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00화 (200/239)

#200화. 또 다른 비밀의 11월

“만들어 오긴 했는데, 기대는 하지 마. 절대 웃지도 말고!”“투표로 결정하는 거니까 편하게 얘기해 보세요.”

이언은 주위의 표정을 한번 살피고는 수철만 들으라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내가 생각한 이름은 판타스틱 사운드 머신이야. 줄여서 FSM.”

풉.

몇몇이 웃음을 뿜으려다 참았다. 여기저기서 그런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순서를 앞두고 있어서 서둘러 표정을 바꿔 잡았다.

무대에서는 그렇게 도도하고 오만방자하던 이언의 표정이 부끄럽게 변했다.

“거봐! 오른쪽부터 돌자니까.”

수철을 보는 이언의 눈빛엔 원망이 가득했다.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며 조용히 예스를 외쳤다. 자기가 생각해 온 이름이 이언의 것보다 나을 거라는 뜻이었다.

“다음, 루카스는요?”“난 좀 터프하게 지었어. 세븐 블루 핫 헤드뱅잉.”

루카스는 주저 없이 얘기했다.

흐읍!

이번엔 수철이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억지로 숨을 참았다. 아닌 척 멀뚱히 있지만, 입가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영준이 형은 아예 시선을 돌려서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다혜는 고개를 숙여서 손톱을 만지고 있었지만, 어깨가 들썩였다. 아무나 한 명이 웃으면 모두 빵 터질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무도 쉽사리 총대를 멜 수가 없었다. 루카스의 굵은 팔뚝이 떡하니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루카스, 무슨 뜻이에요?”

수철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의미를 물었다.

“세븐은 우리가 7명이니까 붙인 거고, 블루 핫은, 레드핫칠리페퍼스가 있으니까 반대로 붙인 거야. 우린 차가운 이성으로 파괴력 있는 음악을 하자는 의미지. 헤드뱅잉은 말 그대로 격렬하게 음악을 한다는 뜻이고.”

루카스가 만든 이름은 수철의 음악 색깔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냥 루카스가 하고 싶은 밴드의 이름이었다. 뭐라고 더는 말하기가 어려웠다. 루카스의 설명을 들을 사람들은 피식피식 웃다가 나중엔 루카스가 말한 것처럼 차가운 이성을 되찾고 과묵해졌다. 팀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다혜는 이름짓기에서 빠졌다. 사람들도 잘 모르고, 같이 음악을 해 본 적도 없기에 자기가 나서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름 짓는 데 자신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멤버들은 모두 다혜를 이해했다. 한국에서 온 예쁘고 수줍은 소녀라고 생각하며 다혜를 귀여운 눈으로 바라봤다. 영준이 형은 끄덕였고, 수철은 침묵했다.

“난 좀 심플하게 만들어 봤어. Seven People To World, 세계로 가는 일곱 명”

영준이 형이 지은 이름은 영화 제목 같았다. 지구를 구하는 히어로 영화.

“다음, 존.”

“수철, 미안해. 난 못 만들었어.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닌데, 머리가 너무 아팠어, 난 이런 건 정말 못하거든. 난 투표만 할게. 이해해 줘.”

존은 사람들을 보며 미안해했다. 그러자 마커스가 급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나도.”

“……?”

“나도 존이랑 같아. 몇 개 생각해 봤는데 정말 못 만들겠어. 태즈메이니아 동물들 이름만 계속 맴돌더라고. 그렇다고 동물 이름을 밴드에 넣을 수는 없잖아? 미안해. 나도 존처럼 빠질게.”

순간 팀 이름을 말한 사람들의 얼굴에 배신감이 번졌다.

특히 웃음거리가 됐던 이언과 루카스는 눈을 치켜떴다. 수철을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공평하게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수철은 난처했다. 잠시 고민하며 지혜를 모았다.

“이름을 안 만들어 왔으면 손해예요. 나중에 누군가 만든 이름이 계속 언론과 사람들 입에 불려질 테니까요. 그것만큼 기쁜 일이 없잖아요?”

그 말에 이언과 루카스가 웃음을 머금었다. 둘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수철도 같이 웃음을 머금었다. 뭔가 기대하는 둘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둘의 이름이 선택될 거 같지 않은데.

이제 모두의 시선이 수철에게 향했다. 앨범을 기획했고, 팀을 만들었고, 가사와 곡을 쓴 장본인을 모두가 바라봤다.

“저는 Another Secret November라고 붙여봤어요. 줄여서 ASN.”“Another Secret November?”

동시에 읊조리며 무슨 뜻인지 궁금해했다.

“우리에게 11월이 특별하잖아요. 앨범을 내는 달도 11월이고, 첫 공연을 하는 것도 11월이니까요.”“그래, 의미가 있는 달이지.”

