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만찬회(1)
“저기 봐요, 레드카펫 사진이 걸려 있네요.”
한 빌딩에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레드카펫에 서 있는 배우들의 사진이었다. 정장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상을 탄 사람들 같았다.
“저 건물이 출품작들이 상영되는 건물이에요.”
그 말에 수철은 대형 사진 뒤의 건물을 훑어봤다. 소박하지만 칸의 상영관답게 고풍스러웠다.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 유명한 감독과 배우들 같았다. 상영관 정면에 대형 사진을 걸어 놓은 걸 보면.
아침을 먹고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오전 시간에 칸을 구경할 겸 레베카와 도시를 거닐었다. 작은 도시여서 걸어 다녀도 무리가 없었다.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답게 곳곳에 영화와 관련한 현수막과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수철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세트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 백사장에 누워서 햇볕을 쬐는 사람들, 작은 항구에 잔뜩 몰려 있는 요트들, 넓은 거리를 한가하게 오가는 사람들,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는 모습들. 모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칸은 작은 도시지만 개성이 뚜렷하고, 어디 하나 버릴 구석이 없는 알찬 도시였다. 있을 것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딱 그런 느낌.
“저기가 뤼미에르 극장이에요.”
항구를 지나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레베카가 가이드라도 되는 마냥 손을 쭉 뻗었다. 정면에 매력적인 건물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그곳, 며칠 후 백자의 눈물 시사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뤼미에르 극장은 칸 영화제가 열리는 극장답게 크기가 엄청났다. 극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레드카펫이 쫙 깔려 있었고, 그 앞으로는 바리케이드가 쳐 있었다.
“벌써 레드카펫이 깔려 있네요?
“시사회가 진행 중이니까요.”
수철은 시상식 할 때만 레드카펫이 깔리는 줄 알았다.
“필립 감독님 작품은 3일 후에 상영해요.”
“네, 들었어요.”
수철은 건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콧대 높기로 유명한 곳이죠.”
“콧대요?”
“일반인은 보기 힘들거든요.”
“……?”
“기자나 초청 관계자가 아니면 표 구하기가 힘들어요. 심지어 출입 기자증이 있어도 입장이 안 되기도 하고요. 거기에다 여기서 이뤄지는 첫 시사회는 드레스 코드까지 있어서 입장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요. 그걸 자존심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고요.”
3대 영화제 중 가장 위상이 높고 심사 위원들의 자질이 아무리 최고 수준이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만의 잔치를 할 거면. 결국 영화를 흥행시키는 것은 일반인들인데.
―이 안쪽으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시사회 시간이 다가오는지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한둘 바리케이드 앞에 모여들었다. 시사회장에 들어가지 못한 기자들 같았다.
“영화 시사회 때도 그렇고, 음악상 시상식 때도 그렇고. 한국에서 온 기자들이 몰려들 거예요. 그러면 그 기자들의 요청에 응하는 게 좋다고 했어요. 박 대표님께서요.”
레베카가 바리케이드 앞에서 자세를 잡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기뻐할 소식이잖아요. 이미 한국에도 보도가 많이 돼서 수상 소식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수철도 예상했던 바다.
“그 자리에서 인터뷰만 하면 되나요?”“아, 그 부분은 요령이 좀 필요해요.”
“요령이요?”
“네, 그날 레드카펫에서는 사진만 찍고요. 인터뷰는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서 할 생각이에요. 한국 기자분들을 한꺼번에 다 모아서요.”
“아…….”
“이건 박 대표님의 요청이에요. 형평성 있게 해야 한다고요.”
형평성?
“형평성을 어떻게 맞춰요? 질문이 다 다를 텐데요?”
“그게 아니에요.”
“……아니면?”
“저도 처음엔 그렇게 얘기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회사와 언론사 관계의 형평성을 말씀하시는 거였어요.”
“……?”
“수철 씨가 그동안 한국에서 언론 노출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오는 기자들과는 공평하게 인터뷰를 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누구와는 하고, 누구와는 하지 않고 하면 안 된다고요.”“네,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지금도 계속해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데 미루고 있어요. 그때 한꺼번에 하려고요.”
수철은 레베카가 많이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들 모으고 장소 섭외하고 하려면.
지이잉.
다시 항구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레베카의 전화가 진동했다.
“잠시만요.”
