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이상 반응
스테파노의 입에서 승무라는 선명한 한국어 발음이 나오자 수철은 잘못 들었나 했다.
수철이 갸웃하자 스테파노가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춤 말이에요. 영상을 보면 보컬이 이렇게 팔을 접었다 폈다 하더라고요.”
“아.”
은주가 오디션 때 무대에서 했던 몸동작을 말하는 거였다. 승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몸동작이었는데, 스테파노에게는 그 동작이 승무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꼭 넣어 보고 싶은데, 아직 노래할 사람을 정하지 못했어요.”
어쩐지.
무대에 성악가가 보이지 않았었다.
“생각하시는 성악가가 있는 건가요?”“그게 아니라 장르를 정하지 못했어요.”
“……장르요?”
“노래 부를 사람의 장르를 아직 선택하지 못했어요. 성악가가 될 수도 있고, 재즈 보컬리스트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장르의 보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오디션 무대에 섰을 때 은주는 노래가 아니라 의미가 함축된 단어를 내뱉는 방식으로 소리를 냈었다. 랩을 하기도 하고, 판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재즈의 스캣 같기도 했다. 연결된 문장이 아니라 단어만을 내뱉는 형식이었으니까. 노래라기보단 노래하는 행위예술에 가까웠다.
수철이 물었다.
“제가 했던 방식으로 하실 건 아니시죠?”“그대로 하면 카피가 되지 않겠어요?”“네, 제 생각엔 스테파노는 저와 다르게 할 거 같아요.”“그럴 생각이에요. 그래서 새롭게 멜로디 라인을 만들어서 소프라노로 연습을 해 봤고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Radiate의 독특한 맛이 사라지더라고요.”
당연한 얘기였다. Radiate는 단어를 내뱉는 방식에 맞춰서 작곡되었으니까.
“그래서 멜로디 라인에 변화를 주고 음역대를 바꿔 봤어요. 바리톤으로요.”
“아…….”
“그런데 성악가가 이틀 만에 진땀을 흘리면서 찾아왔더라고요. 자기가 소화할 수 없는 음악이라며 두 손을 들었어요.”“포기하셨다는 건가요?”“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에, 수정한 멜로디 라인도 음정의 변화는 거의 없이 리듬의 변화만 실었거든요. 마치 대중음악의 랩처럼요. 그러니까 그 굵은 소리로 호흡을 하며 많은 음을 내기가 힘들었죠. 사실 연습하면서 많이 삐걱댔었는데, 나는 좀 더 지켜보려고 했었어요. 먼저 포기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누군지 몰라도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톤이 빠른 랩을 했다니.
“뛰어난 성악가인 만큼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거예요.”
스테파노는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같았다.
힘들었겠지.
가쁜 숨을 참으며 굵은 톤으로 랩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무리 대단한 호흡을 가진 성악가라고 해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스테파노의 요청이 있으니까 참으면서 그 정도로라도 했을 게 분명했다.
수철은 바리톤보다 스테파노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게. 스테파노가 아니면 시간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 번 실패하다 보니까 내가 너무 성급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다고 보이스 없이 갈 수도 없고.”
“…….”
“그래서 고민을 했죠. 보컬과 노래를 완전히 분리해야겠다고요.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수철 씨의 음악은 그게 가능하잖아요? 하하.”
음악이 달라서 난처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더 즐겁다는 웃음이었다.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연주와 보컬의 장르를 다르게 가 볼까 하고 생각하니까 노래할 사람도 바뀌어야겠더라고요. 성악가가 한국의 판소리를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성악가가 한국의 전통 음악에 맞춰 클래식을 할 수도 없잖아요?”
그렇게 한다고 해도 Radiate를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퇴색된다. 수철의 원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보시다시피 지금도 수철 씨가 그렸던 사운드를 어느 정도 재현하다 보니까 한국의 전통악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스테파노는 등 뒤의 무대를 가리켰다. 휴식을 마친 연주자들이 한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수철은 스테파노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고 있다. 자신의 방식을 지키며 Radiate를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려면 소리의 구성에서부터 수철의 원곡과는 다른 변화를 줘야 한다.
