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절 아시나요?
허어억!
수철은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베개는 땀에 젖었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턱이 아팠다. 계속 주먹을 쥐고 있었던 탓에 손목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흐트러진 시선으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17살 이후로 사라졌던 악몽을. 하지만 예전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때 비하면 반 정도의 충격이라고 할까. 그렇게 두렵고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동안 악몽과 맞설 힘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에너지를 많이 쓴 탓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 들이켰다. 커튼을 여니 어느덧 아침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멀리 프랑스까지 와서 다시 이런 꿈을 꿨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창밖을 내다보는데,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어제는…….
어제는 음악을 듣는 내내 심장이 뛰고, 감정이 요동치더니 마지막엔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음계를 깨트린 타악기에 가까운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모든 악기가 총출동하며 절정으로 치달을 때는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 소리는 악몽 속에서 휘몰아치는 배경음악 같았다. 수철의 가슴을 옥죄었다. 계속해서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들썩이며 튀어나왔다.
하지만 수철은 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눈을 또렷이 뜨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과 마주하려고 했다. 쉽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이런 수철의 모습을 알지 못한 채 태연하게 음악을 이어 갔다. 혼을 불태우듯 격렬하게 연주하고 있었지만, 수철의 모습에 비하면 그 정도는 태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스테파노는 수철의 평가를 기대하며 열심히 지휘봉을 움직였다.
무대와 객석의 분위기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짝짝짝.
음악은 스테파노의 말대로 2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은주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단어인 ‘Radiate’는 북을 치시는 분이 소리를 지르며 끝을 냈다.
음악이 끝나자 잠시 적막에 휩싸였다. 무대도, 관객석도.
뒤늦게 레베카가 박수를 치면서 적막을 깨트렸다. 수철도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가볍게 손뼉을 부딪쳤다.
―듣기 불편하진 않았나요?
객석으로 올라온 스테파노는 겸손하게 물었다. 수철의 상기된 모습을 보고 수철이 음악에 자극을 받았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알 리가 없었다.
―정말 잘 들었어요. 좋았어요.
수철은 몸과 마음의 이상 반응을 억누르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스테파노는 뭔가 깨우침을 줄 만한 평을 기대했지만, 수철이 말을 아끼자 생각이 많아졌다. 잘 들었다, 좋았다는 말은 그저 그랬다는 말이랑 같기 때문이다.
수철은 이 와중에도 스테파노의 마음을 살폈다.
―스테파노, 자세한 소감은 이메일로 보내 드려도 될까요? 지금은 가야 할 거 같아서요.
그 말에 스테파노는 레베카를 쳐다봤다. 오늘은 다른 스케줄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이 저녁을 먹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레베카는 수철이 그간의 바쁜 스케줄로 인해 컨디션에 난조가 온 것 같다고 급하게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그제야 스테파노는 수철의 얼굴이 상기된 건 음악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아픈 사람을 멀리까지 오라고 하다니, 어리석었어요.
―아니에요, 스테파노.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하시지 마세요. 그리고 음악은 훌륭했어요. 단지 자세한 평을 드리는 게 예의인 거 같아서 이메일로 보내겠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이메일로 하는 것이 더 솔직하게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스테파노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수철에게 음악에 대한 자세한 평을 기대할 수 있으니.
오늘 수철을 초대한 목적을 이룬 셈이다.
―그렇게 해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하지만 수철 씨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무리하지는 마세요. 이건 친구로서 드리는 부탁이에요.
스테파노는 눈빛에 진심을 담았다.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수철도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그렇게 수철은 스테파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평을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계속 있었다간 실수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뭐.
스테파노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사실 어제 자리는 어쩌면 무의미한 자리였다. 음악은 스테파노가 알아서 하면 된다. 처음부터 자기 생각대로 풀어 보고자 시작한 거니까. 그리고 수철이 거기까지 간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거장이라는 사람이 음악을 어떻게 바꿔 나갈지에 대한 호기심.
