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85화 (185/239)

#185화. 파르테논 신전

필립 윤은 사라 제이의 발표 덕분에 마지막 인터뷰에서 가사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했다. 노래가 나오기도 전에 가사가 먼저 노출됐기 때문이다. 흥행을 위해 사라의 매너지먼트사가 가사 노출을 제안했고, 필립 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영화가 계속 이슈가 되니까. 수철에게도 물었지만, 수철은 관여할 이유가 없었다.

“이게 다 수철 씨 덕분이에요. 수철 씨가 나를 작사가로 데뷔시켰으니까. 하하.”“그럼 제 다음 앨범에도 가사를 좀 부탁드릴까요? 하하.”“거절할게요. 세상 사람들이 내 작사 실력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하하.”

필립 윤은 칸에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했다. 그동안 여러 영화제를 갔지만 이렇게 관심이 집중된 건 처음이라고 했다.

“수철 씨가 음악상을 받고, 사라가 주제곡을 부른다는 소식에 백자의 눈물이 기사에서 사라지지가 않아요. 덕분에 내 명성도 크게 레벨업됐고요. 하하.”

필립 윤은 이번 칸에서의 일정이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칸이랑 궁합이 잘 맞는데 여기서 살까요?”

칸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농담을 던지며 떠나는 걸 아쉬워했다.

수철도 그동안 필립 윤을 지켜보면서 그가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성장이 곧 그의 성장이니까.

“또 만나요, 수철 씨. 그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고요.”“네, 감독님. 조심히 가세요. 멀리서 항상 응원할게요.”

둘은 악수하며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깊은 포옹을 나눴다.

필립 윤은 레베카와도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미국이나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들었다는 말을 남겼다.

“안녕―!”

필립 윤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했던 칸을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손을 흔들며 행운을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칸 시즌의 뜨거웠던 열기는 필립 윤이 퇴장하며 모두 끝이 났다.

“우리도 떠날 준비를 할까요?”

“네.”

필립 윤이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철과 레베카는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칸을 떠날 준비를 했다.

* * *

“저기 돛처럼 생긴 가로등 보이지?”

할아버지 3인방과 레베카와 함께 전혜미 소프라노의 공연이 열리는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요트가 빼곡히 정박해 있는 항구에 도착하자 정 선생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뻗었다. 뾰족한 돛처럼 생긴 창 위에 빙 둘러서 매달려 있는 조명을 가리켰다.

“저게 가로등이에요?”“그래, 가로등이야. 저 가로등이 이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말해 주지.”

같은 프랑스인데도 마르세유는 칸과 많이 달랐다. 거대한 항구도시였다. 바닷가 도로 곳곳에 세워져 있는 날카로운 가로등이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남프랑스 최대의 상업 도시였다.

“여기가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야.”“그런데 건물들이 허름하네요?”

칸이랑 가장 차이 나는 첫인상이 그랬다. 건물들이 남루하고 오래돼 보였다. 두 번째로 큰 도시라는 말에 갸웃했다. 너무 관리를 안 하는 거 같아서.

“오래된 항구도시라서 그래. 그래서 도시 분위기가 거칠고 투박하지. 봐 봐, 사람들도 그렇잖아? 칸이랑은 많이 다르지.”

정 선생 할아버지의 말대로 거리의 사람들은 도시의 인상처럼 투박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말로는 항구에서 상업을 해서 먹고 살기에 꾸밀 이유가 없는 거라고 했다. 도시의 건물이 허름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수철은 프랑스의 어촌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출한데 배부터 채울까? 여기 왔으니까 ‘부야베스’를 한번 먹어야지.”

마르세유에서는 정 선생 할아버지가 앞장서서 가이드를 했다. 이곳에 몇 번 와본 경험이 있어서 도시를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은 편했다. 할아버지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맛이 어때?”

“나쁘지 않아요. 보기보다 맛있어요.”

이 동네 명물 요리라는 부야베스는 해산물 수프였다. 생선과 조개, 새우 같은 해산물을 넣고 팔팔 끓인.

“사프란이 녹으면 이렇게 노란색이 되는데, 이 향이 맛의 깊이를 더해 주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가 들어가서 이 음식이 풍미가 있고 유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수철은 특별하다는 걸 별로 못 느꼈다. 그래도 이곳까지 끌고 와서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는 정 선생 할아버지의 성의를 생각해서, 열심히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점심 한 끼를 때웠다. 다른 두 할아버지는 김치가 생각난다고 했고, 레베카는 처음 먹어 보는 음식에 기뻐했다.

