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76화 (176/239)

#176화. 팝페라 가수

“하하, 감독님! 왜 이렇게 뛰어다니세요? 힘드시게.”“수철 씨가 반가워서 그렇죠, 하하!”

수철은 필립 윤과 포옹하며 잠시 반가움을 나눴다. 필립 윤은 그동안 몇몇 영화제에서 상을 탄 덕분인지 영화를 만들던 때에 비해 얼굴이 환했다.

필립 감독을 보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레베카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는 레베카 리예요. 한국 이름은 이윤서이고요.”

한국 이름이 있었어?

수철은 레베카를 힐끗 쳐다봤다.

“정말 영광이에요!”

레베카는 마치 스타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팬이라며 얼굴이 발개질 정도였다.

수철은 레베카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BBC를 갔을 때도 덤덤하게 일만 했고, 수철을 만났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까진 전문적인 커리어 우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오랫동안 에이전트를 해서 유명인들을 만나도 저러지 않았었는데. 그만큼 필립 윤이 미국 교포 사회에서 대단하다는 얘기겠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감독님 팬이었어요.”

레베카는 잠시 에이전트는 내려놓고 소녀 팬으로 돌아갔다. 필립 윤과 대화하는 내내 존경을 표하며 눈에선 하트가 쏟아졌다.

* * *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는 매년 5월 프랑스 남부에 있는 칸에서 열리는 영화제다. 국제 영화제의 메카라 불리며, 거대한 필름 마켓을 자랑한다. 베를린 영화제, 베네치아 영화제와 함께 일명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지만 그중에서도 칸 영화제의 위상은 다른 영화제보다 훨씬 높다. 인지도도 그렇고.

“시원한 거 한잔 마실까요?”

필립 윤을 따라서 노천카페로 향했다. 길을 걷는데, 언뜻 봐도 평범하지 않은 외모의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게 눈에 띄었다. 하나같이 배우 아니면 감독으로 보였다.

“나도 음악 감독과 배우들이랑 같이 왔어요.”

수철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자 필립 윤이 어깨를 붙였다.

“아, 그러시군요. 그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인터뷰가 있어서 거기에 갔어요. 난 수철 씨 만나려고 여기에 왔고요.”“감독님은 인터뷰 안 하세요?”“난 이미 많이 했어요. 앞으로도 계속해야 되지만요.”

필립 윤은 영화가 잘되고 있는 탓에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한국에서 볼 때와 달리 얼굴엔 혈색이 돌았다.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 참고로 여기는 과일 주스가 신선하고 맛있어요.”

필립 감독을 따라서 노천카페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카페 곳곳에는 영화제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칸은 다른 영화제에 비해 보수적이에요. 작품성에 대한 권위는 세계에서 가장 높게 쳐주지만 말이에요.”

필립 윤은 시원하게 과일 주스를 쭉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서 여기가 의상 같은 것에도 엄격해요. 남성들은 반드시 정장에 보타이를 매야 하고, 여성들은 이브닝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하이힐을 신어야 해요.”

“아…….”

“그런데 자기 나라의 전통 의상은 또 허용이 돼요. 그래서 난 일찌감치 개량 한복을 준비한 거예요. 영화도 알리고 한국의 문화도 알릴 겸해서요.”

필립 윤의 복장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수철은 빙긋 웃으며 입을 뗐다.

“감독님 지금 모습이 영화에 나오는 ‘개석’ 같아요. 하하.”“오! 그렇다면 성공했네요? 맞아요, 개석 코스프레한 거예요. 하하.”

필립 윤은 수철의 예측이 맞았다며 껄껄 웃었다.

“하하.”

수철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둘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필립 윤의 복장과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지나갔다.

“수철 씨.”

“네.”

“봉주르(Bonjour) 와 ‘메르시(Merci)가 무슨 말인지 알아요?”“봉주르는 알겠는데 메르시는 모르겠어요.”“메르시는 프랑스어로 감사하다는 말이에요.”“아, 그렇군요. 메르시.”

수철은 메르시를 읊조리며 끄덕였다.

“여기서 이 두 개는 할 줄 알아야 해요. 무대에서는 프랑스어로 인사말을 해야 하거든요, 여기가 은근히 엄격한 규칙이 많아요. 뭐, 그러기로 유명하다고 소문은 났지만 나도 이번에 처음 접해 봤는데,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꽤 있어요.”

