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역제안
“경치 정말 좋네요.”
수철은 레베카와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해리가 초대한 별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오픈카에서 지나가는 바다의 경치를 보며 감탄하는 수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저기 같아요.”
한참을 달리던 레베카가 속도를 줄였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멀리 보이는 바닷가 별장을 가리켰다.
“호호, 저기 나와 계시네요.”
해안 도로를 따라 별장 가까이 다가가자 도로변에 나와서 손을 흔드는 해리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해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수철과 레베카를 반겼다.
“자, 들어가죠.”
수철과 레베카도 반갑게 인사하고는 해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와, 진짜 멋있어요. 이런 데서 있으면 정말 힐링이 되겠어요.”
시선을 옮기며 두리번거리던 레베카가 수철에게 어깨를 붙이며 속삭였다.
해리는 이 말을 들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뒤돌아보더니 바다로 연결된 거실의 큰 유리창을 열었다.
와―!
레베카의 눈이 더 커졌다. 여기야말로 장관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나무 바닥으로 된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바다를 향해 쭉 뻗은 넓은 테라스에는 파라솔과 썬베드가 있어서 누워서 석양이 지는 노을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한쪽 편으로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작은 수영장도 있었다. 바다를 보며 휴식을 취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본 적이 없다. 여기서 며칠 지내면 피로가 모두 가시고 새로운 힘이 생길 거 같았다.
“여기가 우리 가족의 에너지 충전소예요.”
별장을 구경하는 수철에게 해리는 그렇게 말했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가족들의 충전소라는 말.
잠시 후 해리는 이 층에서 내려온 가족들을 소개하고, 팀장이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바비큐를 하기 시작했다. 바비큐 판에 고기와 소시지 양파 등을 올리고 뒤집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TV에 나오는 셰프의 동작을 흉내 내며 소금을 뿌렸다.
“하하.”
“호호.”
해리는 요리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대화를 주도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해리의 재치 있는 입담에 웃음을 쏟아 냈다.
“우린 잠시 바닷가 구경할까요?”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자 해리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철을 불러냈다. 맥주를 따서 내밀었다. 수철은 맥주를 받아 쥐고 해리를 따라나섰다.
둘은 모래사장으로 연결된 돌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간 해리는 신발을 벗어 놓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수철도 따라서 맨발로 걸었다.
“참 아름답죠?”
“네.”
해리의 시선은 낮은 파도 위를 나는 갈매기 한 쌍을 보고 있었다. 그 위로는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어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기 바다는 내가 어릴 적부터 뛰어놀던 곳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낚시를 좋아하셔서 이곳에 별장을 지으셨거든요. 노후를 이곳에서 보내셨죠.”
해리는 잠시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봤다.
“어렸을 때부터 놀던 곳이라서 조개껍데기 하나도 다 친숙해요.”
해리는 평온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의 얘기를 듣는 수철의 마음도 평온해졌다.
“저도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좋아요.”
그 말에 해리는 수철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마음에 들면 언제든지 와요. 수철 씨에겐 항상 열려 있으니까요.”
예의상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해리의 눈빛이 그랬다. 수철과 그 정도의 친분을 나누고 싶은 모습이었다. 수철은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다. 듣기 좋은 말이면서도 조금은 부담이 됐다.
잠시 대화 없이 바다를 거닐던 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철 씨, 그런 앨범 한번 해 보고 싶지 않아요?”
“어떤 앨범이요?”
“장르뿐만이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는 앨범이요.”
“…….”
수철은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시선을 모래사장에 둔 채 말없이 몇 걸음 내디뎠다. 해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다.
해리는 클래식의 유명한 고전들을 재즈로 풀어내는 시도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거였다. 단순한 크로스 오버나 곡의 재해석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동안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앨범에 도전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거였다.
수철은 지난번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해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때 수철은 별다른 대꾸 없이 지나갔었다. 계획에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해리가 수철의 생각을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인 만큼 어떻게든 답을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런 이유로 별장으로 초대하고 바다를 걷자고 한 것일 테니까.
“시간은 클래식 고전을 말씀하시는 거고, 공간은 유럽의 음악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음악들까지 다 포함시키자는 말씀이신 거죠?”
“네, 맞아요.”
