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80화 (180/239)

#180화. 만찬회(2)

할아버지 3인방이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수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모습이 영화제 관계자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장 차림에 너무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어서.

“수철아, 안녕!”

가까이 다가온 할아버지들은 수철을 보며 방긋 웃었다.

“아니, 할아버지들, 여긴 어떻게……?”

수철이 당황해 묻는 사이, 이번엔 필립 윤과 레베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회장님과 아는 사이……?!”

필립 윤은 할아버지들과 수철을 번갈아 봤고,

“할아버지가 셋?”

레베카는 느닷없는 등장한 세 명의 할아버지를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모두 말을 멈춘 채,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기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합시다.”

정 선생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입을 열고 사람들을 가까운 테이블로 이끌었다.

“여기 필립 감독은…….”

얘기는 이랬다.

할아버지들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한국의 배급사 대표에게 필립 윤을 소개받은 거였다. 필립 윤이 말한 다음 영화에 제작 지원을 약속한 회장님들이 바로 할아버지 3인방이었다.

“참 발도 넓으시네요.”

수철은 할아버지들이 대단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서로의 오해를 풀고, 수철은 할아버지 3인방을 다른 테이블로 이끌었다.

* * *

“정말 모르고 오신 거예요?”

의자에 앉자마자 의심의 눈초리를 날렸다.

“그렇다니까? 이번엔 정말 아니야.”“그래, 얼마 전까지는 정말 몰랐었어.”“……얼마 전이요?”

“음악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말이야. ”

그때 고 선생 할아버지가 나섰다.

“사실이야, 비행기 티켓을 다 예매해 놓고 나서 우연히 기사에 실린 네 이름을 봤어, 음악상 후보에 올랐다는. 그래서 확인해 보니까 네가 맞더라고?”“어디에서 확인했는데요?”

“어디긴 어디야?”

“…….”

“…….”

“내 말은…… 네 이름이 워낙 독특하니까, 뭐, 바로 알았다는 얘기지.”“어허, 여기까지 와서 또 몰아세운다!”

수철이 의심이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정 선생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렇게 만났으면 반가워서 얼싸안고 노래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그 분위기가 아닌 거 같은데요?”“그럼 분위기 바꿀 겸 피아노 연주라도?”“연주하시는 분 계시니 저쪽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세요.”

수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 선생 할아버지가 급하게 잡아끌었다.

“알았어, 잠깐만 앉아 봐. 또 늙은이 심장 뛰게 그런다.”

수철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진짜 영화제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겸사겸사 온 거야.”

“겸사겸사요?”

“전혜미 소프라노 기억하지?”

전혜미?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선뜻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허, 젊은 녀석이 기억하곤? 자기 곡을 부른 성악가도 기억 못 한다는 말이야?”

“……!”

그제야 생각이 났다. VVIP 파티 때, 즉흥연주를 노래로 부르겠다고 했던,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악보를 그려 줬던. 그 후로 가사도 보내오고 앨범도 보내왔었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어서…….”

파티 이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해외를 돌며 공연하는 유명 소프라노였고, 수철은 한창 작업에 바빴었다.

세상엔 없는 사랑을 찾는다는 얘기였었나?

그녀가 보내왔던 가사와 음악이 기억났다. 클래식하게 편곡되었지만, 수철의 멜로디 특성상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음악이었다. 가사도 거기에 맞게 판타지스러웠다.

“아무리 만난 적이 없어도 그렇지, 자기가 곡을 준 사람의 이름도 기억 못 하다니.”

정 선생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곡을 써 준 건 아니고요. 암튼 그분이 왜요?”“다음 주에 마르세유에서 공연이 있어. 우리가 거기에 초대받아서 겸사겸사 온 거야. 영화제 구경도 할 겸해서 말이야. 마르세유가 칸에서 가까우니까.”

그 말에 수철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진즉에 그렇게 얘기하시지. 난 또.”

“또, 뭐?”

“예전에 한국에서요.”

“한국?”

“…….”

잠시 갸웃하던 할아버지들의 얼굴색이 급격하게 변했다. 예전에 한국에서 수철을 따라붙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녀석, 그건 또 안 까먹고 기억하고 있네? 흠흠!”

