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일곱 개의 반응
수철은 긴 여행을 끝내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타 보는 택시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수철의 모습은 평온하고 편안했다.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그동안 만났던 행복한 원주민처럼.
수철은 떠나기가 아쉬워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공기를 쥐려다가 손바닥을 펴서 따스한 햇살을 느꼈다.
두 달을 넘게 길 위에서 여행자로 살았다. 완벽하게 자유를 느끼고 완벽하게 힐링한 시간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만족해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수철은 여행하며 때 묻지 않은 원주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느낌이 하나하나 쌓여서 꽤 많은 가사가 모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서 다듬어 나갔다. 그렇게 여섯 개의 가사를 완성했고, 시간은 두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수철이 호주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덧 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철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아니, 현실 세계로 발을 내딛기 전에 잠시 멈췄다. 공항을 벗어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카페로 향했다. 왠지 공항을 벗어나면 두 달간의 자유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수철은 카페에서 원두 향이 진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그간의 여행을 음미했다.
이번 여행은 지난번과 달랐다. 그동안 뭔가 흐릿했던 2%가 명확해졌다.
그건 시각의 차이였다.
자신이 직접 노래를 한다는 생각으로 사물을 보고 가사를 쓰니까 좀 더 가사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노래를 부르겠다는 결심을 하자 사물을 보는 시각이 좀 더 선명해진 것이다.
작사가와 작곡가보다 가수가 관객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번 ‘SUNSET’ 앨범의 가사보다 더 탱글탱글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공항을 나오다 자신의 모습이 비친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길어서 고무줄로 질끈 묶은 머리에 몇 달간 자란 수염이 로빈슨 크루소 같았다. 자신의 모습이 그동안 만났던 원주민들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웃음도 났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셀카를 찍어서 장난삼아 박 대표에게 보내봤다.
―하하, 멋있고 부럽다. 히피 같아.
박 대표는 문자와 함께 엄지를 치켜세운 사진을 보내 왔다. 수철은 피식 웃고는 몇 달간 때가 탄 배낭을 둘러매고 집으로 향했다.
* * *
수철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떠나기 전 폴더에 분리해 놨던 음악을 다시 꺼내서 들었다. 그동안 써 놓은 가사와 맞춰 보며 세 곡을 빠르게 편곡해 나갔다.
이 세 곡은 수철이 만든 곡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곡들이다. 도어스에서 알바하면서 만들고, 작업실이 없어서 박 대표의 작업실을 빌려 쓰며 만들었던 곡들이다. ‘Film music without film’보다 더 오래 묵혀 놨던 곡들을 꺼내서 햇볕에 말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옷을 입히며 각각의 개성을 불어넣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음악은 점점 윤기와 생명력을 더해 갔다.
훗,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곡을 만들 때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잠시 작업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봤다.
이 세 곡은 불편한 감정이 많아서 묻어 뒀던 곡들이다. 세상을 피해서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었던 감정으로 가득했던 시기였다.
영원히 묻어 버릴 수도 있는 곡을 다시 세상에 꺼내 놓기로 결정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은 세 곡의 편곡을 마치자마자 새로운 세 곡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가사를 펼쳐 놓고 각각의 컨셉에 맞춰 집중했다. 본격적으로 창작욕을 불태웠다.
작업은 며칠 밤낮으로 계속됐다. 수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져들었다. 가끔 생사를 확인하려고 전화했다는 박 대표에의 농담 섞인 목소리가 그걸 증명했다.
―사라 제이가 부른 너에게로 가까이가 말이야…….
그 노래가 탑을 찍고, 사라가 다시 한번 신데렐라로 거듭났다는 소식.
수철이 ‘Radiate’의 초연에 참석하지 못해서 스테파노가 섭섭해했다는 얘기. 다행히 레베카가 대리인으로 참석하고, 레베카의 연락으로 전혜미 소프라노도 참석했다는 얘기. 할아버지 3인방도 느닷없이 나타나서 자리를 빛냈다는 얘기. 박 대표가 수철을 대신해서 선물과 꽃다발을 전했다는 얘기.
―‘Radiate’가 난리야. 그 고지식한 클래식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앞다투어 자신도 무대에 올리겠다고 기회를 엿보는 마에스트로가 여럿이야. 몇몇은 벌써 회사로 연락이 왔어, 널 만나고 싶다고.