“와, 저게 진짜 공연장 맞아요?”“그래, 파르테논 신전 같지?”

거칠고 투박한 도시라 공연장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사진에서나 보던 파르테논 신전 같은 콘서트홀이 도시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 크고 굵은 기둥이 받치고 있는 모습이 신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제야 예술을 사랑하는 도시라는 말이 실감 났다.

“저기 포스터가 있네요.”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두 팔을 벌리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전혜미 소프라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아마 지난 달 비엔나 공연 때 찍은 사진일 거야.”

고 선생 할아버지는 옆에서 사진을 보며 그렇게 추측했다.

수철은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돌아섰다. 예전에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줍어하던 그녀가 지금은 많은 관중 앞에서 당당하게 손을 쫙 벌리며 열창하고 있다.

웅성웅성.

공연장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붐볐다. 로비에도 브로슈어를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전혜미 소프라노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부른 노래의 곡명을 말하며 가슴에 손을 얹고 감동받은 모습을 연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인기 많은 소프라노인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되자 문이 열리고 저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콘서트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모습은 아까 항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일할 때는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일하고, 예술을 즐길 때는 수염까지 깔끔하게 가다듬으며 고고한 사람들로 변신하는 거 같았다.

일할 땐 일하고, 즐길 땐 즐긴다.

수철의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멋있게 보였다. 미소를 머금게 했다.

“자, 한 장씩 받아.”

수철과 일행은 전혜미 소프라노가 할아버지들께 보내 준 초대권을 나눠 갖고 입장했다.

* * *

“와―!”

콘서트홀 내부는 웅장했다. 다른 말로는 설명이 안 됐다. 마치 외형처럼 웅장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하…….”

그 어마어마한 모습에 할아버지들은 실소를 내뱉었고,

“정말 엄청나네요.”

레베카는 놀라움에 입이 한껏 벌어졌다. 에이전트를 하면서 많은 공연장을 가 봤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들 자리를 찾을 생각은 안 하고 예상을 벗어난 놀라움에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드넓은 콘서트홀의 내부를 구석구석까지 눈에 담느라 입을 다물 틈이 없었다.

“지난번에 네가 만났던 마에스트로 스테파노 있지?”

정 선생 할아버지가 자리를 찾아서 앉으며 어깨를 붙였다.

“네, 그분이 왜요?”

“그 사람이 전혜미 소프라노를 극찬했어, 천상의 목소리라고.”“아, 둘이 알아요?”

수철은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를 봤다.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서로 잘 알지. 특히 둘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만찬회에 참석해 친분을 나누곤 해. 전혜미 소프라노의 공연 때 마에스트로 스테파노가 지휘한 적도 있고.”

“아…….”

“그때 내가 이탈리아까지 공연을 보러 갔었거든. 그리고 만찬회 때 그 얘기를 들었었어. 전혜미 소프라노가 천상의 목소리라며 극찬하는 마에스트로 스테파노의 얘기를.”

수철은 할아버지의 얘기에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럼 지난번에 스테파노를 알아본 이유도?”“맞아, 그때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서 그런 거였어.”

수철은 유럽의 클래식 음악계가 좁다는 생각과 정 선생 할아버지가 발이 넓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녀는 정말 한국이 낳은 세계 최정상의 소프라노야. 수많은 오페라의 주역을 맡았고, 같이 공연하고 싶어 하는 음악가가 줄을 서 있어.”“그렇군요, 한국이 낳은.”

다른 말은 안 들어오고 이 말만 들어왔다. 며칠 전 수철도 들었던 말이다.

“전혜미 소르파노는 전형적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coloratura soprano)야.”

“콜로라투라?”

“무슨 말인지 모르지?”

“네.”

“화려하고 복잡하게 꾸며진 곡을 노래하는 소프라노를 가리키는 말이야. 소프라노 중에서 가장 높은 음역대를 갖고 있어서 고음역대에서는 플루트나 피콜로와 같은 악기 소리를 내지.”

그 말에 몇 명의 소프라노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할아버지들의 말대로 그들이 내는 고음역대는 플루트나 피콜로 같은 악기 소리를 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악기의 음색을 내는 만큼 노래를 장식적으로 부를 수가 있어. 거기에다 전혜미 소프라노는 리릭 소프라노야. 오페라에 등장하는 소프라노는 목소리의 질이나 창법에 따라 나뉘는데, 리릭 소프라노는…….”