레베카는 귀에 전화기를 대며 돌아섰다.
수철은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처럼 저마다의 포즈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수철 씨! 사라예요. 사라 제이요.”
레베카가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작게 소리쳤다.
“수철 씨 번호 알려 드릴 테니까 직접 통화해 보세요. 가사 때문이래요.”
“네, 알았어요.”
에이전트의 명함만 교환하고 서로의 번호는 묻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수철 씨. 사라예요.
“네, 안녕하세요. 그때는 잘 돌아가셨나요?”―네, 수철 씨 만나고 행복해서 오는 내내 미소가 멈추지 않았어요.
그녀는 여전히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말을 했다.
―가사에 대해서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필립 감독님과 통화했는데, 수철 씨께 직접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사라는 한 템포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선, 저는 필립 감독님의 가사에 감탄했어요. 역시 감독님은 사람의 감성을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수철 씨는 어땠나요? 가사가요?
“저도 사라와 같은 생각이에요.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역시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같은 생각이라니 정말 기뻐요, 호호.
전화기 너머로 사라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감독님께서 저에게 제목을 물어보셨는데, 저는 ‘To be near you(가까이 가기 위해)’가 좋다고 생각해요. 영화 보는 내내 그 생각이 들었거든요. 도자기공과 백자가 마치 연인 같다고요. 전쟁이 나고 떨어져 있어도 서로에게 가까이 가려고 손짓하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펑펑 울었고요.
사라는 아직도 백자의 눈물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어 있었다. 문득 사라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입을 해서 펑펑 눈물을 흘릴 정도면.
―수철 씨 생각은 어떠세요?
“전 무조건 찬성이에요. 제목이 완전 딱 맞아요.”
사라의 얘기를 다 들은 수철은 그녀에게 충분히 공감했다. 영화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묻어났다. 도자기공과 백자가 연인 같다는 말은 수철도 느꼈던 부분이다. 필립 윤이 의도적으로 끌어간 부분이기도 하고.
* * *
“한국, 미국,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상영하게 될 것 같아요. 하하.”
필립 윤은 한껏 들떠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앉아 있는 노천카페 뒤로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보였다.
“감독님 말씀대로 백자의 눈물에 대한 평단의 반응이 뜨겁다는 걸 매일 피부로 느껴요. 그래서 저도 절반은 한국 사람이라는 게 너무 기쁘고요.”
필립 윤의 팬인 레베카가 맞은 편에 앉아서 맞장구를 쳤다.
둘이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이 좀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필립 윤에게 수시로 마이크를 들이밀며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가 많았고, 필립 윤을 알아보고 사인 요청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매일매일 기쁨의 연속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는 게 즐겁다니까요? 하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매일 언론에서 기사를 쏟아내는 덕분에 영화의 인지도가 상승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백자의 눈물이 칸 사운드트랙상을 수상할 강력한 후보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수철이 음악상을 수상할 확률이 높다는 얘기였다.
영화는 영화대로 잘나가고, 음악은 음악대로 잘나가서 작품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게다가 음악상 시상식 이후에 사라가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할 계획이다. 주제곡을 팝페라로 부를 거라고. 그 음악이 세상에 울려 퍼질 거란 생각에 필립 윤은 입을 다물 틈이 없었다. 자신이 가사까지 썼으니.
수철을 볼 때마다 눈에서 하트가 쏟아졌다.
“감독님, 제발 시선 좀.”“왜요? 좋아서 그러는데?”“불편해요.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어요.”“에이, 그 정도는 아니죠.”“그 정도 맞아요. 보세요.”
필립 윤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눈빛이 보였다. 아까는 자신을 알아보고 힐끔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정체성을 의심하는 거 같은.
어쩔 수 없이 수철이 먼저 일어났다.
“친구들 공연하는 거 보러 가야 해서 먼저 일어날게요.”“어디서 하는데요?”
“감독님은 상영관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인터뷰도 있으시다면서요?”“네, 맞아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
괜히 오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킥킥.
레베카는 이 모습이 재밌는지 키득댔다.
“레베카는 안 갈 거예요?”“같이 갈까요? 저는 감독님과 상영관에 가고 싶지만 필요하다면 동행할게요.”
생각해 보니까 굳이 공연장까지 같이 갈 필요가 없었다. 초대권이 있으니까 보고 싶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래서 레베카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레베카는 우리 팀 공연 봤다고 했죠?”“네, 영국에서 두 번요.”
