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01화 (201/239)

#201화. 러닝타임 7분 20초

“오늘은 공연이 없나 봐?”“쫑파티 할 생각에 다 취소했어.”

“진짜?”

“하하, 농담이야. 원래 오늘은 공연이 없는 날이야.”

루카스가 있으니까 여러모로 편한 점이 많았다. 그의 클럽이 점점 팀의 아지트가 되어 가고 있다.

루카스는 음식이 나오기 전에 건배부터 하자며 양손 가득히 맥주를 들고 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멤버들은 한 병씩 잡아서 병뚜껑을 돌려서 열고, 부딪쳤다.

“Cheers!”

“Cheers! For Another Secret November!”“우리끼리 있을 땐 줄여서 ASN이라고 하자.”

“오케이 For ASN!”

“For ASN!”

멤버들은 녹음한 후기를 얘기하며 계속 맥주병을 부딪쳤고, 가벼운 장난을 치며 어색함이 남아 있는 몇몇 멤버의 분위기를 바꿔 나갔다. 덕분에 다혜도 멤버들과 한결 가까워졌다.

“한국말로 건배를 ‘짠’이라고 해요. 짠!”

“짠!”

의외로 다혜는 인기가 많았다. 멤버들은 한국에서 온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다혜는 라디오 때문에 아침 일찍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끝까지 자리를 함께할 수가 없다.

그걸 아는 수철은 쫑파티 대신 짧게라도 시드니를 구경시켜 줄 생각이었지만, 다혜는 멤버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쫑파티에 참석했다.

“수철아, 나 그만 가야겠어.”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자 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멤버들은 아쉬운 얼굴로 작별을 했다. 모두 택시 타는 데까지 따라 나와서 다혜를 배웅했다.

“잘 가, 다혜.”

“네, 한국에서 뵐게요!”

다혜는 한국에서 쇼케이스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멤버들 중 몇몇은 일찍 한국에 가서 여행할 거라는 말을 하며 그때 보자고 여운을 남겼다.

수철은 다혜를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같이 택시에 올랐다.

다혜를 배웅하고 클럽으로 돌아온 멤버들은 다시 잔을 부딪쳤다. 루카스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으며 분위기를 이어갔다.

“수철이 같이하자고 했을 때, 마치 대학에 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하하.”

포크를 입에 물고 수철과 다혜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보던 이언이 웃으며 말했다.

영준이 형도 따라 웃었다.

“하하, 그럴 만하지. 수철에게 발탁되는 것만으로도 고속도로에 올라타는 거니까.”

“……?”

“지금까지 수철이 한 것 중에 안 된 게 없거든. 모두 1위를 휩쓸었으니까.”“와우! 그 정도였어?”

“응.”

“내 예감이 맞았다는 얘기네? 그럼 건배 한 번 더 해야지!”

루카스가 끼어들며 두꺼운 손에 들린 맥주를 내밀었다.

“캡틴을 위해서!”

“캡틴?”

“수철이 캡틴이잖아?”“하하! 그래, 수철 캡틴을 위해서 짠!”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커스는 수철에게 좋은 리더쉽을 부탁해야겠다며 농담을 던졌다.

“하하!”

“하하!”

모두 크게 웃었다. 멤버들은 녹음을 잘 마무리한 탓에 모두 기분이 좋았다. 편한 마음으로 잔을 부딪치며 팀워크를 다졌다.

* * *

수철과 다혜가 탄 택시가 엘진 호텔 앞에서 멈췄다. 둘은 택시에서 호텔 앞에서 작별했다.

“구경도 못 하고 그냥 가서 좀 미안하네.”“미안할 거 뭐 있어? 내가 바빠서 그런 건데.”

수철은 멀리 호주까지 왔는데 시드니 관광도 못 시켜 준 채 다혜를 돌려보내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다혜는 미안해하지 말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라디오는 언제까지 할 생각이야?”“원래는 내년 개편 때까지 할 생각이었는데, 팀을 해야 하니까 이번에 가서 얘기해야지.”

“개편이 언젠데?”

“내년 3월.”

“3월이면 괜찮을 거 같은데? 1, 2월엔 공연이 없을 테니까.”

겨울엔 공연이 비수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도 일단 얘기는 해야지. 나중에 땜빵을 쓰더라도.”“그래, 가서 잘 얘기하고. 아쉽지만 호주 구경은 다음에 하자. 그때는 쌤도 같이 와서 말이야.”“여기서도 공연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해야지. 영준이 형이랑 너, 나 빼고는 다 여기서 살고 있으니까.”“그럼 그때 여행하면 되겠네. 쌤도 같이 오고.”“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내가 쌤한테 얘기해 볼게.”“알았어. 그건 그렇게 하고. 어서 가 봐. 멤버들 기다리겠다.”