필립 윤은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몇 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뭔가 또 자랑거리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백자의 눈물’ 사운드트랙이 레드카펫 주제가와 함께 나올 거에요. 하하.”

레드카펫 주제가는 카미유 생상이란 작곡가의 ‘동물의 사육제 7악장, 수족관’이라는 곡이다. 필립 윤의 말은 그 곡과 수철이 만든 사운드 트랙이 함께 나온다는 뜻이었다.

“하하, 정말 즐겁고 기쁜 일이에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지만, 소식을 전하는 필립 윤의 얼굴을 보면 상징적 의미가 큰 것 같았다.

수철은 필립 윤이 웃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경쟁 부문과 비경쟁 부문은 뭐가 다른 거예요?”

그동안 궁금하던 거였다.

“비경쟁 부문과 경쟁 부문이 큰 차이는 없어요. 상을 놓고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 빼고는요. 비경쟁 부문은 말 그대로 경쟁을 하지 않거든요. 그것 말고는 다른 건 다 똑같아요. 비경쟁 부문도 경쟁 부문이랑 똑같이 뤼미에르 극장에서 상영하고, 시사회도 하고 다 해요.”

만약 수철이 음악상을 받게 된다면 칸에서는 수철만 상을 받는 해프닝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비경쟁 부문은 보통 그동안 나오지 않은 신선한 영화나, 젊은 감독의 특이한 시선으로 주목받는 영화, 그리고 SF나 판타지 같은 장르 영화가 주로 초청을 받아요. 비경쟁 부분에 초청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를 누리죠. 영화제뿐만이 아니라 여기가 자체적인 필름마켓(Marché du film)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거든요.”

비경쟁 부문이 경쟁 부문에 비해서 격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수철의 질문에 답을 마친 필립 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백자의 눈물이 화제의 중심에 섰어요. 벌써 몇 군데서 개봉하겠다고 러브콜(love call)도 받았고요. 하하.”

기쁜 소식이었다.

“와, 축하드려요. 감독님.”

필립 윤은 계속해서 기쁜 소식을 전했다. 다음 작품을 전폭적으로 밀어주겠다는 투자사도 생겼고,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스탭들도 늘어났다고 했다. 수철도 기뻤고, 레베카도 옆에서 연신 미소를 머금었다.

“수철 씨는 칸에서 일정이 어떻게 돼요?”

자신의 얘기를 마친 필립 윤이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려놓으며 수철과 눈을 마주쳤다.

“전 좀 편하게 있다가 가려고요.”

“편하게?”

“인터뷰도 있고, 라디오 출연 요청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여기 왔으니까 영화를 좀 많이 보려고요. 물론, 백자의 눈물을 제일 먼저 봐야죠. 그리고 친구들이 여기서 공연하거든요.”

“아, 그래요?”

“네, 그래서 친구들이랑 좀 어울리려고요. 같이 여행도 하고요.”“하하. 좋은 계획이군요. 부럽네요, 친구들과 여행이라니.”“시간이 되면 혼자서도 여행을 좀 하고 싶어요.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요. 프랑스에 포도 농장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온 김에 그런 곳도 좀 가 보고 싶어요.”

수철은 소풍을 떠나는 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얘기했다. 필립 윤은 수철의 얘기를 들으며 계속 미소를 띠었다.

“아마, 여기 칸에서 수철 씨가 가장 여유로운 사람일 거예요.”

“제가요?”

수철이 눈을 크게 뜨자 필립 윤이 주위를 둘러봤다.

“봐요, 여기 사람들이 한가하면서도 분주해 보이지 않나요?”

필립 윤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영화에 대해 논쟁을 펼치는 사람들이 보였고, 계약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사람도 보였다. 필립 윤이 수철에게 여유롭다고 말한 뜻을 알 것 같았다.

“영화제가 축제 같으면서도 치열한 곳이죠. 영화를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지만, 막상 보면 다 저마다의 욕망을 갖고 있거든요. 이권과 흥행이 걸려 있으니까요.”

“아…….”

여유로워야 하는 곳이 그렇지 못하다는 말로 들렸다. 필립 윤이 수철을 보며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 어쨌든 수철 씨가 맞아요.”

“……?”

“예술가는 시간에 쫓기면 안 되죠. 시간의 지배자가 돼야죠. 그런 면에서 수철 씨는 예술가가 확실해요. 하하.”

괜히 멋쩍어졌다. 바쁜 사람 앞에 놓고 너무 한가한 얘기를 한 건 아닌지.

