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감동의 도가니
스테파노는 수철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격양된 호흡을 가다듬었다. 수철도 스테파노의 눈동자를 빤히 보고 있었다. 한동안 둘은 같은 꿈으로 교감이라도 하는 듯이 멈춰 있었다.
“아무래도.”
스테파노가 먼저 표정을 풀었다.
“‘Radiate’를 무대에 올리라는 운명의 계시 같아요.”
“…….”
“그러지 않으면 이 꿈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 같거든요. 하하.”
그는 ‘Radiate’를 들은 이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욕망이 매일 꿈틀거렸다고 했다. 웃음을 보이는 그의 눈가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작곡가의 허락을 받아야지, 제가 맘대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 음악을 들려준 필립 윤에게 수철을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전했고, 이번에 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었다고 했다.
수철은 스테파노에게서 필립 윤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 필립 윤보다 더 강렬했다. 연륜이 깊은 음악가라서 그런지 빠르게 교감이 됐다. 얘기를 듣던 수철은 천천히 입을 뗐다.
“‘Radiate’를 선생님의 느낌대로 재해석해서 무대에 올리는 건 저에게도 기쁜 일이에요. 새로운 옷을 입은 ‘Radiate’를 만날 기회가 생기니까요.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 말에 스테파노는 깊은 미소를 보였다. 수철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줬기 때문에. 수철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수철은 스테파노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물었다. 스테파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리메이크를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스테파노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네.”
수철이 끄덕이자 스테파노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감사해요. 제가 수철 씨께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가끔씩 연습 현장에 와서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니까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나요?”
스테파노는 이번 기회에 수철과 친구가 되고 싶은 생각이었다.
“아, 죄송해요. 그건.”“왜요? 부담되나요?”“그게 아니라 제가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게 아니라서요.”“아, 그렇군요. 언제 돌아가시는데요?”“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아쉽군요. 그럼 있는 동안만이라도 연습장에 방문해 줄 수 있을까요?”
스테파노는 정중히 부탁했다. 수철도 오케스트라 지휘가 궁금했기에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해 볼게요.”“고마워요. 그리고 나중에 초연을 올릴 때는 어떡할까요? 수철 씨가 오기 불편하면 우리가 수철 씨가 있는 곳으로 가서 공연할까요?”“네? 하하, 아니에요. 초연 때는 제가 와야죠. 언제쯤 하실 생각이신데요?”“아무리 빨라도 몇 달은 걸리겠죠.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아, 그러면 그때 맞춰서 제가 다시 오면 될 거 같아요.”
“하하, 고마워요.”
수철의 허락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스테파노는 샴페인 두 잔을 가져왔다. 한잔을 수철에게 건네고 부딪쳤다.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 수철 씨가 지휘하는 ‘Radiate’를 듣고 싶어요. 원작자는 어떤 느낌으로 지휘할지 감상하고 싶거든요. 지나친 욕심일까요?”
수철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자신 같았어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휘는 호기심이 생기면 그때 해 볼게요. 서로의 편곡을 지휘하면서 감상하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요. 우선은 선생님의 손을 거친 ‘Radiate’가 어떻게 바뀔지 기대돼요.”
수철은 진지한 눈으로 진심을 말했다. 스테파노는 끄덕이며 수철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둘은 남은 잔을 부딪쳤다.
* * *
“저 사람을 어떻게 아는 거야?”
스테파노와 얘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할아버지들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분을 아세요?”
“알다마다! 마에스트로 스테파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지휘자, 유럽에서는 엄청 유명한 사람이잖아?”
“잘 아시네요.”
수철이 끄덕이자 할아버지들은 동시에 궁금한 걸 물었다.
“근데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올해도 심사위원장을 맡았나?”“수철이, 너랑은 또 어떻게 알고?”
수철은 잠시 할아버지들을 바라보다가 대답을 미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할아버지들. 와인 드실 거죠?”“응, 한잔해야지. 프랑스까지 왔는데.”“알았어요. 제가 가서 와인 가져올게요.”“손 들면 주문받으러 올 텐데 굳이 왜?”“가져오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멀뚱히 쳐다보는 할아버지들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수철 씨, 잘 지냈어요?”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음악 감독이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수철을 반겼다.
일정을 마치고 배우들과 뒤늦게 만찬회장에 나타난 것이다.
“네, 감독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수철도 반가움을 표했다. 오랜만에, 이 먼 프랑스에서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내민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필립 감독님께 얘기 들었어요. 계속 영화제를 같이 돌고 계시다고요?”“네, 덕분에 지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어요. 하하.”
“아, 하하.”
“저는 영화제 돌아다니고 파티하는 걸 즐기는 체질이에요. 그래서 필립 감독님이 다음 작품을 천천히 시작하길 바라죠. 하하.”
음악 감독은 유럽 햇살에 까맣게 탄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냈다.
“하하.”
수철도 기분 좋게 따라서 웃고는 음악 감독을 테이블로 이끌었다.
“제 자리로 가서 같이 와인 한잔하시겠어요?”“그럼요. 당연히 해야죠. 이렇게 기쁜 소식이 많은데요.”
수철이 와인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니 배우들이 모여 있었다. 필립 윤이 배우들을 할아버지들께 소개하고 있었다.
“어, 수철 씨! 인사하세요. 이분이 개석을 연기하신 배우세요.”
수철과 주연배우가 드디어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용수철입니다.”“안녕하세요, 이수혁입니다. 감독님께 얘기 많이 들었었는데 오늘에서야 뵙게 되는군요.”
서로를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눈빛 아래로 미소가 번졌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석을 연기한 주인공은 생각보다 훨씬 젊은 배우였다. 젊은 나이에도 나이 든 도자기공을 연기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얘기겠지만.