수철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시큰둥했다. 뭔가 색다른 의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단순했기 때문이다. 수철은 사람들의 표정을 쭉 살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

“우리가 모두 11월에 태어났더라고요?”

“리얼리?”

“진짜?”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번갈아 봤다.

“네, 저 그거 알고 완전 소름 돋았어요.”“하하, 진짜 그렇단 말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럼 우리 모두 다음 달이 생일이라는 말이네?”“네, 심지어 마커스는 앨범 출시하는 주에 생일이 있고요. 여기 다혜는 쇼케이스 다음 날이 생일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마커스와 다혜에게로 옮겨갔다.

“하하, 맞아. 난 둘째 주 금요일이 생일이야.”

마커스는 맞는다며 끄덕였고.

“네, 저는 마지막 주 목요일이 생일이에요.”

다혜는 괜히 얼굴이 발개져서 수줍게 끄덕였다.

“하하, 생일 파티가 벌써 두 개가 잡혔군.”“아니지, 일곱 번이지. 우리가 모두 11월이래잖아.”“아! 그렇군. 그러면 파티를 일곱 번이나 해야겠군! 하하하!”

루카스가 이언의 말에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생일을 빠르게 확인하고 공유했다. 이제 멤버들은 서로의 생일을 기억하게 됐다. 모두 비슷하게 걸쳐 있으니까.

“서로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만나서 팀을 이룬 것도 신기한데, 모두의 생일이 11월이라니. 이건 어떤 운명이 작용한 게 분명해.”

마커스는 사람들이 모인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어쨌든 모두가 수철이 말한 팀 이름이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11월에 대한 이유가 임팩트가 강했다.

그런데 다혜는 사람들과 표정이 좀 달랐다. 수철이 팀 이름을 말하는 순간부터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럴 만했다. 예전의 수철은 제목이나 팀 이름을 짓는 데는 잼병이었으니까.

이번에 이름을 만들면서 확실히 느꼈다. 가사를 쓰다 보니까 이것저것 느는 게 많다는 걸.

“자, 이제 투표할게요. 편하게 손을 들어 주세요.”

사람들은 알겠다며 끄덕였다. 수철은 하나씩 순서대로 이름을 불렀다.

“판타스틱 사운드 머신, 줄여서 FSM이 좋다, 손.”

아무도 손을 들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의견을 제안한 이언도 들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민망할까 봐 시선을 서로 다른 데 뒀다.

마커스는 아예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연륜이 묻어나는 자세였다.

“다음은 세븐 블루 핫 헤드뱅잉.”

“킥킥, 킥킥.”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루카스가 가슴을 들썩이며 먼저 웃었다.

“하하, 하하.”

루카스의 웃음에 사람들도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모두가 시원하고 통쾌하게 한 번씩 다 웃었다. 수철도 한참을 웃고 나서야 다음 이름을 말했다.

“Seven People To World.”

“…….”

음.

“Another Secret November.”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든 이름을 말할 때 수철은 뻘줌했다. 그전까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수철에게 한 표 던질게.”

마커스가 제일 먼저 손을 들며 수철이 만든 이름을 지지했다.

“나도.”

“나도.”

“나도.”

모두가 따라서 손을 들었다.

투표는 싱겁게 끝나 버렸다. 기대했던 박빙의 승부는 벌어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수철이 만든 이름으로 결정된 분위기였다.

수철은 민망했다.

숙제를 내줬는데 자신이 만든 것으로 결정됐으니. 그것도 만장일치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 꼴이 되었다. 제목 잘 짓는다고 자랑한 꼴이 되었다.

어쨌든 모두의 찬성으로 ‘Another Secret November’가 선택됐다. 이제 7명이 함께하는 팀 이름은 ‘Another Secret November, 또 다른 비밀의 11월’이다.

“수철이 만든 이름이 의미도 있지만, 기억하기 쉽고 임팩트가 있어서 마음에 들어.”

투표가 끝나고 마커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마커스와 같은 생각이에요. 특히 팀 이름에 의미가 있어서 마음에 들어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 같잖아요.”

이름을 지어 오지 않아서 한 발짝 떨어져 얘기만 듣던 존도 뒤늦게 한마디 얹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혜는 수철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너, 다음에 내가 팀 이름 부탁하면 지어 줘야 해.”

협박투였다.

“팀을 또 하게?”

“만약에 말이야.”

“……그래,”

수철이 마지못해서 대답하는데 멀리서 이언이 툭 내뱉었다.

“나중에 팬들도 편하겠어.”

“……?”

“모두의 생일이 11월이니까 선물 보내기가 쉽잖아? 기억하기도 좋고.”

