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91화 (191/239)

#191화. 천재의 자생력

“‘Radiate’는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향연입니다.”“소리의 향연이라.”

스테파노는 수석 연주자의 말을 되뇌었다. 거울에서 몸을 세우며 뒤돌아봤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표현이군. 하지만 음악이나 소리의 향연이나 같은 말이지. 어쨌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나?”“머릿속에 그린 이미지를 그대로 소리로 구현한 거 같아요. 음악을 접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스테파노는 끄덕였다.

“정확히 봤어. 나도 처음 들었을 때 음악에 대한 무의식을 그대로 무대 위에 꺼내 놨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게 내가 도전하는 이유기도 하고.”“무슨 말씀이세요? 도전이라니요?”“Radiate는 내겐 도전이야.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 줄 거라 기대하는데, 그게 아니야. 난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주먹을 꽉 쥐며 다짐을 해. Radiate를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만들어 내겠다고.”

“…….”

“그만큼 나에게도 큰 도전이자 모험이라는 뜻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Radiate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음악이 아니잖아? 정형적인 게 하나도 없지. 음악의 형식도, 소리의 조합도. 우리에게 익숙한 게 하나도 없잖아?”

“네, 그렇죠.”

수석 연주자는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묻는 스테파노를 보며 끄덕였다. 형식이 없다는 것, 수철의 음악이 매일 새롭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였다. 스테파노는 잠시 굽혔던 몸을 다시 폈다.

“자네는 매일 놀란다지만, 난 매일 가슴이 뛰어. 내 나이 60이 넘어서 이렇게 설렐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스테파노가 미소를 짓자 수석 연주자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스승과 다름없는 스테파노가 행복하다는 건 자신에게도 행복한 일이다. 스테파노는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수석 연주자와 시선을 맞췄다.

“자네도 알다시피 Radiate는 음악에 빈틈이 없잖아? 꽉 맞게 짜인 퍼즐처럼 말이야. 아무리 자그마한 일부분이라도 섣불리 손대면 다 틀어져 버려. 수철이 아니면 이 곡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야. 그래서 내가 도전이라고 하는 거고.”

“…….”

“그걸 깨닫는 순간 Radiate를 리메이크해 보려는 음악가들은 모두 한계를 느끼게 될 거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스테파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은 한계라고 말했지만 사실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마찬가지다. 수철의 음악에서 그걸 느꼈다.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천재성을.

“내가 용기를 내서 도전한다는 말이 그런 뜻이야. 지금까지 내가 40년 넘게 쌓아 온 정수를 다 갈아 넣겠다는 말이지.”

스테파노의 말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럼 저같이 경력이 부족한 음악가는 리메이크해 볼 기회조차 없는 걸까요?”

수석 연주자가 속내를 보였다.

“그렇지 않아. 작곡가가 허락한다면 리메이크는 누구나 할 수 있지. 단지 난, 내가 이 곡의 작곡가라면 다른 사람이 재해석하겠다고 덤비는 걸 말리고 싶어.”“노하우가 부족해서요?”“그것보다는 다른 이유야.”

“어떤?”

“음, 수철은 다른 사람이 자신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해. 자네도 음악을 접하면서 느꼈을 거야, 그의 천재성을.”“네, 범접할 수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어요. 신화 속의 거인을 보는 듯했죠.”

수석 연주자는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스테파노는 천천히 끄덕였다. 수석 연주자의 한계를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수철에겐 이런 음악을 만드는 게 쉽지만 누군 리메이크하는 것만으로도 매일 아침 40년간 쌓은 노하우를 갈아 넣으며 다짐하고 있잖아? 하하.”

스테파노의 웃음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내가 우려하는 건 의욕을 갖고 덤볐다가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야. 그게 내가 말리고 싶다는 이유야. 난 할 만큼 했고, 이젠 별로 잃을 것도 없지만, 자네 같은 젊은 음악가는 다르잖아? 미래가 창창한데 에너지를 아껴야지.”

스테파노의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자칫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수석 연주자는 그의 뜻을 잘 헤아렸다.

단지 신은 공평하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곡을 만들 때가 20살이었다고 들었어요.”“그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그런데 어떻게 이런 대작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말이에요. 천재성과 연륜은 다른 거 아닌가요?”

