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77화 (177/239)

#177화. 가사는 감독님이

“네, 필립 감독님께 그렇게 들었어요. 쌤도 그 가수를 잘 아시나 봐요?”―모를 수가 없지! 앨범을 그렇게 많이 팔았는데. 정말 엄청난 가수야.

박 대표는 탄성을 내뱉었다.

쌤이 저렇게 극찬한 가수가 있었나?

수철은 그동안 박 대표가 칭찬했던 가수들을 떠올려 봤다. 처음인 것 같았다.

―오페라의 유령 몰라?

“얘기 들었어요, 거기서 주인공을 했다고요.”―주인공도 했지만, 그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사운드트랙 부른 사람이야. 아마 그 앨범이 몇천만 장 팔렸을걸?

“몇천만 장이요?”

어떻게 이런 가수를 몰랐었지?

수철은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필립 윤과 레베카가 의아하게 생각할 만했다.

―앨범도 앨범이지만 노래를 정말 잘하는 가수야. 그런 사람이 네가 만든 음악에 러브콜을 보냈다는 건 진짜 기뻐할 만한 일이야. 어떻게 보면 바람직한 일이고.

“바람직이요?”

―사라 제시가 네 음악을 제대로 알아봤다는 얘기니까.

“…….”

―그 사람 노래, 한 번도 안 들어 봤지?

“네, 저는 기억이…….”―한번 찾아서 들어 봐, 사라는 사람의 감성을 건드려서 눈물샘을 자극하기로 유명한 가수거든. 백자의 눈물에서 퉁소의 애잔함이 주는 감성을 사라의 목소리로 풀어내면, 아마 사람들이 눈물 좀 짜게 될 거야.

수철은 사라가 어떤 보이스를 가진 가수인지 대충 알 거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쌤과 상의하고 결정하려고 전화드린 거예요.”―그쪽에서 먼저 그렇게 제안을 했으면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음악도 음악이지만, 필립 윤 감독의 영화에도 큰 도움이 될 거 같고.

수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음악을 새로 편곡할 필요도 없고, 가수에게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주제곡을 부르고 앨범까지 낸다면 영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만나기 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음, 우선 거기서 벌어지는 일은 레베카에게 다 맡겨. 레베카가 그쪽으로 유능한 에이전트니까 사람들 만날 때도 레베카와 같이 만나고, 계약과 관련한 것은 레베카에게 다 전임해도 돼.

“네, 그럴게요.”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일정도 우선은 레베카가 다 알아서 짜게 해. 여기저기 허락받고 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레베카가 먼저 짜고, 나중에 보고받으면 돼. 내가 따로 레베카에게 전화해 놓을게.

“네, 알겠어요.”

―그리고 너와 사라 제이가 같이하기로 결정하면, 그다음은 사라의 매너지먼트사와 디데이 뮤직이 진행하면 돼. 저작권과 앞으로 벌어질 계약 문제는 말이야.

“네.”

―그 부분은 내가 따로 자세히 설명해 줄게.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쌤이 알아서 해 주세요.”―그래, 알았어. 나중에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면 물어봐. 그때 설명해 줄게.

“네, 알았어요. 그럼 저는 그 팝페라 가수 만나서 생각하는 대로 얘기하면 되는 거죠?”―그래, 그러면 돼.

* * *

“감독님, 여기요!”

수철이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흔들었다. 차에서 내린 필립 윤이 수철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저도 방금 내려왔어요.”

그 말에 필립 윤은 한두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호텔을 올려다봤다.

“와, 수철 씨는 특급 귀빈이군요? 이런 데서 머문다니, 역시 회사가 수철 씨를 잘 캐어하는군요.”

필립 윤은 부러움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수철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피곤하신데 내일 만날 걸 그랬나 봐요?”

어제 나눈 얘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필립 윤에게 전화했었다. 수철은 필립 윤이 머무는 숙소로 가려고 했는데, 필립 윤이 이쪽으로 오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아니에요, 내일도 아침밖에 시간이 안 돼요. 오후부터 줄곧 일정이 있거든요.”