수철은 박 대표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 대표가 뭔가 물을 때마다 ‘쌤이 알아서 해 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시간은 또 몇 주가 훌쩍 지나갔다.
이번 작업에서 수철은 오롯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빠져들었다. 그러자 그전과 다른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몸 안에서 굵은 울림이 계속 이어졌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뜨거운 에너지가 쏟아졌다.
수철은 이번 앨범의 제목을 타이틀 곡과 같은 이름으로 정했다. ‘The 끼’로.
이번 작업을 하면서 앨범의 타이틀처럼 몸 안에서 계속 끼가 꿈틀댔다. 수철은 그 끼를 피하지 않고 모두 끄집어내서 하얗게 불태웠다.
수철은 이렇게 예전의 세 곡과 새롭게 만든 세 곡을 포함해서 총 일곱 개의 곡을 만들었다. 나머지 한 곡은 ‘Radiate’다.
* * *
수철은 음악을 다 완성하고 순서를 붙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The 끼’를 두 번째 곡으로, ‘Radiate’를 맨 마지막 곡으로 넣고 나머지 곡들은 적당하게 위치를 잡았다.
순서를 정하고 보니 앨범 수록곡들이 무지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7개의 색깔이 서로 기대고 있는 그런 느낌.
문득 인간의 삶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기억, 아픈 기억들이 서로 기대면서 무지개를 만들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렇게 서로 버티고 있기에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음악들이 사람들에게 그런 느낌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기대서 버티고 있는 든든한 느낌.
앨범 ‘The 끼’의 존재의미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레인보우, 일곱 가지 색깔의 끼를 다 만들고 나서 수철은 오랜만에 본다이 비치를 걸었다.
앨범이 얼마나 히트하고, 이슈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번 앨범에서 수철은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었다. 내면이 시원해질 때까지 모든 것을 꺼내놓았고, 미친 듯이 집중했다.
흡사 광적으로 보일 정도로 작업하며 가사로, 음악으로, 마음속의 찌꺼기를 다 빼냈다. 그래서 시원하고 후련하다.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 * *
“앤디, 알바할래요?”―또 가사 번역요?
“네, 이번엔 지난번처럼 예민하게 하지 않아도 돼요. 노래는 한국어로만 부를 거니까요.”―그런데 왜……?
“멤버들에겐 영어로 들려주려고요. 그래야 어떤 노래인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수철은 써 놓은 가사를 영어로 번역해 달라고 앤디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한글과 영어 두 가지 버전으로 노래해서 데모를 만들었다.
한글 버전은 박 대표와 영준이 형, 다혜에게 보내고 영어 버전은 마커스, 루카스, 이언. 그리고 존에게 보냈다.
지이잉. 지이잉.
음악을 보내기가 무섭게 문자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마커스―괜한 걱정을 했네. 이제 시원하게 달려보자고. 하하하!
영준이 형―수철아,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오지? 가성이 아니라 진성인데? 음역대가 없는 건가?
루카스―용수철. 서둘러. 빨리 앨범 내야지. 어서 세상을 휩쓸자고! 하하하.
존―하하! 너, 그동안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이언―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진짜 크레이지 맨이야. 다 해 먹어라, 다 해 먹어. 하하.
모두가 노래를 듣고 한마디씩 코멘트를 해 왔다.
몇몇은 노래를 듣고 판단하라는 수철의 말이 ‘넌 꼭 하게 될 거야.’라는 주문으로 들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지금 확인했다고 했다.
노래가 아니라 한 편의 서사시를 듣는 듯한 느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리얼리?”
―하하, 리얼리.
수철이 되묻자 웃으며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다혜까지 연락이 왔다.
―미쳤다. 미쳤어. 야, 너 정말!
“마음에 들어?”
―그 정도가 아니지. 쌤은 대박 났다며 신나서 방방 뛰고 있고, 준이 오빠는 완전 주눅이 들었어. 네가 한국에 안 오고 외국에서 활동했으면 좋겠대. 하하.
“하하, 준이 형한테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전해 줘.”―하하.
박 대표도 결국 기쁨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해왔다.
―수철아!
“네, 쌤.”
―고맙다!
“하하, 쌤. Calm down please.”
수철은 박 대표의 감격에 젖은 멘트가 쏟아지기 전에 얼른 막았다.