게다가 정장을 입은 모습이 도회적이고 세련되어서 영상으로 본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베카 리라고 해요. 필립 감독님의 팬입니다.”
레베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맨 마지막에 소개를 받았다. 오늘만큼은 수철의 에이전트가 아니라 필립 윤의 열렬한 팬이었다.
* * *
“진짜요?”
“네.”
“와, 정말 엄청난 인연이네요? 그렇게도 만날 수 있다니, 하하.”
나중에서야 할아버지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전해 들은 필립 윤은 믿기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그런 인연이 있냐며 신기해했다. 거기에다가 그 인연이 자신에게까지 이어졌으니. 상기된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처음 회장님을 봤을 때는…….”
필립 윤은 할아버지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대단한 재력가들이신데 영화에 투자를 많이 하시는 분들이라고, 특히 독립영화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들이라고 들었어요.”
필립 윤에게 딱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배급사 대표님께서 그러셨어요. 문화 사업의 소외된 계층에도 관심을 소홀히하지 않는 훌륭한 분들이라고요.”
그 말에 수철은 할아버지들을 힐끔 한번 쳐다봤다.
―짠!
신이 나서 배우들과 와인 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대단하셔.
주변에서 대단한 분들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발이 넓은지는 몰랐다. 진짜 월드 클래스는 할아버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오늘 시사회 설명 좀 드릴까요?”
필립 감독의 영화를 보러 시사회장으로 향하는데, 레베카가 어깨를 붙여 왔다. 수철은 피식 웃음이 자신을 수행하는 에이전트가 아니라 영화 관계자 같았다.
“네, 해 주세요.”
수철이 끄덕이자, 레베카는 뒤적이던 영화제 팸플릿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비경쟁 부문 영화들이 상영돼요. 이번 상영은 특별 상영으로, 명망 있는 감독들에 비해 비교적 인지도는 낮지만, 실력 있는 감독들의 작품이 선정되는 거거든요.”“백자의 눈물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네요?”“맞아요, 칸의 심사 위원들에게 인정받았다는 걸 의미하죠.”
백자의 눈물이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다는 건 굳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체감할 수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필립 감독님!
시사회장에 도착하자 취재진의 열기가 대단했다. 저마다 손을 흔들며 필립 윤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했다.
* * *
레드카펫을 밟으며 상영관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빽빽이 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큰 영화관은 처음 봤다. 영화제가 열리는 곳다웠다. 이 큰 곳을 빈 자리 하나 없이 영화제 관계자들과 다른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 초청받은 인사들, 그리고 기자들이 채우고 있었다.
“우리 자리는 저기예요.”
수철은 이제야 제대로 영화를 본다는 기대감에 깊은 호흡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웅성거리던 극장 안은 영화가 시작되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기대감에 차서 거대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철도 마찬가지였다. 기대감은 긴장감으로 바뀌어 서서히 올라왔다. 영화와 함께 음악도 평가를 받는 자리다.
―가장 기본은 좋은 흙이야. 훌륭한 백자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게야.
도자기공인 개석이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산과 들판을 누비며 흙을 찾으러 다니는 장면과 모아 온 흙을 빚어서 백자를 만들고 가마에 굽는 과정에서 필립 윤이 영화를 만드느라 수고한 지난 모습이 겹쳐졌다.
―이런, 조센징이!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개석의 스승님이 죽고, 일본군이 작업실에 불을 지르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은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두 몰입하고 있었다.
수철은 이 장면에서 음악을 만들 때가 떠올랐다.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여서 영상과 반대로 음악은 밝고 경쾌한 느낌의 메이저 스케일(Major Scale, 장음계)을 썼었다. 그래서 장면과 소리를 분리시켜 입체감을 도드라지게 했다. 관객들이 두 개의 감정을 느끼길 기대하며. 눈으로는 안타까움을, 귀로는 찬란한 슬픔을. 시각과 청각 그리고 제3의 감각이라는 무의식의 감각까지 터치하길 바랐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영화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영화는 빠르게 지나가서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다시 비극적인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이 피난 가는 장면, 포탄에 개석의 작업실이 부서지는 장면에선 사람들은 긴장감에 숨을 멈췄다. 그리고 한껏 고조된 절정은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오롯이 백자와 개석 둘만이 남아서 서로를 어루만지는 모습으로 이어지며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사람들이 손으로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불빛에 비쳐 또렷이 보였다.
짝짝짝!
짝짝짝!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관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필립 윤을 향해 몸을 돌려 찬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 중에는 사라 제이처럼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박수 치면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짝짝짝!
짝짝짝!
기립 박수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필립 윤과 배우들은 두 손을 모으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시사회장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감격하고, 존경하는 눈빛이 넘쳐났다. 이를 지켜보는 수철까지 마음이 뭉클했다.
수철에게도 뤼미에르 극장에서 영화를 본 건 행운이자 감동이었다. 오롯이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게 모든 조건이 맞춰져 있었다. 최고의 극장이라고 손꼽을 만했다. 수철은 음악을 만들 때를 떠올리며 영화에 푹 빠졌었다.
짝짝짝!
멈추지 않는 박수 소리. 수철은 이것이 영화가 주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같은 감정으로 하나가 되는. 수철도 자리에서 일어나 필립 윤을 향해 박수를 쳤다. 사람들은 박수를 통해 자신이 받은 감동을 쏟아 내고 있었다. 마치 백자와 도자기공을 향해서 박수를 치듯이.
* * *
시사회장 밖은 더 난리였다. 계단을 내려오자 바리케이드에 붙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종이를 내밀었다. 사인을 부탁하며 시선을 끌려고 아우성을 쳤다. 보안 요원들이 바리케이드가 넘어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 대단한 스타가 등장하는 광경을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