그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언. 너무 앞서가는 거 아냐?”

* * *

“마이크 세팅만 확인하고 바로 시작할게요.”

녹음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됐다. 하루에 일곱 곡을 끝내야 하기에.

덕분에 몇몇 멤버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나타나 진한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그중에 한 명이 루카스였다.

“루카스, 컨디션 괜찮아요?”

수철은 루카스의 컨디션부터 확인했다. 누구보다 루카스가 안 좋으면 녹음 진행이 안 된다. 드럼을 쳐야 하니까.

“컨디션? 나쁘지 않아. 커피 한잔 마시고 바로 시작하면 돼.”

루카스는 대답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수철은 프로듀서이자 디렉터로서 멤버들의 컨디션을 확인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각 분야에서 이름난 프로다. 알아서 관리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눈을 비비며 등장해서 괜한 우려를 했다.

“손도 풀 겸 쭉 한번 맞춰 보고 갈까?”

마커스의 제안에 모두가 부스가 아닌 연습실로 향했다. 수철은 이런 마커스가 너무 든든했다. 수철이 편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뒤에서 잘 받쳐 준다. 다른 멤버들도 마커스의 말이라면 토를 달지 않는다.

원 투 쓰리 포!

루카스의 박에 맞춰 합주가 시작되자, 모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철이 보내 준 음악을 그대로 연주했다. 그리고 곡이 이어질수록 각자의 개성이 담긴 연주력을 붙여서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괜히 슈퍼밴드가 아니었다.

“빨리 끝나겠는데요? 샌드위치 하나 먹고 천천히 시작해도 되겠어요.”

멤버들의 연주가 든든해서 수철은 분위기를 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엔지니어가 컨트롤 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샌드위치는 두세 곡 하고 나서 먹지 뭐. 오전에 많이 녹음해야 오후가 편하지 않겠어?”

역시 마커스.

또 한 번 수철을 조력했다.

“자, 마이크 한 번씩 체크해 볼게요.”

이번엔 수철도 컨트롤 룸에 있지 않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연주하는 느낌이 살게, 가이드를 부르기 위해서다.

원앤, 투앤, 쓰리앤, 포!

음악은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 합주까지 한 탓에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다혜만 조금 긴장했지만, 곡이 이어질수록 금방 컨디션을 회복했다. 확실히 수철과 하루 동안 연습한 효과가 있었다.

음악은 최고의 연주자들이 연주한 만큼 수철이 보내 준 데모보다 입체감이 뛰어났다. 구석구석 빈틈이 없게 디테일이 꽉꽉 들어찼다. 그러면서도 서로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낄 땐 주저하지 않고 끼어들었고, 빠져야 할 땐 후루룩 물 빠지듯이 빠졌다.

하지만 ‘Radiate’를 녹음할 때는 모두 긴장했다. 수철이 미리 녹음해 놓은 한국의 타악기들과 어우러지려고 집중했다. 연습을 해 왔지만 그래도 이들에겐 생소한 악기다. 특히 가야금은 그루브를 타기가 어려웠다. 유일하게 다혜만 ‘Radiate’의 녹음이 시작되자 날아다녔다. 편곡은 달라졌지만, 오디션 때 해 본 적이 있고, 연습도 해 봤기 때문이다. 영준이 형도 ‘Radiate’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트럼펫이 주는 환상적인 소리를 마음껏 뿜어냈다. 그 어떤 악기보다 트럼펫이 한국의 전통악기와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길게 내뿜은 트럼펫 소리에서 한국인의 서정적인 정서가 느껴졌다.

다른 멤버들도 영준이 형의 트럼펫 연주를 만족해하며 박수까지 쳤다. 마커스가 엄지를 세우자 영준이 형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 *

“수철, 너 엄청 섹시하다?”

수철이 여행 동안 방치해서 길어진 머리를 고무줄로 묶자, 뒤에서 기타를 들고 있던 이언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언, 흐흐.”

수철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런 이야긴 자제해 주세요. 남자한테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아니,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가 내 옛날 여자친구.”

수철이 째려보자 이언이 말을 멈췄다. 괜히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줄을 조율했다.

수철은 고개를 저었고 다른 사람들은 빙그레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녹음을 마치고 컨트롤 룸에 들어온 수철은 엔지니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녹음은 잘됐죠?”

“네, 전반적으로 소리는 다 잘 들어왔어요.”

수철은 녹음하는 내내 든든하고 여유로웠다. 모두가 자기 맡은 바 연주를 기대 이상으로 잘했다. 역시 최고의 팀이었다.

녹음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하지만 어느새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녹음 끝났으면 한잔해야지?”

멤버들은 자신의 클럽에서 쫑파티를 하자는 루카스의 제안에 모두 클럽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