스테파노는 수철의 평가가 궁금해서 수철을 초대한 거지만 수철이 보기엔 이미 스테파노 스스로가 문제점을 다 알고 있었다. 대화 속에서 보컬에 관한 얘기를 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수철이 말할 게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뛰어났으니까. 괜히 거장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수철은 어제 서둘러 빠져나온 건 잘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을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래도 스테파노에겐 너무 죄송해. 무례하기도 했고.
수철은 이메일로 자세한 소감을 전하며 마음의 부담을 덜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베카.
누구보다 레베카에게 너무 미안했다.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색만 살피던 레베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호텔까지 와서도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떻겠냐며 계속 걱정했다. 하지만 수철은 레베카의 손을 뿌리치듯이 돌아섰다. 그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레베카에게 더는 창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수철은 처음 스테파노가 Radiate를 리메이크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가슴에 작은 경련이 일었었다. 마치 어제 일을 예고한 거처럼.
어제는 음악을 듣는 게 아니었다. 잊고 있던 과거를 듣는 거였다. 무대의 소리가 수철의 영혼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훗, 과연 내가 스테파노가 만든 초연을 들을 수 있을까?
기껏 연주 한번 듣고 이 정도인데 완성된 초연을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신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도 났다.
지이이잉.
탁자 위에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레베카의 염려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괜찮아요. 어제는 너무 미안해요. 걱정을 많이 시켜서요.”―좋아졌다니 다행이에요.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수철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
레베카는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목소리였다.
“시간 괜찮으면 점심 같이할까요?”―네, 모시러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알았다. 밤새 레베카가 전화하고 문자를 보낸 것을. 미안함이 더 커졌다.
* * *
“그동안 너무 고마웠는데, 밥은 한번 사야 할 거 같아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수철은 레베카를 보며 미소를 보였다. 레베카가 계속해서 자신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괜찮은 거 맞죠?”“그럼요. 힘이 넘쳐서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예요.”“호호. 컨디션 돌아온 거 맞네요. 휴, 회사에 알리지 말라고 해서 참고 있었는데, 고민했어요. 이러다 에이전트 그만둬야 하나 하고요. 호호.”
레베카는 머리에 식은땀을 닦아 내는 시늉을 했다.
“하하.”
수철은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웃었다. 레베카의 걱정을 깨끗이 씻어 줄 만큼 크게.
둘은 이제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드세요. 비싼 거로요.”“수철 씨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어제 저도 에너지를 많이 썼거든요. 호호.”
수철은 하루 새 푸석해진 그녀의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저 웃을 수밖에.
“렌트카는 취소해야 할 거 같아요.”
수철은 설렁탕에 얹을 김치를 자르면서 말했다.
“왜요? 여행 안 하시게요?”“네, 아무래도 바로 호주로 가야겠어요.”
“…….”
레베카는 설렁탕을 뜨던 수저를 내려놓고 수철을 바라봤다.
“여행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왜 갑자기 호주를.”“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무래도 여행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어요.”“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나요?”“그냥 작업할 게 있다고만 얘기할게요.”
둘은 잠시 말없이 설렁탕에 집중했다.
수철은 호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동안 유럽에서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레베카에게 고맙고 미안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꼭 다시 연락할게요.”
수철은 헤어지면서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항까지 배웅 못 해서 죄송해요.”
레베카는 손을 맞잡으며 미안해했다. 수철이 호주로 돌아가는 것은 일정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다른 업무를 봐야 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원래 저는 여행 중인 거잖아요? 레베카가 스케줄을 바꿀 수는 없죠.”“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레베카는 그윽한 눈으로 수철을 바라봤다.
“그동안 즐거운 시간이었고, 다시 뵙길 기대할게요. 조심해서 잘 돌아가세요. 건강 잘 챙기시고요.”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았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 * *
으으으!