할아버지는 말문이 터진 듯 자신의 지식을 뿜어냈다. 리릭 소프라노는 한마디로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보이스라는 뜻이었다.

수철은 클래식에 관한 정 선생 할아버지의 지식에 새삼 감탄했다. 괜히 클래식 음악가를 후원하고, 문화 사업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었다. 수철에게 뭔가를 알려 준다는 걸 즐거워했다.

“소리가 우아하고 화려해. 작은 볼륨의 고음 처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미묘한 감정 표현은 그녀가 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있어. 최고라는 뜻이지. 그녀의 섬세한 표현력에는 마에스트로들도 모두 혀를 내둘러.”

수철은 할아버지가 그녀의 에이전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보이스뿐만이 아니라 평단의 반응도 꿰고 있었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수철은 할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했다.

“이따 보면 알겠지만 오케스트라도 명불허전, 최고야.”

할아버지의 이 말을 끝으로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될 분위기가 조성됐다. 사람들은 자세를 가다듬고 시선을 무대에 고정했다.

짝짝짝!

흰머리가 섞인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지휘자가 연미복을 입고 등장해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인사와 함께 드디어 공연의 막이 올랐다. 그의 뒤로 70명의 연주자가 각자 악기를 들고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대한 콘서트홀답게 연주자들의 구성도 거대했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짝짝짝!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전혜미 소프라노가 무대에 나타났다. 그녀는 치마가 불룩한 파란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드레스에는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의 꽃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금방 숲속에서 뛰어나온 요정 같았다.

―KOMMT EILET UND LAUFET!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의 곡.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정적으로 물들었을 때,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이 움직이며 그녀가 입을 벌렸다. 그녀의 울림은 파르테논 신전의 공간 구석구석을 진동하며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몰입의 눈을 반짝였다.

―예수님을 매장한 무덤으로 가자!

공연은 1, 2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1부는 전혜미 소프라노의 음악적 깊이를 보여 주는 시간이었고, 2부는 그녀의 음악적인 폭을 보여 주는 시간이었다.

1부에서는 정 선생 할아버지의 말대로 그녀는 소프라노의 최고봉을 보여 줬다. 소리의 울림이 그녀의 몸 안에서 어떻게 진동하는지 연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수철의 가슴을 두드렸다.

“1부의 곡들은 주로 헨델 시대 이전의 고악(古樂)이야.”

정 선생 할아버지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계속해서 자신의 지식을 수철에게 나눠 줬다.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이어진 2부는 1부와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정통 클래식을 넘어서 드럼과 퍼커션 같은 현대 타악기까지 등장하며 샹송과 오페라의 곡들도 선보였다. 그녀는 첫 곡에서 화려한 드레스에 가면무도회를 연상케 하는 눈만 가린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그녀가 팔을 벌리며 고음역을 뿜어내는 사이, 옆에서 지휘자는 열심히 지휘봉을 움직였고, 그녀의 등 뒤로는 일렬로 쭉 앉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머리를 튕기며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활을 밀고 당겼다. 수철의 자리에서 이 모습은 하나의 장면으로 잡혔다. 역동적이었다. 대중음악의 공연에서 봤던 그 어떤 무대도 넘어섰다.

수철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오페라 극장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찌감치 전 석이 조기 매진이 된 이유가 있었다. 공연 내내 다이내믹이 넘쳐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짝짝짝!

곡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의상도 갖가지 화려한 의상으로 바뀌었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를 치다 보면 다시 연주가 이어지고, 그러다 어느새 드레스를 갈아입은 그녀가 등장하고. 눈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바꿔 입었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마치 오페라에서 여주인공이 퇴장하듯 천천히 무대에서 사라졌던 그녀가 새로운 곡의 분위기에 맞춰서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모델 같았다. 팬서비스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최고의 감동은 그녀가 뽑아내는 소리였다.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소리는 모든 사람의 심장을 꽉 틀어쥐고 놓지를 않았다. 그 감동은 무대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드디어 나오는군.”

마지막 곡의 전주가 시작되자 정 선생 할아버지가 어깨를 붙이며 속삭였다.

수철은 대꾸 없이 끄덕였다. 수철의 귀에도 익숙한 전주였다. 바로 자신이 그려 줬던 그 멜로디와 화음이었다. 수철은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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