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88화 (188/239)

#188화. 참고만 하세요

“며칠 전에 ECM에 갔다가 해리를 만났어요.”

“아, 그랬군요.”

수철은 해리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알아챘다. 해리가 수철에 관해서 얘기를 늘어놓았을 게 뻔했다.

“그날 CD도 두 장 선물 받았어요. 수철 씨 CD요.”

사라는 컨트롤 룸 믹서 옆에 있던 CD를 들어서 수철에게 보여 줬다. ‘ABYSS’와 ‘INTERSECTION’ 앨범이었다.

“해리가 절 보자마자…….”

해리는 사라가 수철이 만든 주제곡을 부르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철의 다른 음악을 들어 보라며 CD를 내밀었다. 사라는 수철의 음반이 빅히트를 쳤음에도 그때까지 수철의 음악은 백자의 눈물 주제곡을 제외하고는 모르고 있었다. 필립 윤에게 얘기는 들었지만, 한국에서 낸 앨범이라고 생각하고 굳이 찾아서 듣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해리가 수철의 광팬이라며 앨범을 선물한 것이다. 사라가 놀랐다는 건 수철의 음악을 듣고 놀랐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음악이 이렇게 색채가 다양할 수 있죠? 저 정말 놀랐어요. 수철 씨 같은 작곡가는 처음 봤거든요. 갖가지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을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사람을요. 거기에다 실험적인 음악까지. 수철 씨는 정말, 와.”

수철은 사라에게서 전혜미 소프라노의 모습을 봤다. 그녀를 또 한 번 보는 것 같았다. 둘은 같은 음역대의 가수여서 그런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사실 저는 재즈나 대중음악은 잘 모르거든요.”

사라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

“그런데도 수철 씨 음악은…….”

수철은 사라가 음반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얘기하는 것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저 완전히 빠졌어요. 그래서 매일 듣고 있어요. 제가 어떤 기분인지 아세요? 음악의 폭이…….”

사라는 수철의 앨범에 빠져서 매일 듣고 있다고 했다. 들을 때마다 음악의 폭이 넓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런 앨범을 또 낼 계획이 있다면 자신에게도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반드시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오늘은 우선 주제곡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한다.

“편곡을 다 하셨다고 들었어요.”“아, 참! 그 얘기부터 해야 하는데 다른 얘기가 길었네요. 호호.”

사라는 가벼운 웃음을 보이고는 모니터에서 주제곡을 편곡한 트랙을 찾았다. 거기에 마우스를 올려놓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수철 씨의 의견을 듣고자 해서 오늘 오시라고 한 거예요. 편곡하고 녹음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데모 버전이에요. 수철 씨가 들어 보고 좋은 의견을 주시면 참고해서 수정해 보려고요.”“아, 네. 그럴게요.”

“아무래도 수철 씨가 만든 멜로디니까 악기 편곡을 다르게 했다고 해도 수철 씨의 느낌은 다를 거 같아요. 수철 씨에겐 자식 같은 곡이잖아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철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네, 한번 들어 볼게요.”

사라는 다시 등을 돌려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러자 큰 선반 위에 놓인 양쪽 모니터 스피커에서 화려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데모지만 그녀의 명성에 걸맞게 최고 연주자들이 편곡하고 연주해 놓은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음.

수철은 리듬에 맞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사라 제이를 염두에 두고 팝페라로 편곡되어 있었다.

“어떠세요?”

음악이 끝나자 사라는 수철이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며 물었다.

“훌륭해요. 악기는 바뀌었지만, 원곡의 느낌이 잘 살아 있어요.”

한국의 악기가 서양의 악기로 모두 바뀌어 있어서 소리가 주는 분위기는 원곡과 많이 달랐다. 하지만 멜로디가 살아 있는 탓에 여전히 원곡이 가진 한국 특유의 정서는 남아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라를 보며 수철은 말을 이었다.