손가락 두 개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럼 공연은 나 혼자 갔다 올게요. 레베카는 하고 싶은 거 하세요.”“그래도 괜찮겠어요?”
레베카의 입이 배시시 벌어졌다.
“네, 괜찮아요. 각자 좋아하는 거 할 시간도 필요하죠. 지금은 축제 시즌이잖아요. 그리고 설마 이 작은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리겠어요?”
“네, 감사해요.”
레베카는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럼 저녁 때 호텔로 모시러 갈게요. 만찬회장 가기 전에요.”
만찬회라는 말에 수철과 필립 윤의 눈이 부딪쳤다.
“설마 수철 씨, 까먹었던 건 아니죠? 중요한 자린데?”
필립 윤이 의심의 눈초리를 날렸다.
“아니에요, 까먹기는요.”
* * *
야외 공연장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무대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니 팀의 인기가 제대로 실감 났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헤이!”
“수철! 요― 맨!”
대기실에 들어서자 악기를 조율하던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철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공연 잘하고, 끝나고 봐.”
잠시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등을 돌렸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스탭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했다.
“그래, 네가 만든 음악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걸 느껴 보라고. 여기로 말이야!”
알베르토가 가슴을 쿵쿵 쳤다.
“하하, 알았어. 이따 봐.”
와―!
멤버들이 무대에 발을 내딛자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날 무대는 보통의 재즈 공연과는 달랐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수철이 같이했을 때보다 더 다이내믹하게 발전해 있었다. 관중들은 얌전히 앉아서 박수만 치지 않았다. 그루브에 몸을 들썩이며 함성을 질렀다.
순간 제시의 말이 떠올랐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분위기가 점점 펑크 밴드처럼 되어가.
흥을 느끼고자 하는 관객들의 열망에 맞추다 보니까 음악이 점점 극적으로 변하고, 그루브가 극대화된다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네.
수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제시의 말 그대로였다. 관객들은 흥을 느끼며 열광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와, 영준이 형.
영준이 형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대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신들린 듯이 트럼펫을 불며 무대를 누볐고, 연주자인지 관객인지 모를 정도로 음악에 흠뻑 빠져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영준이 형의 그런 모습에 관객들의 함성은 더 커졌고, 더 열광했다.
대단해!
영준이 형이 교수 생활을 접고, 짐을 싸서 이곳을 온 이유가 새삼 실감 났다. 연주자를 넘어 엔터테이너가 된 거 같았다.
앙코르!
앙코르!
수철은 멀리서 공연을 지켜보다 사람들과 같이 앙코르를 외쳤다.
“어땠어?”
공연이 끝나고 어땠냐고 묻는 멤버들에게 수철은 대답 대신 엄지를 세워 보였다.
“오늘은 정말 최고였어, 나중에 또 전화할게.”
만찬회에 참석해야 하기에 인사를 하고 대기실에서 빠져나와 다시 호텔로 향했다.
* * *
―준비 다 되셨으면 내려오세요.
수철은 호텔 앞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는 레베카를 보며 잠시 당황했다. 그녀의 파티복이 생각보다 화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베카에게 이런 복장은 당연한 거였다.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으니 이들의 파티 문화에 맞는 복장을 입는 게 예의였다.
“개석을 연기한 배우가 제일 궁금해요. 호호.”
레베카는 백자의 눈물에 출연한 배우들을 만날 기대에 차 있었다.
―꼭 참석하세요.
오늘 만찬은 필립 윤이 직접 준비한 만찬회다. 영화 관련한 한국 관계자들, 배우들, 제작 지원을 약속하신 회장님, 그리고 필립 윤이 아는 몇 명의 영화감독과 중요 스탭들. 필립 윤은 수철에게 꼭 소개하고픈 사람이 있다며 참석을 요청했다. 수철은 궁금했던 배우도 만나고 음악 감독에게도 인사할 생각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 * *
“수철 씨!”
만찬회장에 들어서자 샴페인 잔을 들고 대화를 나누던 필립 윤이 번쩍 손을 들었다. 수철은 다가가 모여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 저기 오시네요.”
대화를 나누던 필립 윤이 입구를 바라봤다. 기다리는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헉!
수철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여긴 어떻게!
놀라서 샴페인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