워도 프랑스에 도착해서 칸을 가는 것이 멀었다. 칸은 프랑스의 남부 아래쪽 끝에 있었다. 그래서 런던에서 니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수철 씨의 연주가 ‘물’이었다고 하는군요. 호호.”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레베카가 웃음소리를 내며 수철을 봤다.
“물이요?”
수철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베카는 대답 대신 로컬 신문을 내밀었다.
“BBC 공연 때 방청객으로 참여한 사람이 쓴 글이에요. 지역 신문이지만 이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많이 실려요. 거짓 없이 솔직한 평들이 많아서 관계자들도 많이 보죠.”
레베카가 내민 신문에는 수철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름 평론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BBC 촬영장을 찾아서 공연을 본 소감이었다.
[그의 연주를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물’이었다. 처음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로 시작해서 중반으로 갈수록 바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쏴아악!
모래사장을 덮친 물은 잠시 잠잠해지는 듯하더니 방향을 틀어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마치 연어처럼. 그리고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기사를 본 수철은 피식 웃었다. 뭔가 그럴듯하면서도 알맹이가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아쉽죠?”
수철이 웃는 이유를 아는 레베카가 먼저 물었다. 레베카의 눈빛이 아마추어라서 그렇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은 평이 아니라 그냥 그럴듯한 말 같아요. 어디에다 붙여도 다 될 거 같은. ‘레베카는 ‘물’ 같았다. 레베카는 처음엔 졸졸 흐르는 시냇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봐요, 어울리잖아요? 하하.”
“호호. 그러네요.”
수철이 레베카 이름을 갖다 붙이며 예를 들자 레베카도 크게 웃었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요? 정규 잡지에서는 이런 글을 못 보거든요.”“그렇긴 하겠네요.”
“그리고 그거 모르죠?”
“뭘요?”
“이 사람, 엄청 유명한 사람이에요. 로컬의 숨은 고수라고 소문나서 팬도 많아요.”
“아, 그래요?”
“네, 그러니까 이렇게 크게 지면을 활용해서 기사를 싣죠. 음악 관련한 프로그램은 방청객으로 다 참여해서 기사를 써요. 그래서 방송이 나가기도 전에 기사를 올리기도 하고요.”
그 말에 수철은 갸웃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방송 전에 내용이 노출되면 안 되잖아요?”
“그 반대예요.”
“반대?”
“방송사에서는 프로그램 홍보 차원에서 오히려 부추기는 편이에요. 그리고 이분은 내용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뭔가 사람들을 기대하게 하는 글을 잘 쓰거든요.”
“아…….”
공생 공존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각 언론사에서 이분의 평을 활용하기도 하고 음악가들도 쇼케이스에 이분을 많이 초대해요. 돈을 받고 기사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팬들이 꽤 많아서 이분의 글 하나에 음반 매출이 영향을 받거든요.”“와, 그 정도예요? 대단하신 분 맞네요?”
음반 매출에 영향을 줄 정도의 사람이라니,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레베카의 말대로 숨은 고수가 맞았다.
레베카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문 방청객이자 프로와 아마추어를 오가는 평론가라고 할 수 있어요. 앞으로 방송이 나가고 BBC에서 수철 씨의 연주가 거론될 때마다 ‘물’ 같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할 거예요. 호호.”“하하, 그런가요? 한국에서 ‘물’ 같다는 표현은 별로 실력이 없다는 뜻인데.”
“리얼리?”
* * *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니스 코트다쥐르 공항까지는 두 시간 남짓 걸렸다. 호주에서 영국까지 장거리 비행을 하다 보니 두 시간 비행쯤은 가뿐했다. 고속버스를 타다가 마을버스를 타는 기분이었다.
ECM은 프랑스에서의 프로모션을 제안했고, 금별기획에서는 라디오 출연을 거론했지만, 수철은 박 대표와 상의해서 시간을 편하게 쓰겠다고 했다. 처음 가 보는 나라인 만큼 시간을 만들어서 여행도 하고 싶었다.
“지사 담당자에게 얘기해 놨어. 거기 상황을 보며 그때그때 유동성 있게 일정을 조절하라고. 레베카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네, 감사해요.”
“그리고 스케줄이 생기면 나한테 얘기하지 말고, 금별과 먼저 상의해. 그게 빠를 거야.”
“네, 알겠어요.”
수철은 영국에서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니스 코트다쥐르공항에서 렌트한 차를 타고 칸으로 향했다.
“필립 윤 감독님은 미국 교포 사회에서는 스타세요.”
“아, 그래요?”
“네,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그래서 전 수철 씨가 감독님 영화에 주제곡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기뻤어요.”
미국에서 온 레베카는 필립 윤을 잘 알고 있었다. 왠지 레베카가 프랑스 일정에도 기분 좋게 따라온 이유 중엔 필립 윤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도 있는 것 같았다.
* * *
“수철 씨―!”
수철이 칸에 도착하자 멀리서 필립 윤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오셔도 되는데. 하하.
수철은 필립 윤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반가웠다. 하지만 그전에 웃음부터 났다. 필립 윤의 모습이 백자의 눈물에 나오는 도자기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길어서 묶은 꽁지머리에 옛날 선비처럼 길게 기른 수염, 그리고 개량 한복까지. 영락없는 영화 속 도자기공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