“혹시 노래를 불러 보실 수 있나요? 악기와 보이스가 어떻게 교감하는지 들어 보고 싶어요.”“네, 불러 볼게요. 하지만 아직 연습이 충분하지 않아요. 참고하고 들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사라는 옅은 미소를 보이고는 컨트롤 룸 밖으로 나갔다.

* * *

부스 안에 들어간 사라는 헤드폰을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주가 시작되자 익숙한 포즈로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지휘하듯이 움직이며 노래를 시작했다.

I won't let go of your hand―

수철은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눈앞에서 들었다.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노래에 집중하는 모습이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서 왜 오랜 시간 동안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엔 마법이 숨어 있었다.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로 손을 내밀어 유혹하고는, 그 소리에 홀려서 가까이 온 사람을 강력한 힘으로 잡아 끌어들이는 마법이 있었다. 호소력과 중독성 강한 색채의 목소리. 그녀에겐 그게 둘 다 있었다.

To be near you. To― be― near― you―

노래가 끝나고 그녀는 한껏 고조되었던 감정을 추스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헤드폰을 벗고 부스 안에서 수철을 바라봤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향해 박수 치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무대에서 인사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머리를 까딱했다.

* * *

“노래 잘 들었어요. 사람들이 왜 사라를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아요.”

컨트롤 룸으로 들어오는 사라를 보며 수철이 미소를 보였다. 사라는 기분이 좋아서 들어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입이 더 벌어졌다.

“고마워요, 수철 씨. 수철 씨에게 듣는 칭찬은 그냥 칭찬이 아니라 감동이에요. 나에게 든든한 에너지가 돼요.”

사라는 한껏 들떠서 말했다. 수철이 표정을 바꿨다.

“그런데 사라.”

“네?”

“악기가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얘기해도 될까요?”

수철은 사라의 노래를 듣다 보니 반주에서 귀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사라의 노래를 잘 받치지 못하고 튀는 것 같아서 밸런스가 귀에 거슬렸고, 한편으로는 좋은 연주가인 거 같은데 곡을 충분히 이해 못 하는 거 같아서 아쉬웠다.

“네, 얘기해 주세요.”

사라는 흔쾌히 끄덕이며 의자를 끌어와 가까이 앉았다. 수철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기타가 좀 거친 거 같아요. 데모라서 그렇겠지만 그것보다 보컬의 선율에 대한 이해도가 좀 떨어져 있어요.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에요, 조금만 손보면 괜찮을 거 같아요.”

그 말에 순간 사라의 표정이 굳었다. 데모라고 했지만,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연주한 것이었다. 사라는 마른 입술을 적시고는 다시 눈을 마주쳤다.

“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사라는 얼굴색을 감추며 물었다. 의자를 당겨 앉으며 수철에게 좀 더 집중했다.

“음, 우선 가장 부딪치는 부분을 얘기하면 16번째 마디의 기타와 보컬이 같이 들어가는 부분, 그리고 34번째 마디의 보컬의 뒤에서 기타가 리듬을 치는 부분, 그리고 두 번째 후렴구가 반복되는 128번째 마디예요. 128번째 마디는 곧 절정으로 넘어가는데, 제가 듣기엔 좀 심한 거 같아요.”

“…….”

사라는 대꾸할 생각은 잊은 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수철에게 악보를 준 적이 있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악보를 넘기며 말하는 것 같아서.

사라의 머릿속은 놀라움을 넘어 혼란에 휩싸였다. 수철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16, 34, 128번째 마디??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머릿속으로 곡을 재생시켜 보다가 일찌감치 포기했다.

수철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크게 거슬리는 부분만 말하면 그 정도예요. 다른 부분들도 좀 고쳤으면 하는 부분이 있고요.”

“…….”

“연주는 훌륭한데 자만심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자만심이요?”

사라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수철은 눈을 맞추며 끄덕였다.

“네, 자신이 연주를 잘한다고 지나치게 믿고 있는 거 같아요.”