해리는 자기 생각을 정확히 파악한 수철을 보며 끄덕였다.
“제 생각에 수철은…….”
해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앨범에 대한 그림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수철이 승낙만 하면 연주자 섭외부터 제작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알아서 준비할 거라고 했다. 수철은 음악만 풀어내면 된다고 했다.
“박 대표님께서 수철에게 모든 걸 맞춰 주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해리는 갑자기 박 대표의 얘기를 꺼냈다. 박 대표가 수철의 뜻을 다 받아 주고 있으니 결정은 수철이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지만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해하지는 말아요. 수철이 싫다면 더 제안할 생각은 없어요. 난 단지 수철과 박 대표님의 관계가 부러워서 그런 거예요.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거든요.”
수철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란 게 느껴졌다. 해리는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줬다.
“수철은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어요. 아니, 수철만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해리는 오랜 시간 음반 업계에서 일해 온 본능적인 감각으로 확신했다.
음.
사실 해리의 제안은 수철에게도 솔깃한 얘기였다. 한 번쯤은 시간을 내서 재즈가 아니더라도 클래식 고전을 자신이 받은 느낌대로 풀어내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아직은 그런 계획을 세울 시간의 여유가 없다. 게다가 해리가 말하는 앨범은 수철이 생각하는 앨범과는 방향이 조금 틀어져 있었다.
“수철이 승낙만 하면 우리 팀이 일찌감치 이슈를 만들어서 분위기를 조성할 거에요. 기왕이면 많은 사람이 듣는 게 좋잖아요. 수철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작업하면 좋고요.”
해리는 음악적인 도전을 얘기하다가 결국은 흥행을 얘기했다. 수철은 그것이 직업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행을 염두에 두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순서가 잘못됐다. 음악이 먼저고, 흥행이 두 번째다. 그게 아니면 도전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수철이 만들고자 하는 앨범은 흥행이 먼저가 아니다.
“제가 얼마 전 마르세유에서 한 소프라노의 공연을 봤었어요. 그때…….”
수철은 전혜미 소프라노의 공연을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 선생 할아버지가 알려 준 리릭 소프라노의 특징을 보면서 재즈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클래식 고전들을 재즈로 풀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바흐의 곡들은 락 음악 같았다. 그래서 수철은 바흐가 현대에 태어났으면 분명 훌륭한 락 뮤지션이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흐를 포함한 그 시대 사람들의 음악에 현대적인 옷을 입히면 재미있는 곡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풀어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었지 앨범으로 만들어서 발표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전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여러 뮤지션을 기억하며 연주하고 녹음했듯이 고전도 그렇게 하나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을 뿐이었다.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요.”
음반을 만들어서 발표할 생각이 없다는 말은 뺐다. 해리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나중이라면 언제쯤……?”“그건 잘 모르겠어요.”
“…….”
수철은 아쉬워하는 해리의 눈빛에서 이 앨범에 그의 욕망이 끼어 있다는 걸 느꼈다. 자신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무언가를 수철이 풀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철은 그럴 생각이 없다. 해리의 욕망에 끌려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앨범을 하더라도 주체적으로 하는 거다. 타인의 욕망을 대신 채워 줄 생각이 없다. 그렇게 시작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음악은 그런 것이다. 소리에 대한 욕망의 출구가 같을 수는 없다. 해리의 아바타가 될 생각은 없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 모래 밟는 소리만 들렸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수철이 역제안을 했다.
“한국 전통 음악을 재즈로 바꿔 보는 건 어떨까요? 악기도 골고루 섞어서요.”“한국 전통 음악이요?”
국악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해리는 눈만 크게 떴다.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농담이라고 수철이 말해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왜 놀라세요?”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방금 제게 장르도 넘고 시공간도 초월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긴 했지만.”
“마일스 데이비스 아저씨는 힙합이랑 하면서 시간을 초월했고, 허비 행콕 선생님은 아프리카까지 날아가서 공간을 초월하셨잖아요?”
“…….”
수철은 해리가 엄두를 못 낸다는 것을 이해한다. 유럽에서 한국 전통 음악이라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자신도 생소한데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낼지 감도 안 잡힐 것이다. 수철은 어쨌든 다시 공을 해리에게 넘겼다.