―하하, 그래. 진정할게. 대표가 채신을 지켜야지. 그래도 이 한마디는 꼭 하고 싶어. 에너지가 확 솟아. 창작하고 싶다는 욕구가 말이야. 그리고 왠지 회춘한다는 기분도 들어.
“듣기 좋은 얘기네요. 쌤을 위해서라도 이런 곡을 자주 만들어야겠어요.”―하하, 이쁜 말만 골라서 하네. 곡도 만들고 노래도 불러 줘야지.
“네.”
―진석이에게 들려주면 뭐라고 할지 기대된다. 분명 난리가 날 거야, 숨넘어갈 수도 있고.
수철은 금별기획의 이진석 부장 이름을 들으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박 대표의 말을 끊었다.
“쌤.”
―응?
“레베카 있잖아요.”
―레베카?
“네, 레베카 좀 섭외해 주세요.”―레베카를 섭외하라니?
“레베카가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수철은 레베카가 교포 2세라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같이 다니며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얘기도 전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다시 레베카와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가 다가오고 있어서 박 대표에게 의사 타진을 해 달라고 했다.
―나도 레베카가 일을 잘한다는 인상을 받았어. 말 나온 김에 바로 전화해 봐야겠다. 영국이 지금 몇 시나 됐지?
그리고 몇 시간 후 바로 전화가 왔다.
―레베카가 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어. 정말 기뻐하더라고. 감사하다는 말도 계속하면서 열심히 하겠대.
레베카는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됐다며 소리까지 질렀다고 했다.
“굿 뉴스네요.”
―에이전트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훨씬 잘나갈 텐데. 한국에 오는 걸 기뻐하는 모습이 좀 당황스럽기도 하더라고.
“사람마다 다 다른 거니까요.”―그렇지, 사람마다 다 다르지. 그런데 너, 요즘 어른스러운 얘기를 자주 한다? 마치 인생을 오래 살아 본 거처럼?
“제가요?”
―녀석, 또 그런다. 암튼 레베카는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해서 기다리겠다고 했어. 그리고 금별의 진석이한테도 얘기해 놨어. 신경 써 달라고.
“네, 잘하셨어요. 감사해요. 쌤.”
역시 박 대표와는 손발이 착착 맞아서 돌아간다.
―진석이도 레베카가 일을 잘하는 에이전트여서 아깝다고 하더라고. 수철이 너만 아니면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다고 그랬어. 영국 지사의 지점장도 그렇게 마음에 들어했대.
레베카는 어디서나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재밌게도 박 대표가 전화를 끊자마자 레베카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수철 씨, 잘 지내셨나요? 호호.
박 대표가 말했던 것에 비해 레베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담 주에 한국으로 이사 가서 바로 ‘디데이 뮤직’으로 출근할 계획이에요. 그리고 곧 호주로 갈게요.
레베카는 박 대표에게 전화하기에 앞서 수철에게 먼저 전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곧 수철을 만나러 호주로 오겠다고 했다.
“레베카, 호주 말고 한국에서 봐요. 악기 녹음이 끝나는 대로 저도 한국으로 갈 거예요. 거기서 노래 녹음을 할 거니까요.”―아, 그러면 저는 너무 좋죠. 그동안 한국을 여행할 수 있겠네요. 강릉도 가고, 설악산도 가야겠어요. 단풍 구경하러요. 어머니 고향도 그곳이거든요.
“잘됐네요. 제가 돌아가면 다시 바빠질 테니까 그동안 즐거운 시간 많이 보내요.”―감사해요. 아, 그리고 대표님께 수철 씨가 노래할 거라는 얘기 듣고 깜짝 놀랐어요. 우린 그동안 재미난 에피소드가 좀 있었잖아요?
레베카는 은근슬쩍 유럽에서의 일들을 얘기했다.
“레베카, 쉿! 비밀이에요.”
* * *
“진짜 수철이 맞습니까?”
차 안에서 음악을 듣던 이진석 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맞아.”
박 대표는 끄덕이고는 헤드폰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것 쓰고 한 번 더 들어 봐. 그러면 수철의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릴 거야.”
이 부장은 박 대표의 말대로 헤드폰을 쓰고 다시 한번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는 이 부장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무언가를 노려보듯 동공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중엔 얼굴에서 열이 나는지 손등을 볼에 대고 문질렀다. 머릿속을 자극하는 소리에 움찔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