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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돌아왔다-187화 (187/239)

#187화. Goodbye, Grandpas

“볼 때마다 너무 놀라워요.”

“…….”

“칸에서 음악상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까지 질렀어요.”

그녀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뻤다고 했다. 감격스러워서 두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무대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는…….”

수철의 수상 소감을 듣고는 밤새 손수건을 적셨다고 했다. 자신의 부모님이 생각나서.

말을 하는 그녀의 눈가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이런 분이었나?

수철은 전혜미 소프라노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노래를 잘하는 성악가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단순히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물론 소프라노를 하려면 그래야겠지만.

사라와 전혜미, 둘 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터뷰한 기사도 봤는데…….”

그녀는 수철이 칸에서 겪은 일을 꿰고 있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칭찬과 감탄에 수철은 무색해졌다. 공연을 잘 봤다는 인사를 건네러 왔는데 거꾸로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게다가 그녀가 쉴 새 없이 말을 해서 껴들 틈도 없었다.

할아버지들은 이 모습을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칭찬을 멈출 생각은 안 하고 당황해하는 수철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들이 수철을 이곳까지 끌고 왔다고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공연 잘 봤어요. 너무 좋은 무대였고, 감동적이었어요.”

결국 수철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축하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뒤늦은 수철의 인사에 그녀는 다시 가슴에 두 팔을 얹고 감동하는 표정을 보였다. 눈빛은 오래된 연인이라도 만난 듯 한없이 깊어졌다.

누군데 저러지?

작별 인사를 하려고 대기실 한쪽 편에 앉아 있던 연주자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누군데 전혜미 소프라노가 저렇게 감탄하는지 호기심이 가득했다. 수철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누군지 몰라서 갸웃했다.

“만찬회장에서 다시 뵐게요. 그때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눠요.”

매니저가 기자들과 인터뷰할 시간이 됐다고 알리자 잔뜩 흥분됐던 분위기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수철은 저녁 만찬회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할아버지들과 대기실에서 나왔다.

“공연을 마친 지 얼마 안 돼서 감정이 올라와 있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까지 만났으니 기분이 고조될 수밖에.”

정 선생 할아버지는 대기실을 벗어나면서 조금 전의 분위기를 그렇게 말했다.

“저기!”

대기실 밖에 나오자 아까 말을 걸었던 기자가 수철에게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레베카가 빠르게 다가오자 금세 멈췄다. 곧이어 전혜미 소프라노가 대기실 밖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는 그녀와 수철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전혜미에게로 달려갔다. 뒤에서 레베카가 매서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수철은 레베카의 손에 이끌려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몇몇 외국 기자들이 수철을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레베카는 따로 방을 잡고, 수철은 우리랑 같이 있는 게 어때?”

“어딜요?”

“우리 방이 스위트 룸이라 넓잖아.”“넓어도 침대가 3개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응, 그중에 하나는 퀸사이즈야.”“어쨌든 안 되잖아요? 3개면?”“네가 하나 써. 난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에이, 그럴 순 없죠.”“그게 불편하면 나랑 같이 퀸사이즈에서 자든지.”

“…….”

“싫어?”

“됐쓰요.”

“됐쓰요?”

“싫다고요. 저도 그냥 방 하나 잡을게요.”

할아버지들은 레베카만 따로 방을 잡고 수철은 자신들과 스위트 룸에서 지내자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떨어져 있는 건 좋지 않은 생각이라며 창밖의 멋진 경치를 보며 와인도 한잔하자고 했다. 하지만 수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불편하기도 하고, 혼자서 편히 쉬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아래층에 방을 하나 더 얻었다.

“저기 내려오는군.”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시간에 맞춰서 호텔 로비에 다시 모였다.

레베카가 깔끔한 파티복을 입고 내려오자 일행은 모두 리무진에 올랐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즐기러 출발했다.

* * *

“하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만찬회장에서도 할아버지들의 인맥은 장난이 아니었다. 몇몇 마에스트로가 할아버지들을 발견하고는 두 팔을 벌리며 반갑게 다가왔다. 그리고 전혜미 소프라노는 할아버지들에게 만찬회장에 온 많은 사람을 일일이 소개했다. 역시 후원자의 힘은 컸다.

“축하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만찬회장에서도 칸 영화제 수상 소식은 단연 화제였다. 사람들이 수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영화음악에 관해 얘기하기를 원했다. 자신들도 영화음악을 하고 싶다며 방법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달랑 하나 한 수철에게.