“제가 말씀드린 걸 해 보시겠다면 저도 해리의 뜻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
별장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해리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해리의 느려진 발걸음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었다. 해리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수철은 해리가 언제라도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철은 모래사장만 보며 걷는 해리와 달리 뭉게구름 아래로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며 돌아왔다.
* * *
“칸 영화제 수상 이후 수철 씨의 앨범 전부가 매출이 급상승 중이래요.”
“그래요?”
“네, 예전에 한국에서 만들었던 곡들까지 다시 상승세를 탄다고 하시더라고요, 박 대표님께서.”
레베카는 박 대표와 통화한 얘기를 전하며 즐거워했다. 칸에서의 일정을 잘 소화해 줘서 고맙다고 박 대표가 레베카에게 특별 선물을 전했기 때문이다.
“발리 왕복 항공권과 리조트 일주일 패키지 세트를 주셨어요.”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수철도 기분이 좋았다. 레베카는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하다. 이번 일정 동안 수철을 잘 캐어해 줬으니까.
“이틀 후에 스테파노만 만나면 다 끝나는 거네요?”
수철은 레베카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렌트카도 준비해 놨어요. 지난번에 마음에 든다는 모델로요.”
역시 레베카.
수철은 대답 대신 엄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는…….”
레베카가 명함을 내밀었다.
“여기로 전화하시면 호텔로 차를 가지고 올 거예요. 우선 5일을 쓰는 거로 지불했어요. 연장하고 싶으면 저한테 전화 주시면 돼요.”
“네, 고마워요.”
다시 한번 엄지를 세웠다.
* * *
“그래서, 프랑스에서 여행 좀 하다가 파리에서 바로 호주로 갈 거라고?”
영준이 형이 탁자에 턱을 괴며 물었다.
“네, 그러려고요.”
“벌써 간다니, 섭섭하네.”“저도요.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여행 한번 못 해서 아쉬워요.”“서로 바빴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뭐.”
“네, 그렇죠.”
“그래도 걱정 마, 호주에서 보게 될 테니까.”“호주 오실 거예요?”“몰랐어? 호주에서 공연이.”
“영준―!”
순간 제시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처음 듣는 제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모두가 놀라서 쳐다봤다.
“……?”
제시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준이 형을 노려봤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깜짝 이벤트라고 했잖아!”
제시는 진짜로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큰 눈동자가 더 커 보였다.
“아 참, 그랬었지…….”
영준이 형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시는 기분이 상한 듯 계속 영준이 형을 노려봤다.
“그래서 언제 오시는데요?”
수철은 제시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말로 물었다.
“그, 그게…….”
영준이 형은 한국말까지 더듬었다. 제시가 맞은편에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시는 이번엔 수철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금 내 욕하는 거야?”“무슨 소리야? 욕이라니?”“그럼 영어로 해, 한국말로 하지 말고. 괜히 의심받기 싫으면.”
“알았어.”
수철은 영준이 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Young―jun, come this way for a second.”
수철은 영준이 형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제시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제시가 다시 버럭 소리를 쳤다.
“No―!”
그러고는 영준이 형을 끌어당겨서 뺏어 갔다.
“하하.”
멤버들은 이 상황이 재밌다며 껄껄댔다. 어쩌다 보니 영준이 형 쟁탈전이 벌어졌다.
수철은 결국 멤버들이 호주 공연을 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언제인지는 알지 못했다. 영준이 형에게 슬쩍 문자로 알려 달라고 했지만, 영준이 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살려 줘. 제시 화내는 거 봤잖아.”
* * *
“어제 연습에 대한 단원들 반응은 어떤가?”
스테파노가 콘서트홀로 이동하기 전 수석 연주자에게 물었다.
“한결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신경을 곤두세웠던 그제에 비하면요.”“다행이군. 자네의 생각은 어때? 이제 제법 잘 어우러진 것 같지 않아?”“네, 이제야 마에스트로가 생각하시는 ‘Radiate’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수석 연주자의 말에 스테파노는 셔츠 손목의 단추를 채우며 배시시 입이 벌어졌다. 한국에서 온 국악팀과 오케스트라가 잘 융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스테파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는 매일 놀라고 있습니다.”
“놀라?”
스테파노는 거울에 비친 수석 연주자를 보며 미간에 힘을 줬다. 수석 연주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