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82화 (182/239)

#182화. 같이 있는 느낌

계단을 내려온 필립 윤과 배우들은 구경 온 사람들의 함성을 뒤로한 채 포토콜 존(Photocall, 유명인들의 사진 촬영을 위해 불러내는 곳)에 섰다.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둘러싼 가운데 쉴 새 없이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아니, 플래시가 폭발했다. 잔뜩 모인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 대는데, 몇 분간은 플래시가 멈추지 않았다.

―김치.

정장에 보타이를 맨 주연배우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조연 여배우, 그리고 필립 윤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했다. 배우들 사이에서 필립 윤의 개량 한복은 유독 눈에 띄었다. 필립 윤을 향해 렌즈를 조준한 카메라들의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감사합니다. 메르시!

백자의 눈물 팀들은 카메라를 향해 두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배우들은 칸의 레드카펫에 선 것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포토콜이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고, 필립 윤은 어느새 거장 감독이라도 된 듯이 여유로운 표정과 웃음을 보였다.

수철과 레베카는 감독과 배우들만 남겨 놓고 슬그머니 빠져 있었다. 그들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할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

* * *

“잘생겼네.”

포토콜 존에 들어가지 못한 작은 언론사의 기자들은 카메라를 든 채 바리케이드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구?”

옆에 서 있던 기자가 물었다.

“저 배우 말이야.”

턱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옆의 기자가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저 사람은 배우가 아니야.”

“배우가 아니면?”

“브로슈어(Brochure) 확인해 봐.”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는 책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작곡가?”

책자에서 수철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내일 수상이 유력하다는 그 용수철?!”“그래, 바로 그 사람이지. ABYSS 앨범으로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버린.”

대답하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다른 기자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ABYSS?”

“……BBC 방송 안 봤어?”

“BBC?”

눈을 멀뚱히 뜨고 바라보자 옆의 기자는 고개를 저었다.

“암튼 그런 앨범이 있어.”

“…….”

“그 앨범은 여러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유명한 앨범이야. 그 앨범의 작곡자가 바로 저 사람이라고.”

그제야 멀뚱하던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철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 엄청난 음악가라는 말이네? 용수철이라는 저 사람이?”“그래, 나온 앨범 모두가 돌풍을 불러일으켰지.”“와, 그런 사람이 칸의 음악상까지 휩쓸면 정말 음악계가 떠들썩하겠어. 대단해, 저 외모에 음악까지 잘한다니.”

기자는 수철을 보며 부러움의 눈빛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보던 옆의 기자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반대로 말해야지.”

“반대?”

“잘생겼는데 음악도 잘하는 게 아니라, 대단한 음악가인데 외모까지 잘생겼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

“…….”

“진짜 기자 맞아?”

“…….”

* * *

―Director Philip!

필립 윤과 배우들이 사진 찍고 인터뷰를 위해 프레스센터로 이동하는데 여기저기서 손을 흔들며 필립 윤의 시선을 끌려고 소리를 질렀다.

몇몇 기자들은 어설프게 한국어를 외워서 지나가는 필립 윤에게 말을 붙였다.

―추카함다! 필립 감동님!

필립 윤은 대꾸하지 않고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필립 윤 감독님! 한 말씀 해 주세요!”

잔뜩 모인 사람들 틈에서 한국 사람도 보였다. 언뜻 보기엔 방송국 기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를 높이 든 채 마이크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멀리 한국에서 왔으니 인터뷰에 우선권을 달라는 몸짓이었다. 아쉽지만 필립 윤은 거기에 응할 수가 없었다. 빠르게 프레스센터로 이동했다.

레베카는 수철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리를 빠져나가다 뒤돌아봤다.

“취재 열기가 대단하죠?”

“네, 엄청나네요.”

“수철 씨도 이틀 후에 겪게 될 일이에요. 미리 감상해 두세요.”

“…….”

내일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시상식이 끝나면, 다음 날 같은 자리에서 칸 사운드트랙상에 관한 시상식이 이어진다. 레베카는 미리 그 상황을 감상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수철은 별로 실감이 안 났다.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 * *

―필립 윤 감독의 영화, ‘백자의 눈물’이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시사회의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그 현장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그날 저녁 TV에 필립 감독이 인터뷰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왔다. 시사회장에 입장하는 모습부터 포토콜에 서 있는 모습을 모두 보여 주고는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장면을 보여 줬다.

자신을 프랑스 공영방송의 기자라고 밝힌 사내가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영화의 연출도 뛰어나지만, 한국이 자랑하는 예술품인 ‘백자’를 전면에 세웠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한국의 아픈 역사를 백자로 풀어 낼 생각을 하신 겁니까?

필립 윤은 그렇게 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연인처럼 무성하게 자란 수염을 한번 매만지고는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다 아실 테고, 영화의 주제를 소개한 기사도 많이 나왔으니까요. 저는 통상적인 앵글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찾고, 마음에 담아 갈 수 있는 영화로 소통하고 싶었죠. 그것을 백자와 도자기공을 통해 구현한 겁니다. 아픈 역사를 찬란한 예술 안에 담은 거죠.

―아, 그러시군요.

필립 윤의 깊이 있는 설명에 기자는 감탄의 눈빛을 보였다. 필립 윤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팔을 내밀어 옆의 배우들을 가리켰다.

“저는 그렇게 생각만 했고, 그걸 이뤄 낸 건 바로 여기 계신 훌륭한 배우들입니다!”

짝짝짝!