“악기는 제 의도대로 색깔을 갖춰 가는데, 노래하는 사람을 찾는 게 난제예요. 그래서 며칠 고민하다 보니까 재즈의 보컬리스트를 초대해서 스캣(Scat)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별한 멜로디 라인 없이 즉흥적인 느낌에 맡기면 되니까요. 수철이 만든 Radiate가 그랬듯이요.”
말이 되는 얘기다. 아니, 가장 비슷한 접근이다. 은주가 소리를 냈던 방식과 가장 근접한 것이 재즈의 스캣이다. 멜로디 라인을 빼고 재즈 보컬리스트의 스캣 형식을 빌려 온다는 스테파노의 생각은 수철이 만든 Radiate의 핵심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Radiate가 주는 독특함이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좋은 재즈 보컬리스트를 찾고 있어요. 아, 그리고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아예 다른 소리를 하시는 분도 알아보고 있어요.”“다른 소리라면……?”“전위 예술가 같은 분이요. 어떤 그림이 나올지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흥미로울 거 같지 않아요? 하하!”
흥미 정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종합 예술이 탄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수철의 Radiate와 가장 가까울 수도 있다. 오디션 무대에서 처음 들었던 심사위원도 전위예술 같다는 평을 내놨으니까.
“물론 말이 많겠지만요. 하하.”
클래식 평단에서 날선 비판이 날아올 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노는 그런 것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다. 그의 웃음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내 뜻대로 할 거야.
“암튼, 멀리까지 초대해 놓고 수철 씨에게 제대로 된 무대를 보여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아니에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아무래도 초연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죠? 하하.”
스테파노는 멋쩍게 웃었다. 평소보다 더 많이 잡히는 눈가의 주름에서 그동안 고민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수철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장난스레 툭 내뱉었다.
“그런데 이런 맛에 음악 하는 거 아니겠어요? 하하.”
뜻대로 되지 않는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유.
경험 많은 마에스트로만이 보일 수 있는 너털웃음.
스테파노는 배울 점이 많은 음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은 잠시 스테파노와 눈빛으로 교감했다. 어느덧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아쉽지만, 연주만 들려 드릴게요. 보이스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요.”
스테파노는 무대에 연주자들이 모여서 기다리는 모습을 힐끔 돌아보면서 말했다.
“네, 잘 들을게요.”
수철이 끄덕이자 스테파노는 서둘러 관객석을 내려갔다.
* * *
스테파노는 포디움에 서서 연주자들을 쭉 한번 훑어봤다. 연주자들은 준비가 됐다는 눈빛을 보였다. 스테파노는 지휘봉을 높이 들었다가 빠르게 내렸다.
음악이 시작됐다. 연주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Radiate의 원곡자가 어두운 객석에서 지켜보는 걸 알고 있다.
스테파노의 손놀림이 빨라지자 연주자들의 눈빛이 더 또렷해졌다. 첼로의 불안정하고 불편한 디미니시드 스케일의 연주가 사라지자, 곧바로 꽹과리가 등장했다.
꽤괘, 괘괘괭! 꽹꽤괘괭!
꽹과리의 날카롭고 격렬한 리듬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곧이어 10여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머리를 튕기며 동시에 활을 움직였다. 그들의 동작은 다이내믹했다. 그리고 안 어울릴 것 같던 꽹과리와 바이올린의 조화는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렸고, 역동적이었다.
와―
레베카가 옆에서 감탄을 내뱉을 정도였다. 처음 듣는 두 소리의 조화는 강렬하게 가슴을 자극하며 절로 탄성이 나오게 했다.
역시.
세계적 거장인 스테파노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Radiate가 사람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머릿속에 관객들의 반응을 꿰고 있었다.
악기를 쌓아 가며 격렬해지던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점점 잠잠해지더니 모든 소리가 멈추고 무대엔 적막이 흘렀다.
몇 마디의 쉼표가 지나자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정적을 깨웠다. 오른손 검지로 현을 뜯기 시작했다. 피치카토(Pizzicato)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바이올린도 한두 대가 따라붙더니 순식간에 10여 명의 연주자가 같은 동작으로 같은 소리를 냈다.