다혜는 수철의 등을 떠밀었다.

“내가 내일 공항에 데려다줄까?”“아니야, 내가 알아서 갈게. 호텔에 부탁해서 택시 부르면 돼.”

“괜찮겠어?”

“응, 너도 편하게 술 마시려면 그게 좋잖아? 네가 리더인데 몸 사리면 안 되지.”

“…….”

“…….”

“그래, 알았어. 조심히 가고, 한국에서 봐.”

“그래, 그때 봐.”

돌아서는 수철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친구를 낯선 곳에 혼자 남겨두고 가는 기분이 씁쓸했다.

택시를 잡으려다 전화기를 들었다.

“앤디,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했나요?”―아니에요, 얘기하세요.

“혹시 내일 다혜 공항까지 좀 태워 줄 수 있을까요?”―시간이 몇 시였죠?

“출발이 10시니까 8시까지는 가야 할 거 같아요.”―네, 가능해요. 내가 다혜 씨 모셔다드릴게요.

“감사해요, 앤디. 정말 고마워요.”

수철은 마음 한구석의 미안함을 조금 덜었다.

“어서 와, 캡틴!”

수철은 다시 클럽으로 돌아가 멤버들과 잔을 부딪쳤다. 늦은 시간까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얘기하며 함께 어울렸다.

으으윽!

다음 날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기지개를 켜며 방 안을 보니 마커스와 영준이 형이 바닥에 널브러져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수철은 소파에서 일어나 물을 한잔 들이켜고 바닷가로 나갔다.

파란 하늘을 보니 다혜가 서울을 향해 한창 날아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자켓은 신경 안 써도 됩니까?”

발매될 앨범에 대해 회의를 하던 정 실장이 물었다. 박 대표가 대답했다.

“응, 이번엔 자켓도 금별에서 진행할 거야.”

이번 앨범 ‘The 끼’의 자켓은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기로 했다. 회사나 멤버들이 관여하지 않고, 음악과 상관없는 아티스트에게 맡겨서 순수 창작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이 제안은 금별의 이 부장이 했다. 박 대표는 흔쾌히 동의했고, 수철도 좋다고 했다.

윤천화 미술가는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유명하다. 금별의 이 부장과는 과거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기획한 인연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수철이 보내온 데모를 들어 본 윤 미술가는 흔쾌히 승낙했다. 녹음을 진행하는 동안 구상하고, 녹음이 끝나면 파이널 버전을 듣고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다른 스케줄은 차질 없지?”“네, 내일 수철 씨가 들어오면 하루 쉬고, 보컬 녹음은 예정대로 모레 오전부터 진행됩니다.”

박 대표의 물음에 민 팀장이 몸을 세우며 대답했다.

“시간은 얼마나 잡았어?”“넉넉하게 이틀 잡았습니다.”“수철은 노래 끝나면 바로 믹싱하는 스타일이니까 참고하고. 마스터링은 이틀 후로 하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민 팀장이 빠릿하게 대답하자 박 대표는 손을 비비며 모인 사람들을 봤다.

“앨범 출시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각자 맡은 스케줄 다시 한번 확인해.”

“네.”

“그리고 민 팀장과 유 팀장은 유통사 체크하고, 보도 자료 꼼꼼히 챙기고.”

“네, 알겠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캐럴 같은 곡을 준비하는 11월에 디데이 뮤직은 앨범 출시와 쇼케이스까지 준비하느라 바빠졌다. 물론 쇼케이스는 금별이 맡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할 수는 없다. 수철의 첫 공연이다.

“그런데 금별은 정말 대단합니다.”

중요한 일정 체크가 끝나자 정 실장이 말을 붙였다. 박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아직 녹음도 안 했는데 수철 씨가 노래할 거라는 얘기가 관계자들 사이에서 솔솔 흘러나오고 있습니다.”“그게 금별의 장기지.”

박 대표는 알고 있다는 듯이 대꾸하며 말을 이었다.

“금별이 앞장서서 쇼케이스를 진행하고, 앨범 홍보도 지원한다고 해서 우리 디데이 뮤직이 느슨하게 하면 안 돼. 주체는 우리니까.”

“알겠습니다.”

“쇼케이스도 신경 써야 해. 수철이 남의 가수가 아니잖아?