“……!”

사라는 대꾸하지 못하고 동공의 움직임을 멈춘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세션으로 참가한 기타리스트가 연주할 때가 떠올랐다. 그는 늘 그렇듯이 자신의 스타일로 편하게 연주했고, 아무도 그에게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며 주제곡 한번 듣고, 편곡된 악보 한번 보고는 즉흥적으로 연주를 했다.

다들 엄지를 세웠었는데.

세션이 끝나고 좋은 연주였다며 모두 그를 칭찬했었다. 그때 칭찬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 한 명은 바로 사라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수철은 딴지를 걸고 있다. 아니, 딴지가 아니라 마디 수를 정확히 짚으며 미세하게 거슬리는 부분까지 잡아내고 있다. 그러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수철은 이런 사라의 혼란스러움을 해소해 주고자 나섰다.

“제가 한번 쳐 볼까요?”

그 말에 사라의 동공이 다시 떨렸다. 수철은 직접 쳐서 들려주며 사라의 이해를 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라는 그러기도 전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기타를 친다고요?”

“네.”

“정말 기타도 칠 줄 아세요?”

사라는 믿지 못하겠다며 되물었다. 최고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지적하며 자신이 직접 쳐 보겠다니. 대체 기타는 또 얼마나 잘 치길래?

“조금요.”

수철은 사라가 자꾸 되묻자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

“그럼 기타를 가져다드릴까요?”“네, 어쿠스틱으로요.”

“잠시만요.”

사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컨트롤 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쿠스틱 기타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스탭에게 기타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ㅡ여기요.

잠시 후, 사라가 기타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수철에게 건네고는 테이블 위에서 악보를 찾았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뒤돌아봤다.

“……혹시?”

“……?”

“악보가 없어도 돼요?”

“네, 괜찮아요.”

“……!”

마디 수를 다 기억하고 있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였다.

“편곡이 바뀐 부분이 많은데 정말 안 봐도 되겠어요?”

“네, 괜찮아요.”

수철은 사라의 놀란 표정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품에 안은 기타 줄을 세심하게 조율했다.

사라는 찾던 악보를 내려놓고 수철과 마주 앉았다.

컨트롤 룸 밖에서는 사람들이 복도에 모여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다.

조율을 마친 수철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치는 거는 참고만 하시고, 나중에 정식으로 녹음할 때 제대로 하시면 좋을 거 같아요.”“네. 그렇게 할게요.”

사라는 수철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 서둘러 대답했다.

“그럼 쳐 볼까요?”

“네.”

퉁―

사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철이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수철은 자신이 만든 주제곡 멜로디 라인을 먼저 쭉 한번 연주한 뒤, 그 느낌을 살려서 사라가 편곡한 분위기로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사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복도에서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번쩍 뜬 채 서로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타 파트는 아까의 편곡대로 연주하며 기타가 없는 파트는 리듬을 넣으며 분위기를 살리고 있었다.

“여기가 16번째 마디고요.”

수철은 아까 지적했던 부분의 마디 수를 짚으며 자신이 다르게 치고 있다는 걸 알렸다. 사라는 한눈에도 노래를 부르기 편해졌다는 걸 알아챘다. 수철의 연주는 튀거나 하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돌출된 부분이 말끔해져서 보컬이 노래하기 편하게 해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멜로디의 움직임은 화려했다. 멋있고 그루브하지만 튀지는 않았다.

“이제 34번째 마디예요.”

수철의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구간을 통과하는 것처럼 계속 마디 수를 짚으며 나아갔다.

“사라, 이 부분부터는 한번 불러 보세요.”

수철은 반주하며 사라의 노래를 유도했다.

I won't let go of your hand―

사라는 수철의 반주에 맞춰 나지막이 허밍으로 노래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잔뜩 눈에 힘을 준 채 서로의 눈동자를 보며 끄덕였다. 노래와 기타가 착착 감겨서 돌아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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