짝짝짝!

필립 윤의 멘트에 모인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이로써 필립 윤은 예술성 깊은 감독과 인격이 훌륭한 감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필립 윤 감독의 작품을 초청해서 시사회를 열게 된 건, 이번 칸 영화제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갯벌에 숨어 있는 흑진주를 발견한 기분이 듭니다.

아나운서는 마지막으로 평론가의 말을 소개하며 시사회 소식을 마무리 지었다.

* * *

“이것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호텔에서 조식을 먹는데 레베카가 금방 출력한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뭔데요?”

수철은 내미는 종이를 손에 쥔 채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동안 음악상 수상자들의 수상 소감이에요. 참고하시라고요.”

“네?”

수철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준비한 성의를 생각해서 휙 한번 훑어보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만약에 상을 타더라도 남의 수상 소감을 참고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The main character of the Cannes Film Festival Soundtrack Award is…….

―Soo cheol―Yong!

수철의 이름이 호명됐다. 전년도 수상자는 봉투를 열어서 이름을 확인하고는 수철의 이름을 우렁차게 외쳤다. 예외는 없었다.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수철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레베카가 건넨 종이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수상 소감들이 적힌 종이가.

읽어 볼걸.

그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짝짝!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앉아 있던 필립 윤과 레베카가 팔을 벌리며 수철을 껴안았다. 배우들도 다가와 축하한다며 수철의 어깨를 툭 치고 손을 맞잡았다. 멀리서 할아버지 3인방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열렬히 손뼉을 부딪치는 모습도 보였다.

수철은 의자 사이의 통로를 빠져나와 무대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수철을 향해 계속 기립 박수를 보냈다. 무대에 올라가자 전년도 수상자가 수철에게 트로피를 전하고 악수를 하고는 물러갔다. 수철은 트로피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그제야 사람들은 박수를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소음이 잦아들고 사람들의 시선이 마이크 앞에 서 있는 수철에게 고정됐다. 어떤 수상 소감을 할지 숨죽이며 귀 기울였다. 수철은 무대로 걸어 나오면서 수상 소감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동안 남들이 하는 수상 소감을 주의 깊게 들은 적이 없었다.

음.

수철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봉주르, 메르시.”

우선 필립 윤이 알려 준 프랑스어 두 단어를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영어로 얘기했다.

“우선, 필립 윤 감독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런 음악을 만들 기회를 갖지 못했을 테니까요.”

멀리서 배우들이 앞 좌석에 앉은 필립 윤의 어깨를 만지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필립 윤의 입이 한껏 벌어져 있었다. 수철은 수상 소감을 말하기 시작하자, 아까까지는 하얗던 머릿속에서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끔 무한한 지지와 지원을 해 주신 원데이 뮤직의 박성준 대표님께 큰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친한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름을 계속 나열했다.

“동민이, 다혜, 김명석 선생님, 준이 형, 그리고…….”

멋있는 수상 소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얘기하다 보니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이 계속 떠올랐다. 수철은 제시를 포함한 멤버들의 이름과 레베카의 이름까지 얘기했다.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배시시 웃는 레베카의 모습이 보였다.

관객석의 사람들은 별 반응 없이 조용했다. 수철의 수상 소감이 특별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환호하거나 박수 칠 분위기는 아니기에 조용히 지켜만 봤다. 게다가 듣기에도 낯선 한국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철은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전할 사람을 떠올리다가 잠시 울컥했다. 제일 먼저 감사했어야 할 사람이었다. 말을 멈추고 잠시 울컥하는 마음을 삼켰다.

“이 세상에 계시지는 않지만, 엄마 아빠에게 가장 큰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저를 믿고 지지해 주셨거든요. 눈감는 순간까지도요…….”

수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말을 끝맺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덤덤했던 수철의 감정이 요동쳤다.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가슴에 손을 얹고는 뭉클해진 가슴을 쓰다듬었다. 몇몇은 훌쩍이다가 옆의 사람을 껴안았다. 자신들의 부모님을 떠올라서.

모두에게 부모님은 항상 고맙고 그리운 존재다. 특히 돌아가셨다면 더 그럴 것이다.

수철처럼.

* * *

“수철 씨.”

무대에서 내려오자 필립 윤은 덥석 수철을 껴안았다. 레베카도, 심지어 주연배우까지도 연이어 껴안았다.

껴안고 나서는 하나같이 수철을 마주 보며 눈가에 눈물을 훔쳤다. 수철을 위로하며 등을 쓰다듬었다.

수철은 그때서야 알았다. 무대에서 감정이 격해졌었다는 걸. 울먹였었다는 걸. 그걸 알아차리자 민망해졌다. 하지만 부끄러울 건 없었다. 부모님을 말하며 울컥하는 건 당연하다. 더군다나 늘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무대에 서 있을 땐 왠지 같이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 이름이 나오길 기대한 건 지나쳤지?”“그럼, 그건 과한 기대지.”“그래도 혹시나 했는데…….”“수철이 다음에 또 상을 받게 되면 그때는 기대를 해 보지 뭐.”“그래, 그때는 미리 얘기해 두자, 우리 이름을 말하라고.”“그래, 그게 좋겠어. 괜히 마음 졸이고 기대하지 않게.”

할아버지들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축하 인사를 받는 수철을 멀리서 바라봤다.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프랑스는 다 좋은데, 막걸리가 없어.”“그러게. 오늘 같은 날은 두부김치에 막걸리 한잔하면 딱인데.”

“내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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