“질투 났었어요.”

전혜미 소프라노가 다가오며 느닷없이 툭 내뱉었다.

“네? 그게 무슨……?”

수철은 잘못 들었나 했다.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아해하는 수철을 보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사라 제이 말이에요.”“사라 제이요? 그분을 아세요?”“당연히 알죠. 지금은 팝페라 가수지만 예전에 소프라노를 하셨잖아요? 그래서 친하기도 하죠.”“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질투를?”“호호, 주제곡을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랬어요.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나더라고요. 알았으면 제가 먼저 러브콜을 보냈을 건데. 아이고 원통해라. 호호.”

그녀는 원통하다며 짓궂은 얼굴로 가슴을 톡톡 쳤다. 수철은 그녀의 말이 진심인 거 같아서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어머, 설마 놀라신 거예요?”“네? 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다음 순서를 기다릴게요. 호호.”

“…….”

“수철 선생님 곡을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요?”“……팝페라는 안 하시잖아요?”

수철은 주저하다 궁금함에 물었다.

“할 수도 있죠, 선생님 곡이라면 언제든지요.”

“…….”

그녀는 계속해서 수철에게 경외심을 드러냈다. 사라 제이를 칭찬하면서도 순간순간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수철은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칭찬이 과하기도 하고, 그녀의 눈빛이 너무 반짝여서 오해를 살 거 같았다. 더군다나 오늘의 주인공은 수철이 아니라 그녀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았다.

“잠시만 할아버지들께 좀 다녀올게요.”

“네, 그러세요.”

그제야 그녀는 방긋 웃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멀리서 그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녀가 다가오자 환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철은 그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들이 있는 테이블로 발걸음을 돌렸다.

“수철아, 마침 잘 왔어.”

“왜요?”

“단체 사진 한 장 찍자.”

“단체 사진이요?”

“그래, 우리 칸에서도 사진 한 장 찍지 않았잖아? 그래도 프랑스까지 왔는데 사진 한 장은 찍어야 하지 않겠어?”

“여기서요?”

“내일 아침엔 각자 제 갈 길로 가야 하니까 지금 찍는 게 낫지. 옷도 갖춰 입은 김에 말이야.”

“네, 알았어요.”

수철은 느닷없이 사진을 찍겠다는 상황이 생뚱맞았지만 그래도 추억을 남겨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며 옆에 섰다.

“레베카 양도 이리 와요.”

신 선생 할아버지는 레베카를 부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 있는 전혜미 소프라노에게 손을 흔들어 그녀까지 불렀다. 결국, 모두가 다시 모여 단체 사진을 찍게 됐다.

―하나 둘 셋, 김치!

할아버지들은 전혜미 소프라노와 돌아가며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수철도 끌려가서 할아버지들과 한 장씩 찍었다. 기념이라며 레베카와도 사진을 찍었다.

할아버지들이 찍은 사진을 돌려 보며 히죽거리고 있을 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노신사가 다가왔다. 그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부터 멀리서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소개해 드릴게요.”

그를 발견한 전혜미 소프라노가 손을 흔들어 그를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는 수철을 봤다.

“아까부터 수철 씨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었던 분이에요. 이분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던 그 사람은 바로 세계적인 바리톤 토머스 햄프슨이었다. 그녀가 소개하는 토머스의 이력은 기억하기가 힘들 정도로 화려했다. 현역 바리톤 중 세계 최고라고 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선생님이 멘토셨어요. 파트가 다르지만 선생님께 음악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배웠죠.”

그녀는 말을 하며 토머스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눈에도 둘은 오래된 소울메이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여기 이분이 오늘 저의 마지막 곡을 작곡하신 바로 그분이세요.”

그 말에 토머스는 수철을 자세히 봤다. 마치 수철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선생님, 그것 아세요?”

“뭘?”

“그 멜로디 있잖아요? 그거 수철 씨가 즉흥적으로 만든 거예요. 제가 그걸 듣고 반해서 부르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낸 거고요. 호호.”

전혜미 소프라노의 웃음소리와 함께 수철을 보는 토마스의 눈이 깊어졌다. 토마스는 수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파리는 왜 가시는 거예요?”“만날 사람이 있어. 비즈니스 문제로.”

할아버지 삼총사와 수철과 레베카는 이른 아침 햇살을 맞으며 마지막 Breakfast를 같이했다.