필립 윤은 바쁜 사람이었다. 수철은 필립 윤이 칸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란 걸 깜빡했었다.

“이렇게 수철 씨랑 일찍 만나서 아침도 먹고, 산책도 하면 좋죠. 난 이런 거 좋아해요.”

그 말에 수철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저도 좋아요. 어서 가요, 감독님.”

둘은 호텔을 벗어나 잠시 걸었다. 일찍 문을 연 카페가 있나 찾기 위해서다.

“프랑스식 아침 먹어 봤어요?”“아니요, 근데 별거 없다고 들었는데요?”

그냥 빵에 잼 발라서 먹는 게 전부라고 레베카에게 들었다. 그리고 커피에 과일 몇 조각.

“맞아요, 별거 없어요. 그런데 한가지 특징이 있어요.”

“특징이요?”

“여기 사람들은 아침에 짠 거를 안 먹어요.”“아, 그건 몰랐네요.”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닌데도 아침이라서 그런지 새삼 그런 얘기가 신기하게 들렸다.

“짠 거를 안 먹는다는 건 베이컨, 햄, 치즈. 이런 걸 안 먹는다는 거예요.”“그럼 별로 먹을 게 없을 거 같은데요?”

수철은 흔히 외국인들이 먹는 블랙퍼스트에서 프랑스인들은 많이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함을 좋아하는 프랑스인은 아침 식사도 독특, 아니, 밋밋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의 물음에 필립 윤은 슬그머니 미소를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삶은 달걀이나 잼 바른 와플 같은 거 먹어야 해요, 커피와 함께.”“네, 저는 괜찮아요. 감독님만 좋으시다면요.”“그래요, 그럼 그 집으로 갑시다. 바로 저기 길 건너편이에요.”

필립 윤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는 앞장서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특별히 갈 데가 없어서 며칠째 같은 곳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고 덧붙였다.

“회사 대표님이랑은 상의를 해 봤어요?”

시간이 넉넉지 않은 필립은 잼을 발라 빵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바로 용건을 물었다.

“네, 대표님도 감독님이랑 같은 생각이세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보라고요.”“아, 그거 잘됐네요. 사라가 좋아하겠어요.”

필립 윤은 흐뭇한 얼굴로 수철을 바라봤다. 기분이 좋은지 커피잔을 들어 코 밑에서 빙빙 돌리며 향을 맡았다.

“그런데 감독님께 부탁이 있어요.”“저한테요? 무슨 부탁이요?”“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주세요.”“가사를 붙이라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필립 윤은 빵에 잼을 발라서 꾹꾹 누르며 수철을 봤다, 수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라 제시가 부를 노래에 감독님이 가사를 써 주셨으면 해요.”

“네? 뭐라고요?”

그제야 필립 윤은 동작을 멈춘 채 수철을 빤히 바라봤다.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그게 무슨…….”

장난인지 장난이 아닌지 의심하며,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수철은 어제 밤새 사라 제시의 앨범을 찾아서 음악을 들었다. 박 대표의 말대로 그녀의 노래는 훌륭했다. 사람들을 의식하며 노래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소리를 들려주는 가수였다. 수철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풍부한 성량에 정확한 발음, 그리고 선명한 소리.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최고의 가수였다. 그리고 수철의 마음을 끈 결정적인 한 가지.

선한 영향력.

그녀는 인품도 훌륭했다. 약자를 위한 노래를 많이 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을 후원하고 돕고 있었다. 노래가 주는 메시지와 삶이 일치하는 그런 사람. 수철은 그런 사람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미리 알았으면 먼저 불러 달라고 요청했을 것도 같았다. 그녀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선한 아티스트였다.

그렇다면.

