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첫 만남
이 부장은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더니 얼마나 에너지를 썼는지, 나중엔 지친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여력이 없었는지 헤드폰을 내려놓은 채 입을 벌리고는 잠시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그러다 잔뜩 커진 눈으로 옆을 봤다.
“제가 뭐라고 해야 하죠?”“뭐라고 하긴? 그냥 받은 느낌대로 솔직히 말하면 되지. 안 해도 상관없고. 네 표정만 봐도 알겠으니까.”
흥분한 이 부장에 비해 박 대표는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자신도 불과 얼마 전까지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냉정을 되찾았다.
이 부장은 박 대표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부터 흔들었다.
“어떻게 중저음에서 허스키한 소리가 나다가 고음에서는 이렇게 부드럽게 움직이죠? 마치 저음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같고, 고음은 조수미 같아요.”
“하하, 그런가?”
박 대표는 웃으며 두 명의 가수를 떠올려 봤다.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와 닮았다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수철의 보이스 컬러는 색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저음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두꺼운 소리가 풍성하게 났고, 고음은 팝페라를 하는 소프라노처럼 가볍게 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에는 국악의 창을 하듯이 날카롭게 소리를 끄집어냈다. 그래서 가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특히 절정 부분이 그랬다.
박 대표는 수철의 노래를 설명하려면 여러 명의 가수를 끌어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에 악기 녹음이 끝날 거야. 수철은 다음 주에 들어올 거고.”
박 대표가 어깨를 붙이며 말했지만, 이 부장은 아무 말도 귀에 안 들어오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작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무조건 합니다.”“그래, 그럴 줄 알았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노래까지 했으니 군침이 도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마스터링까지 다 듣고 결정해. 누가 뺏어 가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해도 늦지 않아.”“어차피 지금보다 더 좋아지는 거잖아요?”
“그렇겠지.”
“저는 결정했습니다. 기획서 짜서 위에도 바로 보고 올릴게요. 프레젠테이션도 준비하고요.”
이 부장은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박 대표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라고 음악을 들려준 거니까. 단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 줄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형님, 바로 진행하시죠!
“벌써 허락이 떨어졌어?”―하하, 아니요. 아직 프레젠테이션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사님과 얘기 나눴는데, 수철과 관련한 프로젝트는 무조건 오케이에요. 프레젠테이션은 형식일 뿐이고요. 제가 담당자니까 믿고 진행하셔도 돼요.
“하하, 그래도 일이란 게 순서가 있는데 뭘 이렇게 서둘러? 천천히 진행해도 되잖아? 아직 시간도 넉넉한데.”―쇼케이스 때문에 그럽니다.
“쇼케이스?”
―네, 앨범 내고 바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쇼케이스를 바로 하자고?”―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요.
“뭐! 체조경기장?”
말문이 막혔다. 이 부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 이제 막 가수로 데뷔하는 수철을 15,000석이 넘는 무대에 세우자니. 그것도 앨범을 내자마자.
“A급 가수들도 줄줄이 손해를 보는 곳에다 수철을 세우자고? 그것도 가수로 처음 공연하는 수철을?”
15,000석을 어떻게 채울지는 두 번째 문제다. 괜히 섣불리 밀어붙였다간 역반응이 날 수도 있다. 지금 한창 최고가를 달리고 있는 수철이 그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괜히 서둘렀다간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장은 자기 생각을 확신했다.
―저희는 계산 끝났습니다.
“계산이 끝났다니?”
―어젯밤부터 이것저것 다 두드려 봤습니다. 충분히 좋은 성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이 섰습니다.
아무리 협업이고 금별기획의 파워가 크다고 해도 수철은 엄연히 디데이 뮤직의 소속이다. 자기 가수 대하듯이 말하는 건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호응이 적어 절반도 채우지 못한다면 디데이 뮤직이 받을 타격이 훨씬 크다. 작곡가로서의 수철과 가수로서의 수철은 다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괜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쇼케이스를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이야.”―형님, 소극적으로 접근할 이유 없습니다. 저희 판단을 믿어보세요.
소극적이 아니라 급하게 진행할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도 이 부장이 강경해서 박 대표는 헛웃음이 났다.
“허허, 날짜는 있고?”
한 달 정도를 남겨 놓고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예약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는 최소 일 년 전에 예약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알아보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짜 있어?”
―네, 11월 마지막째 주 월, 화, 수요일이 비어 있습니다. 월, 화는 리허설 하고 공연은 수요일에 하면 됩니다.