공항 밖으로 나온 수철은 몸을 움츠리며 팔을 쓰다듬었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시드니가 쌀쌀했기 때문이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수철은 집에 돌아와서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 큐베이스(Cubase, 작곡 프로그램)를 작동시켜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수철은 오랜만에 ‘Radiate’ 파일을 열어 멜로디를 붙이기 시작했다. 멜로디는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이미 비행기 안에서 다 구상해 놨기 때문이다. 멜로디에 맞춰 달라진 편곡도 순식간에 다 했다. 그것도 비행기에서 이미 머릿속에 다 만들어 놨었다. 수철은 새롭게 악기 연주까지 빠르게 마무리해 놓고 나서 잠시 숨을 골랐다. 방 안을 몇 바퀴 빙빙 돌다가 이번엔 마우스 대신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 며칠간 머릿속을 휘저었던 가사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춤을 추다가 꺾였어. 용서를 말해야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이미 내 날개는 부러져 버렸어.]
오디션 때는 쓰지 못했던 가사였다. 그때는 선명하지 않아서 단어로만 내뱉었었다.
[이젠 찾아올 때가 됐어. 네가 가져간 내 하늘을. 네가 꺾어 버린 내 날개를.]
수철은 며칠 전 콘서트홀에서의 기억과 그날 밤의 꿈을 더듬으며 정신없이 적어 내려갔다.
머릿속엔 계속 기억들이 뒤섞이며 휘몰아쳤다. 감정이 다시 요동쳤다. 수철은 이를 악물었다. 눈에서 광기를 내뿜으며 가사를 쏟아냈다. 빠르게 채워지는 노트에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단어들이 다시 한번 주르륵 지나갔다.
[흔들려. 꺾였어. 저잣거리. 기생. 어허. 광대. 얼씨구. 탈춤. 천지개벽. 날개. 날자. 날고. 날겠어. 용서. 자유. 날개. 펴다.]
수철은 지나가는 단어들을 놓치지 않고 또렷이 노려보며 노트에 기록했다. 단어들의 느낌을 상세히 기억해서 가사의 형태로 만들어 갔다.
헉, 헉.
수철은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 연필을 놓치고 누워서 숨을 헐떡였다. 에너지가 방전됐다.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수철은 꿈속에서 악몽을 기다렸다. 처음으로 악몽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악몽을 또렷이 보며 가사를 완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악몽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꾸고 싶어도 꿀 수가 없었다.
으으윽!
수철은 창밖을 보며 기지개를 켜고는 물을 한잔 마셨다. 다시 연필을 잡았다. 어젯밤 썼던 가사를 읽어 보며 마지막 부분을 만들어 갔다. 우선 기억나는 조각의 장면을 연결해서 가사를 이어 갔다.
[왜 울고 계시나요? 혹시 절 아시나요?]
연필을 움직이다 갑자기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엄마와 마지막 이별을 하던 때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번에 눈을 감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수철이었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오열하는 엄마를 보며 눈을 감는다는 게.
수철은 다시 가사를 이어가는 데 오래 걸렸다. 감정이 수도 없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몇 번씩이나 소매로 눈물도 닦았다.
자식을 잃고 엉엉 우는 엄마의 모습은 견디기 힘들었다.
수철은 빵과 커피로 허기를 달래며 며칠 밤낮을 계속 집중했다.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며 가사의 형태를 갖춰 갔다. 쓰다가 지치면 그대로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면 다시 연필을 잡았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미친 듯이 쏟아내기 위해서.
이번엔 산책도 드라이브도 하지 않았다.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며칠이 가는지도 몰랐다. 대충 일주일 정도 지났다는 것만.
음.
수철은 어렵게 완성한 가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몇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휑해질 정도로 모든 걸 다 꺼내놨다.
꺼내 놓은 가사를 보며 기억들을 거꾸로 되짚어 봤다.
머릿속에 있을 때와 달리 꺼내 놓고 나니 남의 얘기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몸속에 있을 때는 그렇게 무겁더니 꺼내 놓고 나니 웃음이 날 정도로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 음악가는 가사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를 통해서 무거운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가사는 감정이 지나쳐서 다듬어야 할 부분이 몇 개 눈에 띄었다. 누군가 보게 되면 창피할 것 같았다. 너무 자신의 감정만 드러내서.
가사를 다듬고 나면 이제 마지막 숙제만 남았다.
노래.
이 가사를 노래로 부를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