수철은 한 가지를 더 결정했다. 처음엔 사라가 직접 가사를 쓰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자꾸 사라보다는 필립 윤이 쓰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쓴 필립 윤이 직접 가사를 쓰면 사라 제이가 그 감성을 잘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은 필립 윤이 얼마나 고민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는지 알고 있다. 백자의 눈물을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 놓기 위해 단어 하나에도 많은 고심을 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감독님, 사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조건이에요.”

“조건이요?”

“사라 제이가 노래를 부르느냐 아니냐는 감독님께 달렸어요. 감독님이 관문인 셈이죠.”“햐, 수철 씨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런.”

필립 윤은 말문이 막혀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가사는 사라가 쓰든지 수철 씨가 써야지. 나한테 쓰라고 밀어붙인다고 써지나요?”“이 이야기를 만든 건 감독님이시잖아요? 그러면 가사도 감독님이 쓰셔야죠. 가사도 스토리텔링이니까요.”

“허허…….”

필립 윤은 실소를 내뱉으며 수철을 빤히 바라봤다. 수철이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내가 가사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

“확신하네요?”

“백 퍼센트요.”

“음.”

“도전해 보세요. 감독님은 할 수 있어요.”

필립 윤은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뒷목을 잡았다.

“아이고야, 이런. 큰일 났네.”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바쁜데 가사까지 쓰라고 강요한다며 연기를 했다. 수철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감독님과 저작권을 공유하고 싶어요.”

“저작권이요?”

저작권이라는 말에 젖혔던 몸을 휙 하니 세웠다.

“작사료 말이에요. 아마 엄청날걸요? 사라가 그렇게 유명하다면 작사료가 아마 어마어마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감독님이 앞으로 영화 제작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진짜요?

말은 안 했지만, 필립 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차마 묻지는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

수철은 영화를 통해서 음악의 인기가 커진 것이니 저작권을 공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박 대표도 수철이 생각을 전했을 때 좋은 생각이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수철은 칸에서 백자의 눈물로 하나가 되는 그림을 그렸다. 작사는 필립이, 음악은 수철이, 노래는 사라가.

수철은 멍하게 쳐다보고만 있는 필립 윤을 재촉했다.

“사라 제이와 약속을 잡아 주시면 제가 만나서 설명할게요. 가사랑 음악에 대해서요. 아니면, 가사는 감독님이 직접 하실래요?”“아, 아니에요. 수철 씨가 하는 게 좋겠어요.”

필립 윤은 얼떨결에 하겠다고 승낙을 해 버렸다. 수철이 피식 웃었다.

“네, 그럼 약속 잡아 주세요.”

필립 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만요.”

수철과 눈을 마주치고는 버튼을 눌러서 귀 옆에 붙이며 뒤돌아섰다.

“안녕하세요. 사라. 필립 윤이에요.”―네, 감독님!

길지 않은 통화가 이어졌다.

수철은 고개를 들어서 잠시 칸의 아침 하늘을 감상했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네, 이따 봬요.”

필립 윤이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왔다.

“……?”

“지금 바로 출발한대요.”

“하하, 지금이요?”

“오늘 저녁때 만나겠다는 거죠. 수철 씨의 말을 전하니까 바로 출발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하하.”

“정말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하하.”

필립 윤은 다시 한번 사라의 열정을 높게 샀다. 열정이라면 만만치 않은 필립 윤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오는 거예요?”“영국에서요. 사라는 영국 사람이에요.”“아, 영국 사람이군요.”

미리 알았으면 영국에서 만났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약속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필립 윤은 자신의 일정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저녁 시간을 내서 자리를 만들었다. 영화와도 관련된 일이지만, 이젠 가사까지 쓰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앞장서서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했다.

“저기 오네요.”

수철은 필립 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빨간 투피스를 입은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큰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드디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등장하는군.

수철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필립 윤이 말하지 않았어도, 자료를 찾아보다가 사진을 보지 않았어도, 수철은 그녀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밤새 들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걸.

그녀는 딱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몸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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