“공연을 수요일에 하자고?”―네.
“하하, 하하.”
11월은 비수기다. 비수기에 앨범을 내는 것도 모자라 아직 데뷔도 안 한 가수를 15,000석이 넘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세우자더니, 이젠 수요일에 공연을 하자고? 박 대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터질 테니까요.
금별기획의 부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모하게 막 질러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철은 아직 무대에서 노래한 적이 없어. 녹음했을 때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현장에서는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모른다는 말이야. 실력과 그림은 다른 거니까.”―리허설 이틀 잡았으니까 그때 그림을 잡으면 되지 않겠어요?
“허허, 정말 불도저가 따로 없네.”―미룰 필요 없잖아요?
“너, 이러다 진짜 경위서 쓰는 거 아니야?”―그 반대일 겁니다.
“녀석, 참. 왜 이렇게 모험을 하려고 하는지.”
이 부장을 못 믿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있는 친구다. 그런 그가 계산 없이 판단했을 리도 없고, 이미 지난 ‘INTERSECTION’ 앨범에서 그 능력을 입증했다.
단지 이 부장이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에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걱정됐고, 그것이 수철에게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다.
“쇼케이스는 앨범 반응을 보며 천천히 하려고 했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우려하지 마세요. 저희가 무턱대고 결정하는 조직은 아니지 않습니까?
“알았어. 그건 그렇고. 15,000석은 어떻게 채울 생각이야? 그것도 수요일에?”―계산이 끝났다고 말씀드린 게 그 부분입니다. 수철의 티켓 파워를 고려해 봤을 때 충분히 다 채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오히려 관계자들에게 돌아갈 초대권이 없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토를 달 구석이 없었다. 모험이긴 하지만 일단은 믿어 볼 수밖에. 어차피 한배를 탔으니까.
“오케이, 알았어. 업무 협약서와 프로젝트 계약서는 언제 쓸까?”―우선 수철에게 그때 공연이 가능한지부터 물어봐 주세요. 그러면 바로 대관 예약을 먼저 해 놓을게요. 그리고 계약서는 내일 점심을 같이하면서 쓰면 되지 않을까요?
“오케이, 수철이랑 통화해 보고 다시 전화 줄게.”―네.
박 대표는 전화를 끊고 달력을 보면서 날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수철에게 전화했다.
“통화 가능?”
―네, 말씀하세요.
박 대표는 수철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전했다. 금별기획과 협업을 하기로 했고, 프로모션을 위해서 이 부장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알렸다.
“11월 마지막째 주 월, 화, 수야. 월, 화는 리허설이고, 공연은 수요일.”
―좋아요
“좋아?”
―네.
“녀석, 대답 한번 시원하네.”
박 대표는 아직도 수철의 바뀐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참고로 15,000석 규모의 대형 공연이야.”―알겠어요.
“다른 멤버들은?”
―가능할 거예요. 안 그래도 그때쯤 공연 한번 하자는 얘기가 나왔으니까요. 어쨌든 물어보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그래.”
모두의 대답은 예스였다. 둘째 주에 앨범 내고, 넷째 주에 쇼케이스. 모두 흥미진진하다며 좋아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월드 투어도 해 본 사람들이라 별다른 긴장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처음 가 보는 한국에서의 공연이라 긴장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단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고 수철은 박 대표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 * *
“헤이, 수철. 오늘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어!”
녹음을 하루 앞두고 멤버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식사도 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정을 얘기하기 위해서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루카스가 제일 먼저 나타났다.
“아직 아무도 안 온 건가?”“네, 루카스가 제일 가깝잖아요.”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존과 이언이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마커스는 태즈메이니아에서 오니까 시간이 걸리는 건가?”“금방 올 거예요.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받았어요.”“나머지 두 명은? 영준이 온다는 소식은 들었고, 건반을 맡게 된 소녀는 한국에서 오는 거야?”
하하, 소녀?
“어제 왔는데, 영준이 형 데리러 공항에 따라갔어요.”
다혜는 하루 일찍 호주에 도착했다. 바로 녹음하기가 부담된다며 수철과 음악을 한번 맞춰 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어제 하루는 수철도 다혜와 연습실에서 보냈다.
오늘은 앤디가 영준이 형을 픽업하러 가려는데, 다혜도 교수님께 인사하겠다며 공항에 따라갔다. 수철은 형이라고 부르는데, 다혜는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헬로우―!”