스테파노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천재라고 일컫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 왔다. 어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따라온 천재를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해 본 적도 있고, 오디션장에 앉아서 감별사처럼 천재를 골라냈던 적도 있다. 같은 무대에서 같이 공연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수철은 지금까지 알던 천재와 달랐다. 그들의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 천재성이라고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게 바로 수석연주가자 말한 연륜 같은 것이었다.

스테파노도 그걸 느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40년 지휘봉을 잡고서야 깨달은 깊이가 이미 수철의 음악엔 들어 있었다.

수석 연주자는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는 스테파노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느낌을 전했다.

“음악을 들어 보면 인생을 100살은 살아봐야 나올 법한 깊이가 느껴졌어요.”

그 말에 굳어 있던 스테파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100살이라니. 자네도 참.”“놀라워서 그렇죠. 정식 코스도 밟지 않았는데 말입니다.”“정식 코스를 밟는다고 연륜이 깊어지는 건 아니야. 정식 코스를 밟았으면 오히려 이런 음악이 나올 수가 없지.”

스테파노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슬픈 현실이야. 재능이다, 뭐다 해서 어릴 적부터 꽃밭에서 똑같은 꽃으로 키워지니 언제 한번 야생화가 돼 볼 수 있겠나?”

“…….”

“어떻게 용수철 같은 천재가 탄생할 수 있겠냐고. 우리도 학생을 가르치고 있지만 참 슬픈 현실이야. 쯧쯧, 예술은 처절한 자생력에서 나온다는 것도 모르고. 쯧쯧.”

스테파노는 연거푸 혀를 찼다.

“용수철 작곡가는 원래 타고난 천재 아닌가요?”“타고난 천재 맞지. 하지만 주류에 편입되지 않고 혼자 컸잖아? 음악을 들어 보면 그걸 알 수 있어. 어떤 형식에도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어. 그러니까 백 퍼센트, 천 퍼센트 순수 창작품을 만들지.”

“그렇군요.”

“그래, 그리고 그러려면 들판에서 야생화로 커야 해. 그래야 그게 가능해. 꽃밭에 들어오면 그럴 수가 없어, 잡초라고 뽑아 버릴 테니까.”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스테파노의 매니저가 머리를 내밀었다.

“30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오케이,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시간 맞춰 모시러 간 건가?”“네, 통역을 맡으신 분이 캐어하고 계세요. 오늘도 그분이 모시고 오실 거고요.”

매니저가 나가자 수석 연주자가 스테파노의 소지품을 챙겼다.

“오늘 드디어 Radiate의 작곡자를 만나게 되는 건가요?

“그래, 지금쯤 영국에서 출발했을 거야.”“설레네요, 만날 생각을 하니까요.

“하하, 나도 그래. 우리의 연주가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거울을 보며 다시 외모를 정리하는 스테파노에게 연주자는 슈트를 챙겨서 내밀었다.

“이번에 느낀 거지만 아시아나 유럽이나 악기는 달라도 음악의 속성은 같은 거 같아요. 특히 아시아의 타악기는 아프리카의 타악기와는 전혀 다른 묘미가 있는 거 같아요.”“맞는 말이야. 전혀 다른 묘미가 있지. 그런데 아시아의 타악기가 아니야, 한국의 타악기지. 자네가 수석 연주자인데 그런 말실수를 하는 건 좋지 않아. 용수철 작곡가가 들으면 실망하지 않겠나?”“네, 조심하겠습니다.”

* * *

“여기예요.”

도착한 곳은 연습장이 아니었다. 콘서트홀이었다. 수철이 의아해하자 레베카가 설명을 붙였다.

“그동안 연습장에서 연습했었는데, 오늘은 스테파노가 특별히 이곳을 빌렸대요.”

수철은 그 말이 부담됐다. 스테파노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필요까지 없는데.

아무리 수철이 만든 곡을 자신의 해석으로 바꿔서 보여줄 생각이라고 해도 아직 연습시간이 충분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런 곳까지 빌린 걸 보면 수철의 모니터링을 기대한다는 뜻이었다.

“팀을 구성하고 연습한 지는 이제 일주일 정도 됐대요.”

