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순탄한 진행
늘씬한 키의 그녀는 잔뜩 미소를 머금고 곧장 수철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필립 감독님.”
사라는 필립 윤에게 인사하고 바로 수철을 봤다.
“안녕하세요, 용수철 작곡가님.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저는 사라 제이입니다.”
그녀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수철을 보는 얼굴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연인이라도 만나는 듯한 표정으로.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수철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중히 인사했다. 눈을 마주치며 같이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하게 대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감독님, 축하드려요.”
자리에 앉은 사라는 필립 윤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백자의 눈물이 칸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을 축하하는 얘기였다.
그녀는 수철이 예상했던 대로 선한 눈망울에 순수한 소녀 같았다. 말 한마디에도 예의와 격식이 묻어 있었고, 상대와 공감하기 위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명한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소박했다. 인기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잠시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고, 자연스레 영화에 관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백자의 눈물에서 처음 받았던 느낌을 전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처음 ‘백자의 눈물’을 봤을 때 많이 울었어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요.”
그녀는 쑥스러운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듣던 대로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수철은 잠시 그녀의 큰 눈에 눈물이 고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특히 주인공 개석이 총성과 포탄이 난무하는 곳에서 오로지 백자를 빚으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사라는 그때의 감정이 밀려오는지 눈물을 훔쳤다. 수철도 잠시 그 장면을 떠올렸다. 사라의 말대로 예술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장면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개석이 온전히 자신의 예술에 빠져들었으니까.
“그날 이후, 그 장면에 나왔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꿈에 나타날 정도로요.”
사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필립 윤과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로 수철을 봤다.
“감독님이 나중에 알려 주시더라고요. 그 악기가 퉁소라는 걸요.”
사라는 퉁소를 한국의 오보에라고 했다. 똑같진 않지만 같은 느낌의 악기인 건 맞다. 둘 다 관악기고, 둘 다 소리에 서정적인 정서를 담고 있으니까.
“바로 퉁소를 구입하고, 또 퉁소로 연주한 한국 전통음악 앨범도 구매했어요. 그리고 매일 들었죠.”
사라는 퉁소를 접하고 퉁소가 들어간 음악을 듣다 보니 백자의 눈물에 대한 감성이 더 폭발했다고 했다. 그 부분에서 필립 윤은 눈을 반짝였다. 필립 윤이 서양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 줄 때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이 그거였다. 한국 전통악기에 담긴 그 고유한 정서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면 영화의 입체감을 더 살릴 수 있을 텐데.
그것이 필립 윤의 딜레마였다. 그런데 사라가 그 부분을 짚은 것이다. 감성이 폭발했다고 하면서. 그러니 필립 윤의 눈이 반짝일 수밖에.
그녀의 얘기가 끝나고 잠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칸 영화제에 관한 가벼운 잡담을 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수철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뜸 들일 필요가 없었다.
“사라 제이 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음악을 좋게 들어 주시고 또 영화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나눠 주셔서요.”
수철은 사라의 분위기에 맞춰서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철의 말에 사라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무 듣기 좋은 얘기를 해 주시네요. 달콤할 정도로요. 그리고 감사는 제가 해야죠, 이렇게 좋은 영화와 훌륭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두 분께 정말 감사해요.”
사라는 수철과 필립 윤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수철을 봤다.
“저는 용수철 작곡가님 보고 깜짝 놀랐어요.”
“왜요?”
“이렇게 젊으신 분인 줄 몰랐거든요. 저는 음악을 듣고 당연히 연륜이 깊은 작곡가 선생님일 거로 생각했어요. 음악이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이 계시더라고요. 호호.”“하하,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사라의 말에 대꾸한 건 수철이 아니었다. 필립 윤이었다. 자신도 수철을 만나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했다. 수철은 뻘쭘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봤다.
“설마 흰 수염이 멋들어진 노신사를 상상한 건 아니겠죠?”
필립 윤은 이 상황이 재밌는지 농담을 던졌다.
“호호, 그 정도는 아니에요.”