수철은 피식 웃음이 났다. 할아버지들은 양치기 소년이 된 표정이었다.

“어쨌든 잘됐다, 공연 보러 같이 가자.”

“저도요?”

“그래, 네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어떻게 하는지 직접 봐야 할 거 아니야?”

“…….”

예정 없이 왔던 프랑스에서 스케줄이 팍팍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들의 말대로 안 갈 수도 없고, 그 멜로디로 어떻게 노래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넌, 그 곡이 얼마나 화제인지 모르지?”

“화제요?”

“아직도 클래식 차트 상위권에 있어.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듣는다고.”

“……!”

수철은 그제야 하나가 더 생각났다. 저작권 수입 중에 잘 모르는 항목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다고 박 대표가 물었었다. 그때 확인해 보니 전혜미 성악가의 노래로 들어오는 저작권료였다. 박 대표는 이 정도의 금액이면 클래식 앨범치고는 엄청 많이 팔린 거라고 얘기했었다.

에구, 이런.

머리를 한대 쿡 쥐어박고 싶었다.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건지.

“그래도 기특하지 않아?”

정 선생 할아버지가 비릿한 미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특이요?”

“칸에 오자마자 전화하려다가 오늘 볼 생각에 꾹 참은 거야, 네가 바쁠 거 같아서.”

그 말에 수철은 의심의 눈초리로 얼굴을 더 가까이 붙였다.

“혹시 오늘 이 자리도 할아버지들이 하자고 한 거예요?”

“…….”

“…….”

“…….”

잠시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고 선생 할아버지가 끼어들어 대화를 바꿨다.

“그런데 필립 감독이랑은 언제 같이 작업을 한 거야?”

수철이 할아버지들을 한번 째려보고는 대답했다.

“할아버지들 만나기 훨씬 전부터 한 거예요.”“그랬었군. 감동적이던데?”

“……?”

“퉁소의 멜로디 말이야. 그것 듣고 정 선생은 울었어.”“나 아니고, 신 선생.”

정 선생 할아버지는 뒤에 앉은 신 선생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신 선생 할아버지는 소매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사라 제이가 노래를 하기로 했다며?”

정 선생 할아버지가 다시 어깨를 붙였다.

“그건 또 어떻게?”

“오해 마, 필립 감독과 얘기하다가 알았으니까.”

“…….”

수철은 갑자기 얼마 전 ECM에서 해리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해리를 보면서 정 선생 할아버지랑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진짜 정 선생 할아버지가 떡하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때 필립 윤이 웃으며 다가왔다.

“아직도 나눌 얘기가 많으신가 봐요?”

할아버지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에요, 중요한 얘기는 다 끝났어요.”

고 선생 할아버지가 슬쩍 수철의 눈치를 살피고는 대답했다. 필립 윤은 허리를 숙이며 할아버지들에게 정중히 물었다.

“괜찮으시면 수철 씨를 잠시 빌려 가도 될까요?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네, 그렇게 하세요.”

* * *

필립 윤은 수철을 사람들이 별로 없는 만찬회장의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오래전부터 소개해 주고 싶었던 분이에요.”

“누구신데요?”

“작곡자이자 지휘자세요, 마에스트로라고 하죠. 이탈리아 분이신데, 클래식계에서는 엄청 유명하세요. 거장이라고 칭송받는 분이시죠. 그리고 클래식뿐만이 아니라 영화음악 작곡도 많이 하셨어요.”

“아…….”

“오래전부터 수철 씨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오래전이요? 저를 어떻게 알고……?”

수철이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필립 윤이 손을 뻗었다.

“아, 저기 계시네요.”

필립 윤이 가리킨 곳에는 깔끔한 슈트 차림의 백발 노신사가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음악가라기보다 잘생긴 노년의 배우 같았다. 굵은 턱선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영화 속 주연배우의 모습이었다.

“뉴욕에서 공부할 때 처음 만났어요. 스테파노는 작곡과 교수님이셨고, 난 영화를 배우려고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었죠. 하하.”

필립 윤은 수철에게 마에스트로를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스테파노였다. 필립이 학생 때 교양과목으로 들은 작곡 수업의 교수였다.

“하하.”

둘은 그때가 떠오르는지 잠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가 웃음 짓자 짙은 갈색 눈동자 옆으로 주름이 잡혔다.