그 말은 아직 거칠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을 수철에게 보여 주고, 의견을 듣겠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시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서둘러서 무대를 잡은 것이다.

“스테파노 같은 거장도 수철 씨에겐 긴장하나 봐요. 훗.”

수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레베카는 재밌다는 투로 말했다.

수철은 부담스런 눈빛으로 어두운 콘서트홀에 들어섰다.

다행히 홀은 아담했다. 관객석도 사오백 명이 앉으면 꽉 찰 거 같은 소규모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무대는 넓었다. 스테파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원 전체를 모니터링하게 하려는 이유. 수철은 조용히 관객석 통로를 내려갔다.

그런데.

왜 이러지?

갑자기 오한이 들린 듯 몸이 떨렸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올라왔다. 수철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귀밑까지 올라온 두근거림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괜찮으세요?”

레베카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괜찮아요.”

수철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가까운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 * *

“소리가 불안정하더라도 얼굴에 드러내지 말아 주세요.”

스테파노는 포디움(Podium, 지휘자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마련한 대) 위에 서서 한창 연주자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무대에는 30여 명의 사람이 각자의 악기를 든 채 스테파노를 중심으로 타원형 형태로 앉아 있었다. 꽹과리, 장구, 북 등 타악기를 든 사람들은 스테파노의 왼편 바닥에 앉아 있었고, 태평소와 가야금 연주자는 오른쪽 의자에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같이 앉아 있었다.

수철이 공연 때 신디사이저로 연주했던 소리를 스테파노는 연주자를 모셔서 제대로 구성해 놓고 있었다. 역시 이름난 마에스트로답게 악기 구성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자, 그럼 다시 한번 해 볼까요?”

스테파노가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지휘봉을 들었다. 모두가 악기에 손을 댄 채 지휘봉을 주시했다.

스테파노가 힘 있게 지휘봉을 아래로 내리며 첫 박의 신호를 줬다. 그러자 첼로가 먼저 활을 밀었다 당기면서 불안정한 디미니시드 스케일(diminished scale)로 연주를 시작했다. 스산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오디션 때 다혜가 신디사이저로 연주했던 부분이었다.

시작부터 불안정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익숙지 않은 형식에 사람들의 얼굴엔 불편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노련한 연주자들답게 이를 악물고 열심히 자신의 악기에 손가락을 놀렸다. 연주자들의 마음을 잘 아는 스테파노는 지휘봉을 날카롭게 움직이며 그들의 소리를 세세하게 조율했다. 하지만 이내 지휘봉을 멈췄다.

음.

반복적으로 같은 부분에서 느낌이 살지 않았다.

“10분만 쉬었다 할게요.”

스테파노의 말에 일제히 악기를 내려놓았다.

* * *

수철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지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포디움에서 내려온 스테파노는 관객석을 돌아보다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눈을 또렷이 떠서 수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장 무대를 내려와 관객석으로 올라왔다.

“일찍 왔네요?”

“네, 좀 일찍 도착했어요. 잘 지내셨어요?”

수철은 손을 내미는 스테파노와 악수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스테파노는 레베카와도 인사를 나누고 다시 수철을 봤다.

“무대로 가서 단원들과 인사를 나누겠어요?”“아니에요, 끝나고 나서 할게요.”“그러세요. 10분 쉬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쭉 해 볼 거예요. 이제 총연습 4번 한 실력이에요. 하하.”

참고하고 들으라는 뜻이었다. 수철이 Radiate를 리메이크해도 좋다고 허락한 게 불과 10여 일 전의 일이다. 그동안 총연습을 4번 했다는 것은 진행이 상당히 빠르다는 얘기다. 수철은 스테파노가 미리 준비해 놓고 허락만 기다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악기까지 다 모아서 총연습 4번이면, 파트별 연습은 얼마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했겠지.

“아, 그리고 수철 씨가 처음 만들었을 때의 음악은 14분 50초였는데, 거기서 5분이 더 늘어나서 전체적으로는 20분 정도 돼요. 참고하세요.”

“네.”

“그리고 한국인 연주자분이 알려 주셨는데, 그걸 승무(僧舞)라고 하더라고요?”

“승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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