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후기
“키위 주스로 주세요.”
수철은 며칠 간의 열기를 식히고자 호텔 라운지에 앉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올망졸망한 느낌의.
“아침은 안 드세요?”“이거 한잔으로 때우려고요.”
수철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묻는 레베카에게 키위 잔을 들어 보였다. 레베카는 커피를 주문하고 수철과 마주 앉았다.
“그래서 라디오 출연은 안 하시겠다고요?”“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요. 인터뷰도 충분히 했고, 사진도 충분히 찍었으니까요.”
수철은 방송 출연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에너지 소모가 심했다. 탈진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BBC 촬영 때도 그랬고, 칸에서 인터뷰할 때도 그랬다.
레베카는 수철이 피곤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인터뷰가 좋았다고 칭찬하며 추켜세웠지만, 수철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레베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텔에 돌아오면 항상 녹초가 됐고, 그럴 때마다 카메라 체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레베카는 수철의 말에 잠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꾸고 수철의 말에 동의했다.
“네, 알겠어요. 남은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다음에 프랑스 오게 되면 그때는 일 순위로 하겠다고 둘러대야죠. 수철 씨가 그때까지 계속 이슈가 되고 있다면 말이에요. 호호.”
레베카는 수철을 안심시키려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볼펜으로 다이어리에 적힌 라디오스테이션 일정에 줄을 쭉 그었다. 수철은 미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레베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앞으로 일정을 어떻게 잡을까요?”“우선 마르세유에서 전혜미 소프라노의 공연에 가 볼 생각이에요. 할아버지들과 함께요.”“저도 거긴 참석해야죠.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네, 그럼 좋죠.”
수철은 끄덕이며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레베카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수철을 봤다.
“사라 제이의 녹음실에 방문하는 건 언제로 잡을까요?”“그건 영국으로 돌아가서 해리를 먼저 만나고, 그다음으로 하면 될 거 같아요.”
“네, 알겠어요.”
레베카는 수철의 얘기를 들으며 다이어리에 조그만 글씨로 일정을 빼곡히 기록했다.
“며칠 프랑스 시골을 여행하고 싶다는 계획은요? 꼭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그건 스테파노 연습장에 방문하고 나서 하면 좋을 거 같아요.”“스테파노는 이탈리아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프랑스에서 진행한다고 들었어요.”
“아, 그렇군요.”
레베카는 빠르게 손을 놀려 일정을 수정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프랑스로 와야 하니까, 일정을 다 끝내놓고 여행하는 게 좋겠네요? 마에스트로 스테파노를 만나는 게 마지막 일정이니까요.”“네, 모든 일정을 다 끝내 놓고 편한 마음으로 여행하고 싶어요.”“좋은 생각이에요. 여행은 편하고 자유롭게 하는 게 좋잖아요? 그게 여행의 묘미죠.”
레베카는 여행의 맛을 잘 안다는 듯이 미소를 보였다. 수철도 끄덕였다.
“그렇게 해 보려고요.”“네, 알겠어요. 그럼 전혜미 소프라노 공연이 끝나고 이후 일정은 영국에 돌아가서 구체화시킬게요. 아무래도 거기 일정은 직접 만나서 조율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네.”
“음, 그리고…….”
사라는 볼펜으로 짚으면서 다이어리에 노트한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그럼 스테파노의 약속은 언제쯤으로 잡아 놓을까요? 제가 에이전시와 미리 통화해 놓을게요. 아무래도 마에스트로 스테파노는 바쁜 사람이니까요.”“다음 주말쯤이 좋지 않을까요? 편곡하고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네, 알겠어요. 그럼 큰 일정은 이렇게 잡고, 세부적인 일정은 제가 협의하고 조율한 다음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네.”
이야기를 마친 레베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창밖으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참 아름답네요. 저도 어릴 때 이런 곳에 살았는데.”
레베카의 우수에 찬 시선이 도시를 내려다보다가 멀리 보이는 수평선으로 향했다. 어릴 때 살던 동네를 추억하는지 눈빛이 깊어졌다.
* * *
“부장 승진한 거 축하해.”