수철의 물음에 답한 정 선생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뗐다.

“동양인 클래식 연주자에 관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이 있어서 만나 보려고 가는 거야.”

“아…….”

역시 글로벌한 할배들이다.

“너도 나중에 생각 있으면 말해.”

“뭘요?”

“음악 관련한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말이야. 투자할게.”

“싫어요.”

“왜? 필립 감독과 같이 하나 만들면 좋을 거 같은데? 네가 직접 출연해도 좋을 거 같고.”

“싫어요.”

“너는 뭔 말만 하면 싫대?”

킥킥.

할아버지가 머리를 저으며 이죽거리자 레베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댔다. 그 모습을 본 정 선생 할아버지가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베카 양도 나한테 명함 한 장 줘야지? 이것도 인연인데 알고 지내면 좋잖아. 앞으로 자주 볼 수도 있고.”“네, 당연히 드려야죠.”

레베카는 두 손으로 공손히 명함을 내밀었다.

“할아버지들 만나서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감사드려요.”

그 말에 할아버지들의 인상이 동시에 푸근해졌다. 레베카가 예뻐서 볼이라도 꼬집어 주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수철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레베카 보고 좀 배워.”

“뭘요?”

“어른을 섬기는 법 말이야.”

“…….”

“어른은 저렇게 섬기는 거야. 마음으로.”

“…….”

으으윽.

수철은 따가운 시선을 피해서 기지개를 켰다.

“이제 슬슬 출발할까?”

아침을 먹고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슬 이별을 시작했다.

“파리에서 일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가시는 거예요?”“아니, 며칠 머물며 박물관이랑 예술관을 둘러볼 거야. 파리에 갔으면 루브르도 들르고, 근대 미술관도 들러야지.”“얼른 한국 가서 막걸리 드시고 싶지 않으세요? 파전에?”“왜 또 그래? 잘 참고 있는데.”

정 선생 할아버지가 눈을 치켜떴다. 수철은 할아버지의 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하하, 농담이에요. 조심히 잘 다니시고 건강히 돌아가세요.”“추워지면 따뜻한 호주로 날아갈 테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섭섭해해야 하나요?”“넌 마지막까지…….”

* * *

영국으로 돌아온 수철은 하루 휴식을 취했다. 공원을 산책하며 가벼운 운동을 하고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 그동안 사람들 만나고 도시를 이동하느라 피로가 쌓여 있었다.

수철이 쉬는 동안에도 레베카는 계속 바빴다. 그동안 있었던 상황을 회사에 보고하고 영국에서의 일정을 다시 재조정했다.

―일정을 좀 조정해야 할 거 같아요.

아침을 먹고 나자 레베카가 전화를 해 왔다.

“어떻게요?”

―사라 제이를 먼저 만나고, 그다음에 해리를 만나야 할 거 같아요.

“이유가 있나요?”

―해리가 수철 씨를 자신의 바닷가 별장에 초대하고 싶대요. 거기서 자신의 가족과 바비큐 파티를 하며 술 한잔하고 싶다는 얘기죠.

“가족들을 만난다고요?”―네, 이런 초대는 영국에서는 일상적인 것이에요. 친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요.

밖에서 가볍게 한잔하자는 거로 알았는데, 가족들과 같이 바비큐 파티를 하자니. 좀 부담스러웠다.

“음, 레베카의 생각은 어때요?”―저는 밖에서 만나는 것보다 이런 파티가 더 좋은 거 같아요. BBC 방송과 칸 영화제, 그리고 사라의 인터뷰 이후 수철 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술집보다는 별장으로 가는 게 훨씬 좋죠. 거기에다 바다는 수철 씨가 좋아하는 곳이잖아요?

그 말에 수철은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잡아 주세요.”―정확한 시간은 다시 해리와 통화 후 알려 드릴게요. 참고로 지난번에 봤던 ECM 마케팅팀장과 저 정도만 참석하는 거예요. 해리 가족

외에는요.

“네, 알겠어요.”

―그럼 해리와 약속을 뒤로 미루고, 먼저 사라 제이의 녹음실을 방문하는 일정을 잡을게요.

“네.”

* * *

“수철 씨! 저 깜짝 놀랐어요!”

녹음실에 들어서자 사라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표정과 달리 깜짝 놀랐다며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수철은 환하게 웃는 사라를 보며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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