필립 윤은 수철을 보며 한참 미소를 머금었다. 부러운 눈치로.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 참. 수철 씨. 아무래도 이 얘기를 먼저 해야겠어요. 수철 씨가 다른 스케줄을 잡기 전에요.”

“……?”

“지금 수철 씨를 만나려고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저를요? 누가요?”

“사라 제이요.”

사라 제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는 필립 윤도 갸웃했다. 수철이 당연히 알 거라 생각하고 말했는데 모른다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와! 사라 제이!

수철 대신 옆에서 레베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탄성을 냈다. 사라 제이가 수철을 만나려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눈이 커져 있었다.

필립 윤이 수철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진짜 사라 제이를 몰라요?”“네, 저는 잘…….”

“음, 그렇군요. 레베카는 잘 아는 것 같은데?”

필립 윤이 레베카를 바라보자 레베카는 크게 끄덕였다.

“네, 저는 잘 알아요. 예전에 오페라 관련 일도 했었거든요.”“아, 그렇다면 레베카는 사라 제이를 모를 수 없겠네요. 레베카가 수철에게 설명을 좀 해 주시겠어요? 나보다 더 잘 알 거 같은데.”

“그래도 될까요?”

“네, 부탁해요.”

필립 윤의 손짓에 레베카는 멀뚱히 앉아 있는 수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라 제이는 클래식 크로스오버 소프라노이자 팝페라 가수예요. 무엇보다 오페라의 유령의 주연으로 유명하신 분이죠.”“아, 오페라의 유령.”

수철은 언뜻 오페라의 유령에서 누군가가 두 팔을 벌리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TV에서 공연 홍보 영상을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그중에 사라 제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오페라의 유령은 알고 있다.

“듀엣도 많이 하고, 프로젝트도 많이 해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하나만 꼽자면 안드레아 보첼리와 듀엣을 한 것이 유명해요. 그 곡이 빅 히트를 쳤거든요.”

그 말에 수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 제이는 몰라도 안드레아 보첼리는 안다.

“수철 씨는 클래식과 팝페라 쪽은 잘 모르시나요?”

설명을 마친 레베카가 수철을 보며 물었다. 수철은 끄덕였다.

“네, 음악은 접해 봤지만 누가 만들었고, 누가 노래를 불렀는지는 잘 몰라요.”

작곡가에겐 음악이 중요하지, 누가 만들었고 누가 불렀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잘 찾아보지도 않는다.

레베카의 설명을 들은 수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필립 윤을 봤다.

“근데 그분이 절 왜?”

사라 제이가 왜 만나고 싶어 하냐고 물었다.

필립 윤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베를린 영화제에서부터…….”

사라 제이는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 공연을 왔다가 백자의 눈물을 처음 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 오고 있다고, 퉁소로 연주하는 멜로디에 푹 빠졌다고 했다.

“자신이 ‘백자의 눈물’ 주제곡을 꼭 부르고 싶다고 해요. 진심으로 하고 싶다는 열성이 강해요.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요.”

“…….”

수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레베카가 눈을 반짝였다. 수철이 어떻게 말할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수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거죠?”“맞아요. 아무래도 팝페라 가수니까 편곡해서 자신의 분위기를 내고 싶다는 거죠.”“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수철은 퉁소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서 팝페라로 부르면 어떤 느낌일까 잠시 생각했다. 필립 윤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판단에 도움이 되라는 눈빛으로.

“메일도 보내고, 전화도 자주 왔어요. 수철 씨가 칸에 온다는 소식에 바로 달려오겠다고 하고요.”

필립 윤이 칸에 오고 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이 온다고 했다. 수철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이 꼭 그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계속 어필한다고.

“아, 그리고 제시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에 군인으로 참전했었대요. 그 얘기까지 꺼내며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더라고요. 자신이 퉁소 멜로디를 유러피언(European)의 감성으로 풀어보고 싶다고요.”

말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이 멜로디를 부르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가 내일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회사랑 먼저 통화를 해 봐야 할 거 같아요.”“네, 그렇게 해요. 수철 씨가 결정하면 만남을 바로 주선할게요.”

* * *

―사라 제이?! 진짜?

박 대표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사라 제이가 정말로 주제곡을 부르고 싶다고 한 거야?

박 대표는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철은 얼마나 대단한 가수길래 레베카에 이어 박 대표까지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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