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94화 (194/239)

#194화. 이겨 내다.

수철에게 노래는 금기 사항이었다. 수철이 꾸는 악몽의 끝은 항상 노래였다. 광대들 사이에서 노래 부르다 칼을 맞았고,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하다 피를 토했다. 엄청난 죽음의 그림자가 트라우마가 되어 수철의 영혼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행여나 노래하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하면 갑자기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도 했다. 어릴 때는 줄곧 그랬다. 그리고 그날 밤은 여지없이 악몽이 저승사자처럼 찾아왔다. 수철에게 노래는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남들 앞에서는.

그것을 어기면 그날 밤은 무자비하게 짓눌렸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노래 때문이었다.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알기에.

하지만 마음속에 노래에 대한 충동과 동경은 항상 있었다. 그것마저 없앨 수는 없었다. 참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 전혜미 소프라노의 공연을 볼 때도 그랬었다.

몸이 뜨거워지고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뭔가를 느꼈었다. 노래에 대한 충동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누르고 있던 노래에 대한 충동. 그리고 그 충동의 반대편에는 노래를 불렀다가는 또 악몽을 꿀 거라는 불안감도 같이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혜미 소프라노의 공연 때는 금방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테파노의 공연은 달랐다.

비어 있는 보컬의 자리에 올라오라고 손짓하는 거 같았다. 네가 만든 곡이니까 네가 불러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지나가는 차바퀴에 다시 솟구치듯, 잔잔했던 바다가 거센 바람과 폭풍우에 큰 파도가 되어 일렁이듯, 그렇게 꿈틀거렸다.

수철은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당장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의 이상 반응은 더 심해졌다.

* * *

끼이익.

수철은 가사를 완성하고 어두운 밤에 집을 빠져나왔다. 가사를 완성했다는 기쁨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답답함도 있었다.

수철은 차갑고 어두운 거리를 무작정 돌아다녔다. 입김을 내뱉으며 머리에 한 가지 생각만 담은 채 걸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을 걷다가 눈에 들어온 낡은 펍에 들어갔다. 맥주를 주문하고 앉았다.

순간,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마음이 아니라 노래를 못 한다는 게.

자신이 만든 곡을 부르는 가수의 공연, 열광하는 관중들, 그 곡을 따라 부르는 사람들. 그 뜨거운 자리를 보면 수철에겐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열정을 뿜는 가수를 보면 자신도 무대에 서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저기, 무대 위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곡을 아무리 잘 소화한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만큼 소화하는 가수는 없었다.

수철은 그럴 때마다 작곡에 더 집중했다. 음악에 대한 끼,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뜨거운 에너지를 빼내기 위해서 창작에 집중했다.

이제 때가 된 거 같지 않아?

수철은 자신의 내면에 물었다. 노래 부를 때가 된 거 같지 않냐고.

지난번엔 은주가 대신 노래하며 수철의 마음을 대변했지만, 더 이상은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 줄 수가 없다. 가사도 음악도 모두 수철이 소화해야 할 몫이다. 오래된 숙제다. 자신의 얘기는 자신이 직접 해야 완전히 해소할 수가 있다.

자신 있지?

수철은 다시 한번 내면에 물었다. 악몽의 시간과 온전히 마주할 자신이 있는지, 오랫동안 몸 안에 악마처럼 버티고 앉아 있던 트라우마를 무너트릴 준비가 됐는지.

대답은 예스였다.

이제 맞설 만큼의 에너지가 쌓였다. 오래된 숙제를 풀 때가 됐다. 더 이상 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일 뿐이다.

수철은 맥주를 남겨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늦은 밤 마이크 앞에 섰다.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금기를 깨려고. 자신을 옭아맨 올가미를 끊어 버리려고. 몇백 년간 이어진 운명에 맞서려고.

―음, 음.

그런데 막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노래는커녕 마이크 앞에 몇 분을 서 있기도 힘들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다 답답하게 조여지며 식은땀이 비 오듯이 떨어졌다.

그래도 마이크 앞에 서서 억지로 버텼다. 하지만 이내 다리까지 후들거리며 다시 의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수철은 자리에 앉아서 꼿꼿하게 서 있는 마이크를 노려봤다. 눈앞에 자신만만하게 서 있는 저 마이크가 수철이 넘어야 할 벽이었다. 정적인 상태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마이크와 수철의 모습은 상반됐다. 마이크는 핀 조명 아래 빛을 내며 서 있었고 수철은 어둠 속에 앉아서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을 켜는 것도 잊고 어둠 속에서 그렇게 미동도 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철이 다시 일어섰다.