사라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수철은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라 제이 님께서 이 멜로디를 노래로 부르시겠다는 제안은 저에게도, 필립 감독님께도 정말 기쁜 소식이에요.”
수철은 눈빛으로 진심을 전했다. 사라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깊은 눈망울을 보였다.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허락해 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눈빛을. 수철은 잠시 멈췄다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 가사는…….”
주제곡의 가사를 필립 윤이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백자의 눈물을 직접 만들었고,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라는 이유를 붙였다. 사라는 좋은 생각이라며 기쁘게 동의했다.
“너무 기뻐서 벌써 가슴이 뛰네요. 존경하는 감독님의 가사에, 용수철 선생님의 멜로디를 부르게 된다니요.”
그녀는 잔뜩 기대감을 드러냈다. 믿기지 않는다며 테이블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경험 많은 가수가 아닌 신인 가수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필립 윤은 사라의 분위기에 쉽게 동참하지 못했다. 아니, 동참할 수 없었다. 사라가 기뻐할수록 가사를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어깨가 무거웠다. 수철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다. 필립 윤은 잘 해낼 게 분명하니까. 수철도 처음 가사를 쓸 때 그랬으니까.
“저는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언제든지 시작하셔도 돼요.”
사라는 수철이 어떤 제안을 해도 다 받아들일 분위기였다. 그녀의 표정이 그랬다. 퉁소의 멜로디에 푹 빠져 있었다.
“이제 서로의 생각을 확인했으니 자세한 진행 문제는 에이전시에게 넘기는 게 어떨까요? 우린 음악과 관련한 일정만 맞추고요.”“네, 좋아요. 그런 얘기는 회사끼리 하는 게 좋겠죠.”
사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매너지먼트 담당자의 명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수철도 사라가 준 명함을 챙기며 레베카의 명함을 건넸다.
“제 생각에 앞으로 진행은…….”
수철은 계속해서 주제곡을 만드는 일정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그동안 앨범 몇 장을 진행하며 기획부터 프로듀싱, 디렉팅까지 했기에 수철의 입에서 일정이 술술 흘러나왔다. 사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필립 윤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가사는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요. 아무래도 감독님이 바쁘시니까요.”
필립 윤이 바쁜 관계로 가사 만드는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할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가사가 완성돼야 다음이 진행되는 상황이기에 필립 윤이 마냥 시간을 끌 수만은 없었다. 수철도 사라도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필립 윤은 선뜻 그러겠다고 하지 못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서두르겠다고 하고 싶지만, 처음 써 보는 거라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렇다고 매일 숙제 검사를 받을 수도 없고. 대신 최대한 가사의 형태를 맞춰서 초고를 만들어 볼게요. 그러고 나서 같이 상의하면서 고쳐 보는 게 어떨까요?”“네,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수철과 사라는 필립 윤의 말에 즉각 동의했다. 그의 표정을 봤으면 동의 안 할 수가 없었다.
“사라 제이 님은 녹음하고 나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으세요?”
수철은 사라가 앞으로 어떻게 미래를 풀어 나갈지가 궁금했다. 필립 윤도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저는 녹음이 끝나면 얼른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이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고 싶어요. 구체적인 일정은 회사와 상의를 해야 하지만…….”
사라는 팝페라 가수답게 제일 먼저 관객을 만나고 싶어 했다. 관객들이 노래를 듣고 감동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얼른 보고 싶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면서. 아무래도 구체적인 부분은 회사끼리 상의해야 할 거 같았다.
“저는 지켜보기만 할거에요.”
수철은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서는 관여를 안 하겠다고 했다. 노래와 녹음은 물론, 음악의 편곡에 관해서도.
이미 이 부분은 필립 윤과 얘기를 나눴고, 박 대표에게도 뜻을 전했다. 편곡하고, 노래하고, 녹음하고, 앨범을 내는 건 사라에게 모두 맡기기로. 이 모든 게 그녀의 러브콜로 시작된 거니까. 그리고 그녀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된다. 음악도 잘하지만 사라가 잘되면 기뻐할 사람들이 많다. 그녀가 가진 선한 영향력 때문에.