“간단히 말해서 소울메이트(Soulmates) 라고 할 수 있죠.”

수철에게 스테파노를 소개한 필립 윤은 자신과 스테파노의 관계를 말하며 그동안 어떻게 끈끈한 우정이 이어졌는지 자랑했다. 수철은 잠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작년 칸 영화제에서 말이죠.”

필립 윤의 소개가 끝나자 스테파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수철이 어색하지 않게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작년 칸 영화제 얘기를 꺼내며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재밌게 얘기했다.

“제가 바로 작년 음악상의 심사 위원장이었거든요. 하하.”“아, 그러셨군요, 하하.”

수철은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노가 편하게 느껴졌다. 필립 윤과 친분이 두터워서 그런지, 그에게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휘자 특유의 날카로움보다는 세상을 통달한 듯한 철학자의 분위기가 났다.

잠시 영화제 얘기를 하며 웃음을 보이던 스테파노가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진지한 눈으로 수철을 봤다.

“제가 필립에게 수철 씨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오래전부터요.”“네, 그러셨다고 들었어요.”

수철은 궁금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며.

“수철 씨가 허락한다면…….”

그는 말을 끌며 수철과 눈을 맞췄다.

“……?”

“‘Radiate’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네? Radiate요?”

수철은 놀라서 화를 내듯이 되물었다. 아니,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다른 곡도 아니고 ‘Radiate’라니?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수철은 놀란 눈으로 스테파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필립 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래전에 제가 스테파노에게 들려준 적이 있어요. 수철 씨 만나기 전에요.”

수철은 필립 윤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Radiate’를 듣고 꽂혀서 매일 듣고 있다고 했던, 감정이 요동쳐서 주체할 수 없다고 했던, 그때의 필립 윤이 떠올랐다. 수철이 필립 윤과 만나게 된 계기도 바로 그 곡, ‘Radiate’ 때문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제가 직접 지휘를 해 보고 싶어요.”

클래식으로 편곡해서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되면 클래식 무대에서는 초연이 되는 것이다.

음…….

수철은 대화를 멈추고 잠시 상황 정리를 했다. 유명 지휘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Radiate’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아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지휘하고 싶다니, 하도 오래돼서 수철조차 까먹고 있었던 곡을.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며칠 전에는 팝페라 가수가 주제곡을 부르겠다고 하더니, 이번엔 거장이라고 칭송받는 지휘자가 ‘Radiate’를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한다. 사라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스테파노는 정말 의외다.

수철이 말이 없자 표정을 살피던 스테파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입을 뗐다.

“혹시 생각이 있다면 수철 씨가 직접 지휘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수철 씨는 오케스트라 지휘도 금세 가능할 거 같은데요?”

스테파노는 확인하지 않고도 수철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음악가의 매서운 눈매로. 물론 스테파노가 이렇게 물은 건 초연이기 때문이다. 초연은 작곡가가 직접 올리기 때문에.

“아니에요, 저는.”

수철은 손을 저었다.

“잠시만요.”

필립 윤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는 화제의 중심에 있는 만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도 그때 느낌이 생생해요.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말이에요.”

스테파노는 필립 윤이 자리를 비우자 아까 다 하지 못했던 ‘Radiate’에 대한 얘기를 덧붙였다.

“‘Radiate’를 처음 들은 후부터 가끔 꿈을 꿔요. 내가 무대에서 미친 듯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지휘를 하는 꿈을요.”

수철은 어릴 적 시달렸던 악몽이 떠올랐다. 스테파노가 말하는 꿈과는 다른 꿈이지만.

“미친 듯이 연주하면서 원초적인 내 모습을 보게 돼요.”

“……?”

“현실에서 드러내지 못한, 내 욕망이 다 보여요.”

스테파노의 눈에 힘이 들어가며 목소리가 격양되기 시작했다.

“보면대 악보 위에 그 욕망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요. 나도 몰랐던 내 전생의 모습처럼요. 지휘봉이 내 손을 떠나 내 가슴을 푹 찔렀어요.”

“……!”

잠시 수철의 숨이 끊어지듯이 멈췄다. 팔뚝에는 소름이 돋아 올랐다. 꿈의 시작은 달랐지만, 끝은 서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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