박 대표와 이진석 차장이 오랜만에 막걸리집에 마주 앉았다. 박 대표는 이 차장의 잔에 막걸리를 가득히 따라 주고는 잔을 들어 부딪쳤다. 이 차장의 부장 승진을 축하하며.
이 차장은 시원하게 한잔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감사해요. 그리고 형님도 축하드려요, 사무실 넓은 데로 옮기셨다고요?”“직원들이 늘었으니까 비좁아서 옮겼지, 뭐. 이렇게 가다가는 직원을 더 뽑아야 할 것도 같고 해서.”
박 대표도 잔을 내려놓고 고등어 살을 한 덩어리 집어서 간장에 푹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BBC 방송 보셨죠?”
이 차장이 박 대표의 잔에 막걸리를 따르며 물었다. 박 대표는 고등어 살을 오물오물 씹으며 끄덕였다.
“응, 며칠 전에.”
“수철이 화면발을 잘 받더라고요. 아이돌이 아니라 웬만한 배우도 명함을 못 내밀겠어요. 말도 차분하게 잘하고요.”“화면발이야 외모가 받쳐 주니까 그런 거고, 말은 원래 잘했었어.”
“그래요?”
“응, 낯을 가려서 그렇지, 친한 사람들과는 잘해.”
박 대표는 말을 하다 말고 생각나는 게 있는지 피식 웃었다. 이 차장이 눈을 마주쳤다.
“왜 웃으세요?”
“재밌어서.”
“뭐가요?”
“방송 보니까 영어를 꽤 잘하더라고? 생각보다 말이야. 하하.”
“아, 하하.”
이 차장도 따라 웃고는 말을 이었다.
“수철은 유럽 일정이 끝나면 다시 호주로 가는 건가요?”“그럴 생각인 거 같아.”“한국에 돌아올 계획은 없고요?”“아직은 없는 거 같아.”
이 차장은 막걸리를 한잔 더 들이켜고는 내려놓았다.
“아쉽네요, 지금 들어오면 딱인데.”
“딱?”
“그렇잖아요? INTERSECTION 앨범 대박 나고, 칸 음악상 수상에, 사라 제이가 주제곡까지 부른다고 하고. 매일 수철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는데, 이럴 때 한국 와서 방송 좀 하고, 이벤트 좀 벌이면 좋잖아요? 상한가를 달릴 때 말이에요.”
이 차장은 고추를 된장에 찍어서 빙빙 돌렸다. 박 대표는 그 모습을 보며 팔짱을 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뭘 어떻게 하든 그건 다 수철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네.”
“그리고 흥행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지금 수철이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아직 상한가는 아니야.”
“그런가요?”
“그럼! 아직 수철이 제 면모를 확실히 보여 준 게 아니야. 내 말은 수철이 머지않아 정말 대박 작품을 내게 될 거라는 뜻이야.”
그 말에 이 차장은 고추를 입에 문 채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한입 베어 물고는 끄덕였다.
“네,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해요. 조만간 수철한테서 엄청난 뭔가가 나올 거 같아요. 세상을 들썩이게 할 뭔가가요.”
이 차장은 박 대표와 눈을 맞추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다시 몸을 세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번 SUNSET 앨범도 저희가 맡을 걸 그랬나 봐요.”
그 말에 박 대표도 기울였던 몸을 세웠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나도 예측을 못 했는데 뭐.”
박 대표의 말에 이 차장은 씁쓸한 미소로 끄덕이며 물었다.
“SUNSET은 계속 분위기가 좋죠?”“응, 옴니버스 앨범이라 큰 기대를 안 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찾아 듣는 사람이 많아.”“정말 의외네요. 형님도 흥행 면에서는 부정적이었잖아요?”“그랬었지.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팬 관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대체 이유가 뭘까요?”
이 차장이 만지작거리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정확한 분석을 할 수는 없지만, 감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어.”
“감성적이요?”
“사람들이 수철의 스토리를 듣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수철이 여행하며 느꼈던 감성을 공유하는 것 같다는 말이야. 특히 외국 젊은이들은 그런 경험이 한 번씩 다 있잖아? 고등학교 졸업하고, 혼자서 낡은 트럭을 몰고 여행하는.”
“…….”