곧이어 마커스가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준이 형과 다혜도 도착했다.
영준이 형은 오자마자 루카스, 존, 이언과 반갑게 인사하고는 마커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존경하는 뮤지션에게 예를 갖췄다. 마커스도 영준이 형의 공연 영상을 봤다며 칭찬을 늘어놨다. 트럼펫 부는 모습이 젊은 시절의 마일스 데이비스를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마커스 M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다. 그 말에 영준이 형의 입은 벌어져서 닫힐 줄 몰랐다.
다혜는 이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고 뻘쭘해했다. 얼굴엔 긴장과 흥분이 섞여 있었다.
멤버들을 한 명씩 소개받을 때마다 입가에서는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내렸다. 다혜의 감정이 그랬다. 너무 기쁘고 그래서 너무 긴장되는.
통역은 수철과 영준이 형이 번갈아 가면서 맡았다. 멤버들은 모두 다혜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다혜도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모습이었다.
영준이 형은 내심 다혜가 오빠라고 부르길 바랐는데, 다혜는 계속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교수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갔지만 여전히 오빠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영준이 형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한마디 했다.
“앞으로 계속 같이 공연 다닐 텐데, 언제까지 날 교수님이라고 부를 생각이야?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세 명이나 있는데?”
말을 하며 마커스, 이언, 루카스를 봤다.
다혜는 난감해했다. 하지만 오빠라고 부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손톱을 뜯었다.
대꾸가 없자 영준이 형이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계속 교수님이라고 부르려고?”
“네.”
“알았어. 뭐, 호칭은 나중에 천천히 바꾸면 되지. 대신 한 번만 해 봐, 영준이 오빠라고.”
“…….”
수철은 멤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 먹을 음식을 주문하자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멤버들은 진지한 얼굴로 집중했다.
“지금 계획은 그래요. 다음 주에 보컬 녹음하고 믹싱이랑 마스터링 끝나면 바로 앨범을 출시하는 거예요. 그리고 2주 후에 쇼케이스고요.”“공연장이 15,000석이라고?”
“네,”
“어떻게 그게 가능해?”
“뭐가요?”
“사람들이 그만큼 모일 수가 있어? 첫 공연에다가, 평일인데?”“회사에서 가능하다고 판단하니까 진행하는 거예요. 오히려 넘칠까 봐 우려한다고 들었어요.”
“…….”
영준이 형과 다혜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회사에서 알아서 한다니까 군소리할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이해를 못 했다.
“한국의 에이전시는 정말 대단한가 봐.”
멤버들이 생각하는 에이전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건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수철은 디데이 뮤직에서 생각하는 일정과 금별기획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과거에 어떤 앨범을 어떻게 히트시켰는지.
“‘INTERSECTION’의 한국어 버전도 그 회사에서 진행한 거예요.”
그제야 멤버들은 의심을 거두고 한둘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홍보력이 얼마나 대단한 회사인지 익히 들었으니까.
“수철, 역시 넌 대단한 회사를 가졌구나?”
이언이 엄지를 세웠다. 모두 동의하는 눈치였다.
일정에 관해 설명을 마친 수철은 멤버들을 쭉 둘러봤다.
“숙제는 해 오셨죠?”
수철이 묻자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던 멤버들이 멈칫했다.
“하하, 숙제.”
루카스는 숙제라는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수철은 오늘 모이기 전에 모두에게 숙제를 내줬었다.
팀 이름을 하나씩 준비해 오라고.
오늘 이 자리에서 바로 투표로 결정할 거라고.
“누구부터 얘기해 볼까요?”
그 말에 서로의 눈치를 봤다. 큰 무대에서 수천 명 앞에 자신을 내보이면서도 긴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팀 이름을 정하는 자리에서는 긴장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자신이 생각해 온 이름이 웃음거리가 될까 봐 몸을 사렸다.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자 수철이 다시 입을 뗐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얘기할까요?”
“좋아.”
마커스가 좋은 선택이라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언이 반발했다.
“아니, 왜! 왼쪽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아?”
왼쪽 끝에 앉아 있는 마커스와 오른쪽 끝에 앉은 이언의 눈빛이 순간 부딪쳤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이언이 시선을 내렸다. 아무래도 마커스가 연장자고, 풍기는 포스가 있으니까. 수철은 서둘러 마커스의 편을 들었다.
“자, 어서 진행하자구요. 이언부터 말해 보죠?”
이언은 뻘쭘한 얼굴로 목덜미를 몇 번 긁적이고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