너무 금별기획만 믿고 있는 것 같아서 박 대표가 한마디 했다.

“금별은 사람들이 공연을 잘 보지 않는 수요일이라는 것에 힘을 실어서 헤드라인을 뽑을 거야. 핸디캡을 장점으로 삼겠다는 발상이지.”“좋은 발상 같습니다.”“그래, 날짜를 그렇게 선택했으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수철의 잠재적인 티켓 파워를 믿고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좌석을 채우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고.”

모두 금별의 능력을 잘 알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든 박 대표와 직원들은 수철의 앨범에 맞춰 일정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느라 바빠졌다. 평소 같으면 한가해야 할 연말에 일이 더 많아졌다. 대신 박 대표는 쇼케이스가 끝나면 직원들에게 넉넉한 보너스와 함께 휴가를 줄 생각이다.

“내일 공항은 레베카가 나갈 건가?”

박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자,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레베카가 시선을 마주쳤다.

“네, 제가 갈 겁니다. 이제 저도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하하, 그렇군. 수철이 레베카를 보면 든든해할 거야.”“네, 기대하고 있습니다.”

* * *

“준비되셨나요?”

“네, 음악 주세요.”

수철은 한국에 들어온 다음 날 바로 녹음을 시작했다.

수철이 부스 안에 들어가서 헤드폰을 쓰고 고개를 끄덕이자, 엔지니어가 호주에서 녹음해 온 악기 트랙을 플레이했다.

수철은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박 대표와 정 실장 그리고 레베카가 컨트롤 룸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뒤, 금별의 이진석 부장도 부리나케 녹음실에 들어와서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컨트롤 룸으로 들어왔다. 사람들과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고는 어두운 룸에서 부스 안의 수철을 지켜봤다.

수철은 순서대로 한 곡씩 빈 트랙을 채워 나갔다. 연기자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듯이 수철도 마이크 앞에서 손을 움직이며 자신의 감정을 연기했다.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귀만 기울였다. 잠시라도 수철의 노래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수철의 흡입력 강한 소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음은 ‘Radiate’를 부를게요.”“마지막 곡을 먼저 하신다고요?”“네, 틀어 주세요.”

수철은 에너지를 조절했다. 힘이 있을 때 가장 에너지 소비가 많은 곡을 먼저 부를 생각이었다.

반주가 시작되자 잠시 숨을 고른 수철이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마디가 지나자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춤을 추다가 꺾였어. 용서를 말해야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

멜로디가 붙어 있지만, 빠른 리듬 때문에 랩처럼 들렸다.

―이젠 찾으러 가겠어. 네가 꺾어 버린 내 날개. 네가 뺏어간 내 하늘을.

빨라졌던 리듬이 다시 잔잔해지며 모든 악기의 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야금이 등장해서 멜로디를 뜯더니, 곧이어 태평소 소리가 적막을 뚫고 나타났다. 수철은 잠시 멈췄던 노래를 이어 갔다.

―왜 울고 있나요? 혹시 나를 아나요? 눈물을 멈추고 내 손을 잡아요. 다시 돌아갈게요―

수철은 마지막 호흡에서 숨이 다 할 때까지 길게 끌며 여운을 남겼다.

‘Radiate’는 데모로 들었을 때보다 훨씬 선명해져 있었다. 꽹과리, 장고, 북 등의 타악기 소리가 툭 튀어나와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멤버들이 연주한 서양 악기들도 한국 전통악기를 잘 받치고 있었다. 마에스트로 스테파노가 편곡한 ‘Radiate’가 한국과 서양악기의 협연이었다면 수철은 한국의 타악기들을 대놓고 앞으로 끌어냈다. 그것도 날것 그대로, 특히 가야금 소리가 나타날 때 다른 악기들은 모두 연주를 멈췄다. 태평소만이 느지막이 등장해서 가야금과 섞여서 어우러졌다. 박 대표는 여기서 수철의 의도를 읽었다. 자신의 오랜 트라우마를 해소하겠다는. 그래서 수철에게 ‘Radiate’는 한국의 소리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

노래가 끝나고도 녹음실엔 한없이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수철이 고개를 들기 전까지 아무도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5분만 쉬었다 할게요.”

잠시 후 수철이 고개를 들었다. 부스 안의 의자에 몸을 기대고 물을 마셨다.

박 대표는 러닝 타임(running time)부터 체크했다.

러닝 타임 7분 20초.

15분을 넘겼던 오디션 때에 비해서 짧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긴 시간. 하지만 노래가 길다고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