토종 한국인인 이 차장은 공감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박 대표는 그런 이 차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앨범을 듣고 평을 적어 놓은 거 보면 장르가 다양해서 듣는 맛이 있다는 내용이 많아. 가사가 자신의 얘기 같다는 평도 많고.”
“…….”
“암튼 정확한 분석은 불가능해. 유럽에서 판매가 늘어나는 건 팩트고, 미국도 속도가 느리지만 반응이 올라가는 것이 사실이니까.”
이 차장을 팔짱 꼈던 팔을 풀고 막걸리 잔을 들어 입 앞에 댔다.
“어쨌든 아쉽네요.”
“뭐가?”
“이번 앨범에 참여하지 못한 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가수들 모아서 한국어 버전이라도 하나 하는 건데.”“아쉽긴, 다음 앨범에 하면 되지.”
이 차장은 들었던 잔을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사라 제이가 주제곡을 부른다는 소식도 그래요.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빨리 움직였을 텐데.”“알고는 있었잖아?”
“그래도 주제곡을 팝페라로 부를 거라는 생각은 못 했죠.”“잊어버려, 그건 어차피 처음부터 사라 제이의 몫이었어. 오래전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거기에다 사라는 월드 클래스잖아? 수철에게도 좋은 거지.”“네, 저도 그렇게 위안하고 있어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박 대표는 아쉬워하는 이 차장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INTERSECTION은 손익분기점을 넘겼다고?”“넘긴 지는 몇 주 됐고, 200%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어요.”
“하하, 빠르네?”
“초반에 빡세게 돌렸잖아요.”“하하, 대단해. 너희 회사 말이야.”“확신이 있으면 배팅을 하는 거죠.”“그 덕분에 부장 승진?”
“네, 뭐. 하하.”
이 차장은 입가에 묻은 막걸리를 닦으며 배시시 웃었다. 박 대표는 주전자를 휘휘 흔들어서 마지막 잔을 꽉꽉 눌러 담았다. 이 차장은 마지막 남은 고등어 살을 발라서 박 대표와 자신의 앞에 하나씩 먹기 좋게 나눠 놨다.
“수철은 어떻게 이렇게 많이 변한 거예요?”
“뭐가?”
“남들 앞에 서는 거 극도로 싫어하잖아요? 저는 무대 공포증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BBC 방송 보면서 배신감 들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방송 출연 말만 꺼내도 그렇게 질색하며 손사래를 치더니 말이에요.”“하하. 나도 처음엔 적응이 안 되더라고. 너무 급작스러워서 말이야.”“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지금도 어디 나서는 걸 좋아하지는 않아. 단지 상황이 변했으니까 피하지 않을 뿐이지.”“그렇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도망 다닐 이유가 없죠.”
이 차장이 마지막 잔을 들어 박 대표와 부딪쳤다. 박 대표는 쭉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고 이 차장이 가져다 놓은 고등어 살을 집었다.
“자꾸 피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지. 이젠 나설 때도 됐고.”“네, 맞는 말씀이에요. 어쨌든 전 한국에 있을 때랑 너무 달라서 의외였어요.”“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해. 수철은 그런 체질이 아니니까.”
박 대표는 고등어 살을 간장에 담가서 와사비를 묻혔다.
“그런데 뮤지션이 연예인처럼 자꾸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게 이해 안 된다는 수철의 말도 맞는 말이야. 회사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말이지만.”
“그건 그렇죠.”
박 대표는 마지막 고등어 살을 입에 집어넣고 이 차장과 눈을 마주쳤다.
“요즘 수철이 작품에 집중하고 좋은 성과를 걷어서 기분 좋은 것도 있지만, 난 무엇보다 수철이 껍질을 벗고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그래서 멀지 않아 엄청난 작품을 쏟아 낼 거라는 기대를 하는 거고.”
박 대표는 잔을 들어 마지막 한 방울의 막걸리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이 차장의 접시에 놓인 고등어 살 한 점을 바라봤다.
* * *
“잘 끝나셨어요?”
수철은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리며 다가오는 필립 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립 윤은 칸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인터뷰를 모두 마쳤다. 이제 칸 시즌이 끝났으니 다음 영화 개봉을 협상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한다.
“내가 작사가로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하.”
필립 윤은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 앉았다. 수철을 보며 이마의 땀을 한 번 더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