저벅, 저벅.

마이크를 향해 다가가는 수철의 발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마이크 앞에 섰다.

―아, 아.

하지만 이번에도 바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이 잘 나오던 소리가 갑자기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소리를 내면 쇠를 긁는 듯한 쉰 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나아졌다. 쉰 소리라도 냈으니까.

수철은 포기하지 않고, 타들어 가듯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문지르며 다시 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경련이 시작되며 답답해졌다. 가슴에 뭔가 불편한 것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이마에 땀방울도 맺히기 시작했다.

우웩!

수철은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냈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마음속 답답함까지.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자로 돌아왔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다시 마이크를 노려봤다.

수철의 눈빛은 흡사 꿈을 이루기 위해 어둠 속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복서의 눈빛 같았다.

벽을 넘고자 휘두르는 주먹, 벽을 넘고자 노려보는 눈빛.

수철의 이런 모습은 밤새 계속됐다. 마이크 앞에 섰다가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옅은 핀 조명 아래 서 있는 마이크를 노려보다가, 다시 작정하고 마이크 앞에 섰다가, 금새 지쳐서는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는 호흡을 가다듬어 다시 도전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수철의 모습이 보였다. 살짝 벌어진 커튼 틈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수철의 얼굴을 비췄다. 수철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손으로 햇살을 막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걸쳐 놓은 가죽 재킷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 * *

수철은 재킷을 뒷좌석에 던져 놓고 재규어에 시동을 걸었다.

빠르게 도시를 벗어나 해안 도로를 달렸다.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속도를 높였다. 밤새 쌓였던 고뇌가 바람에 다 씻겨 나갈 수 있게.

수철은 머리가 차가워질 때까지 무작정 달리다가 어느 인적 없는 바닷가에 차를 세웠다.

백사장에 앉아 겨울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한없이 바라봤다. 누워서 끝없이 높은 파란 하늘도 바라봤다.

풋!

갑자기 웃음이 났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웃겼다.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데, 그 상대가 누구인지 선명하지 않다는 게 왠지 웃겼다.

수철은 다시 일어나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듯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의 얼굴이 한 번씩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들과 자신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떤 운명으로 만났고, 어떤 역할을 하며 서로에게 얽혀져 있을까.

그런 철학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중천에 있던 해가 조금씩 기울어 가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수철은 차에 돌아와 재킷을 세우고 팔짱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

끼이익!

지나가는 차의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에 눈을 떴다. 벌써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수철은 천천히 시동을 걸고 차를 돌렸다.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연습실 앞에 차를 세우고 뜨거운 핫초코를 한잔 마셨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연습실로 들어갔다.

* * *

수철은 그날 밤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딱, 딱,

새벽이 지나갈 무렵, 어두운 곳에서 손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조그맣게 시작됐다. 그리고 곧바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듭두― 두둡, 뚜비르밥.

재즈의 스캣(Scat, 가사 대신 '다다다디다다' 같이 아무 뜻도 없는 소리로 노래하는 창법)이었다. 손가락 리듬에 맞춰 움직이던 목소리는 점점 더 그루브하게 확장됐다.

―딱딱. 뚜비르밥. 따악딱. 뚜비르비밥밥밥―

오랫동안 막혀 있던 구멍이 뚫리듯이 거칠게 시작한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힘이 붙기 시작했다.

―다바디야! 슈비드와! 뚜둡뚜 따바라바밥―

수철은 목소리를 키우며 자신감을 붙이고 리듬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빠라라리리 바밤! 두두르루루 바밤!

수철은 마치 수십 년 만에 다시 발성 연습을 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수백 년 만에 하는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묵혀 놓았던 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여명이 밝아 올 때까지 수철의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어두운 연습실을 울렸다.

* * *

“오랜만에 오셨네요?”

수철은 개운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본다이 비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며칠 밀린 잠을 푹 자니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 수철을 보며 웨이터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네, 안녕하세요.”