이제 수철은 크게 할 일이 없다. 물어오는 것에 답변하고, 요청이 오면 도와주면 된다.
이제 영화제나 즐겨 볼까.
마음이 한결 가볍다.
하지만 필립 윤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수철이 가벼워진 만큼 필립 윤은 무거워 보였다.
감독님은 좋은 가사를 만드실 게 분명해, 백자의 눈물을 만드셨으니까.
수철은 그렇게 합리화했다. 필립 윤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 * *
“어떻게 됐어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레베카가 밤늦게 차를 몰고 호텔로 찾아왔다.
“전화로 얘기해도 되는데.”“숙소로 가는 길에 직접 듣고 싶어서 들른 거예요.”
수철은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사라에게 받은 거예요. 매너지먼트 명함이요. 내일 통화해서 세부적인 문제를 논의하면 될 거라고 들었어요.”“네, 제가 먼저 연락해 볼게요.”
레베카는 명함을 휙 한번 훑어보고는 명함집에 집어넣었다.
“아, 그리고 박 대표님께 전화를 받았어요. 저한테 일정을 모두 조율하라고 하시더라고요.”“네, 저도 들었어요.”“그럼, 어떻게 할까요? 인터뷰 요청과 라디오 출연 말이에요. 계속 거절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레베카.”
“네.”
“최소한으로 해 주세요. 한 번씩으로만요. 가능하겠죠?”“조율해 볼게요. 라디오는 우선순위를 따져 보고, 인터뷰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상황을 살펴볼게요.”
“고마워요.”
수철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레베카는 빙긋 웃고는 돌아섰다.
“그럼 가 볼게요.”
“네, 내일 봐요.”
“아, 참!”
레베카는 차에 오르려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
“가사는 어떻게 됐어요?”“감독님이 쓰시기로 하셨어요.”“호호, 결국은 그렇게 됐군요? 호호.”
레베카는 재밌다며 연신 웃음을 보였다. 필립 윤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봤었기에. 몇 번 더 웃고는 차에 올랐다.
* * *
사라와의 얘기를 마무리 짓자 필립 윤은 다시 영화제에 집중했다. 매일 인터뷰를 하고, 관계자들과 만찬회를 가졌다.
그 와중에도 필립 윤은 짬짬이 가사를 노트했고, 밤에는 그 가사들을 펼쳐 놓고 다듬었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그의 방에 불이 꺼졌다.
그 결과 드디어 훌륭한 가사가 나왔다.
“와! 진짜 감독님이 쓰신 거 맞아요?”
수철은 가사와 필립 윤을 번갈아 봤다. 초고 정도가 아니라 최종본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 감동할 가사였다.
“수철 씨가 그랬잖아요? 내가 잘 쓸 거라고.”
필립 윤은 새삼스레 왜 너스레를 떠냐고 했다. 속으로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 반전의 모습을 보였다.
수철의 눈에 필립 윤의 입꼬리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이제 사라에게 보여 주고 의견을 들어 보면 되겠어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뭐, 더 좋은 의견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난 이미 작사가로서의 근육을 다 갖췄으니까요.”
어울리지 않게 거들먹거리기까지.
“감독님.”
“왜요?”
“이참에 작사가로 나서시는 게?”“에이, 그건 아니에요. 본업에 충실해야죠. 제 몰골 봐요, 허허.”
필립 윤의 말대로 몰골이 밤새 창작의 고통에 시달린 예술가처럼 부스스했다.
“먼저 갈게요. 인터뷰하기 전에 얼른 낮잠 한숨 자야겠어요.”“네, 그러시는 게 좋겠어요.”
말하기가 무섭게 필립 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수철은 흐뭇했다. 수철의 예상대로 필립 윤은 입체감 넘치는 가사를 만들어 왔다.
“그리움이 소용돌이칠 때, 너에게 손을 얹는다…….”
수철은 사라지는 필립 윤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만들어 온 가사를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