음.
수철의 눈이 빛났다. 예전에 오디션 무대에서 신디사이저로 만들었던 ‘끄국, 끄국’ 하는 심장박동 소리였다. 그것을 스테파노는 바이올린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스테파노는 이 소리가 전체 음악을 지배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소리는 수철의 악몽 속에서 터질 듯이 박동하던 심장 소리였다. 수철은 무대에서 그 소리를 날것 그대로 드러냈었다. Radiate라는 말처럼 있는 그대로 뿜어내고 싶었기에.
무대를 주시하는 수철의 눈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수철이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냈다면 스테파노는 음악적인 해석을 하고 있었다.
두둥, 두두둥!
팀파니 소리가 무대를 울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태평소 소리가 들려왔다. 태평소는 팀파니의 굵고 묵직한 소리 위에 장난스레 올라타기 시작했다. 둘 소리의 조화가 그렇게 들렸다.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귀를 자극할 정도로 신선하면서도 머릿속에 박힐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팀파니가 절도 있고 과묵한 군인의 발소리 같다면 태평소는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장난꾸러기 소년 같았다.
꽤괘, 괘괘괭! 꽹꽤괘괭!
다시 꽹과리가 팀파니와 태평소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가야금에 얹어진 손가락이 줄을 빠르게 튕기면서 태평소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은 꽹과리 리듬에 맞춰 격렬하게 활을 밀었다 당겼다.
덩기덕! 덩더덩!
장구가 리듬을 고조시키면서 등장했다. 연주자는 채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울림통을 빠르게 두드렸다. 국악기가 모두 연주에 참여하며 음악을 절정으로 이끌어 갔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운드는 수철이 오디션에서 보여 줬던 사운드보다 훨씬 입체감이 강했다. 많은 연주자가 음역대를 가득 메우며 풍부한 소리를 뽑아내고 있고, 타악기가 리듬을 쪼개며 뛰어다니니, 입체감이 넘치는 건 당연했다. 입체감을 넘어 튀어나올 듯이 소리가 꿈틀거렸다.
두두둥! 두두둥!!
굵고 강렬한 팀파니 소리가 다시 한번 무대를 크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두두둥! 꽤괘괭! 덩기덕!
모든 타악기가 참여해서 소리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어, 왜 이러지?
갑자기 수철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조종하는 것 같았다. 감정이 끓어오르며 내면에서도 뭔가 꿈틀거렸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뭔가가.
무대 위의 소리가 거세질수록 몸과 마음에서 계속 이상 반응이 일어났다. 식은땀이 척추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네요?”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레베카가 고개를 돌렸다.
수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가슴에 손을 대고 뛰는 심장과 요동치는 감정을 억지로 억눌렀다. 얼굴까지 잔뜩 빨개졌다.
“괘, 괜찮으세요? 수철 씨?”
레베카는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 수철은 입을 꽉 다문 채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가는 뭔가 튀어나올 거 같았다.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숨을 잔뜩 끌어들여 단전 깊숙한 곳까지 내려보내고 천천히 내쉬었다. 호흡을 조절하며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꽤괭, 꽤괭. 꽹꽤괘괭!
하지만 스테파노와 단원들은 안정을 찾을 틈을 주지 않았다. 다시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고 이젠 호흡까지 가빠졌다. 산소가 부족해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허억!
순간, 수철의 동공이 활짝 열렸다.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악몽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옛날 영화의 필름이 영사기에 감기듯 또로록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대 위 연주자들의 모습이 악몽 속 등장인물로 하나둘 바뀌어 갔다. 스테파노의 지휘봉은 날카로운 칼로 바뀌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휴― 휴―
눈을 감고 몇 번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다시 무대를 봤다.
헉!
영사기의 화면이 눈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얼굴 앞을 스쳐 가는 날카로운 칼. 언뜻 보이는 누군가의 통곡.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 질러도 나오지 않는 비명. 터질 것 같은 심장박동.
순간, 수철은 가슴을 쥐어 잡은 채 앞의 의자에 머리를 박으며 몸을 구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