수철도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춥지 않으세요?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괜찮으세요?”“네, 저는 여기가 좋아요.”“알겠습니다. 그럼 주문하시겠어요?”“네, 씨푸드 스파게티 주세요. 시원한 하이네켄도 한 병 주시고요.”“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수철은 춥지 않냐고 묻는 웨이터에게 괜찮다며 차가운 맥주까지 주문했다.

수철의 기분이 그랬다. 마냥 좋았다. 날아갈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쭉 켰다.

차가운 날씨에 사람은 없지만, 나름대로 바닷가의 풍경은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은 무한하게 자유로워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바람은 차갑지 않고 시원하게 느껴졌고, 햇살은 따스했다.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철의 기분이 그랬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 * *

―대표님, 공연 잘 끝났습니다.

“수고했어. 분위기는 어땠어?”―좋았습니다. 하준이야 언제나 꽉꽉 차지 않습니까? 오늘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기획자는 입이 벌어졌고요.

“그래, 마지막까지 마무리 잘하고, 오늘 고생한 스탭들 잘 챙겨.”―네, 알겠습니다.

“내일은 바로 방송국으로 가는 건가?”―네, 작가들과 사전 미팅이 있어서 바로 갈 생각입니다.

“그래, 알았어. 주말에 회식하면서 한잔하자고. 그때까지 계속 수고하고.”―네, 대표님.

박 대표는 새로 영입한 실장급 매니저가 알아서 일을 척척 해 나가는 게 뿌듯했다. 그만큼 큰돈을 주고 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뒤를 돌아봤다.

“민 팀장, 퇴근해야 하는데, 오래 기다렸네?”“아닙니다, 보고는 하고 가야죠.”“SUNSET 앨범이 한국에서도 판매량이 늘고 있다고?”“네, 다른 앨범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그래도 선방을 하고 있습니다.”“어떻게 된 거지? 특별히 홍보한 것도 없는데?”

박 대표는 테이블에 앉으며 민 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처음엔 용수철 작곡가의 마니아층들만 구매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라디오에서 음악이 조금씩 나오더니 판매량이 늘고 있습니다.”

“나 피디는 뭐래?”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는 이유 말입니까?”

“응.”

“나 피디도 모르겠답니다. 신청곡이 들어와서 트는 거라고요. 연관 지을 수 있는 게 칸의 음악상밖에 없는데, 둘이 연관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나도 같은 생각이야. 두 개가 서로 연관되긴 힘들지.”

박 대표는 앨범 ‘SUNSET’이 한국에서도 매출이 늘어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민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SUNSET’의 한국어 버전 얘기도 솔솔 나오고 있습니다.”“한국어 버전? 하하,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장르가 다 달라서 가수도 여러 명을 써야 하고, 특히나 홍보하고 공연 다니고 하기엔 번거로움이 너무 커. 게다가 금별의 이진석 부장도 포기한 일이고.”

박 대표는 앨범 ‘SUNSET’이 실험 음악에다 장르가 너무 많아서 세계 시장을 상대로 배팅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금별의 이진석 부장에게도 그렇게 얘기했었다. 물론 이 부장도 바로 동의했고.

하지만 이 앨범이 처음엔 마니아층으로 확대되더니 혼자서 알아서 역주행하며 엄청난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외국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상황이 그렇다.

이 사실을 안 이 부장은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박 대표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이 부장은 그러면서 수철의 다음 앨범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배팅하겠다고 눈빛을 세웠다.

민 팀장이 박 대표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 부장님이 포기하셨다고 해도 미국과 유럽에서의 상승세가 꺾이지 않으니까 한국도 자연스레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요? 준비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한국에서 내려면 아시아 시장에 먼저 모니터링을 해 봐야지. 특히 일본 시장에.”“알겠습니다. 그럼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그래, 암튼 그건 때가 되면 다시 논의해 보자. 오늘 수고했어. 이만 들어가 봐.”

박 대표는 얘기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은 퇴근 안 하세요?”“정리할 게 좀 남았어. 먼저 들어가.”“네,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오케이.”

박 대표는 직원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서 혼자 서류 정리를 했다. 정산 자료를 확인하고, 입출금 리스트를 정리했다.

으자자!

한참을 의자에 앉아서 일하던 박 대표는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컴퓨터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끄고 나가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실례합니다.”

헉!

순간 박 대표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이 커졌다.

“아니, 너, 너가 왜 여기에……?”

말까지 더듬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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