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공연은 계속된다.
대기실로 돌아온 멤버들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서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얼굴은 기분 좋게 상기되어 있었다. 성공적인 공연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잠시 등을 기댔다.
“오늘 끝내줬어!”
컨디션을 가장 먼저 회복한 마커스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다니며 멤버들과 손을 마주쳤다. 다른 멤버들도 그제야 몸을 세우고 서로 손을 부딪쳤다. 입가에 환하게 웃음이 퍼졌다.
멤버들의 얼굴은 다리미로 다리기라도 한 듯이 활짝 펴져 있었다. 특히 마커스는 얼굴에 주름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훌륭한 공연이었어요. 모두 좋은 공연 보여 주셔서 감사하고 또 축하해요.”
뒤늦게 대기실에 들어온 박 대표는 멤버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감사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내 인생 최고의 공연이었어요!”
이 부장도 깜짝 방문해서 흥분한 목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수철과는 포옹까지 했다. 자신이 기획자임에도 불구하고 수철을 한 명의 팬처럼 바라봤다. 오늘 공연이 감동적이었다는 뜻이다.
“관중들은 오늘 공연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고.”“맞아요, 아직도 귓가에서 수철 씨의 노랫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박 대표와 이 부장은 다시 한번 무대 밖에서 바라본 오늘 공연의 분위기와 자신들의 소감을 전했다.
―10분 후에 차량으로 이동하실게요!
스탭들이 와서 퇴장을 알리자 멤버들은 관중이 다 빠져나가고 조명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량에 올랐다.
와― 저기!
멤버들이 탄 차량이 올림픽 공원을 빠져나가려는데, 기다리고 있던 팬들이 몰려들었다. 기자들도 차량을 향해 달려들며 마이크를 들이밀거나 카메라 플래시를 연발했다. 안전 요원이 나서서 이들을 막아서고 나서야 차는 어렵게 공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차량에는 꽃다발과 편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레베카는 호텔에 도착해서 그 편지를 다 떼어야 했다. 떼고 보니 모두가 수철에게 보내는 거였다. 한 통만 빼고.
“아이, 얘는 또 왔었네?”
다혜를 짝사랑하는 고딩 거였다.
* * *
숙소에서 샤워하고 잠시 휴식한 멤버들은 만찬회장으로 다시 모였다.
여기는 이번 쇼케이스에서 고생한 스탭들과 관계자들까지 참석한 파티였다. 수철과 멤버들은 고생한 스탭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식사를 한 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대표는 숙소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멤버들끼리 편하게 쫑파티를 하라고 장소를 빌려 놓았다. 만찬회 자리는 수철과 멤버들이 불편해할 것을 잘 아는 박 대표의 배려였다.
“아직도 공연의 열기가 사라지지 않는 거 같아.”
루카스가 시원하게 맥주 한 병을 다 들이켜고 갈증이 풀리자 그제야 오늘 공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하하, 루카스. 공연 많이 했잖아요? 새삼스럽게.”
수철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야, 난 살면서 이런 공연은 처음이야. 피가 끓더라고.”
“피가 끓어요?”
“그래, 어떻게 나온 지 이 주밖에 안 된 앨범을 다 따라 불러? 미친 거 아냐? 한국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해?”
루카스가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이언이 끼어들었다.
“다혜가 그러던데, 그걸 ‘떼창?’이라고 부른다며? 암튼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완전히 매직 같았어. 우리 모두 소름 돋은 건 사실이잖아?”
그 말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맥주를 들이켜던 마커스도 합류했다.
“아마, 지구상에 그런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걸?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공연을 다니면서 그런 모습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곡을 통째로 다 따라 부르는 거 말이야. 하하.”
가끔 몇 소절을 따라 부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 곡 전체를 부르는 경우는 처음 봤다고 했다. 게다가 관중이 자신감 있게 노래 부르는 모습도 인상적이라고 했다.
“루카스 말대로 한국 관중은 모두 미친 거 맞아. 하하!”“하하!
잠자코 있던 존까지 나서서 동의하며 크게 웃자, 모두 따라서 기분 좋게 웃었다.
수철도 멤버들의 말에 백 프로 공감했다. 수철도 그랬으니까.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서 터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무대에서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건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밧줄로 서로 연결된 기분이었다. 경험하지 않으면 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호주에서 온 네 명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오늘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오늘 공연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맞아, 난 벌써부터 한국에서 또 공연하고 싶어.”“하하, 나도 마찬가지야. 우린 이번 공연을 위해서 수고해 주신 두 회사와 스탭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해.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어.”
역시 가장 연장자이자 공연을 많이 다녀 본 마커스가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멤버들은 모두 끄덕이며 수철을 봤다. 수철은 그 마음을 회사 분들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기운을 차린 멤버들은 번갈아 가며 잔을 부딪쳤다. 오늘은 다혜와 영준이 형도 마음껏 술을 마시며 멤버들과 어울렸다.
“우리 다음 공연은 어디지?”
한참 오늘 공연 분위기에 대해서 떠들던 이언이 벌써 다음 공연을 얘기했다.
“다음 차례는 호주에서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한국에서 했으니 호주에서도 해야지.”
루카스가 의견을 제시하자 영준이 형도 끄덕였다.
“호주에서 하는 건 가능하겠어. 한국과 아시아는 겨울이라서 어렵지만, 호주는 이제 계속 여름이잖아.”
그 말에 멤버들 모두 끄덕였다.
수철은 만찬회 자리를 마무리하고 방문한 박 대표에게 멤버들의 생각을 전했다.
박 대표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한국은 비수기지만 호주는 그렇지 않으니까 공연을 계속 이어갈 수 있어서 딱 좋다고 했다.
“‘ASN’ 멤버들 네 명이 호주에서 살고 있으니까 호주 공연은 당연히 해야지. 연말 지나고 내년 2월쯤에 하면 좋겠다. 이 부분은 이 부장과 바로 상의해 볼게.”
박 대표는 멤버들이 살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수철이 작곡한 제시의 앨범이 모두 호주에서 빅히트를 했으니까 호주 공연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했다. 아주 좋은 기회라며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예―! 예―!
박 대표의 말에 호주에서 온 멤버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 * *
할아버지 3인방, 김명석, 하준, 하린, 은주, 마이클, 도어스 형,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들까지.
공연에 왔던 사람들이 모두 축하 메시지를 전해 왔다.
축하해, 멋있어, 끝내줬어. 딴 사람 같아, 믿기지 않는다. 등등의 표현과 함께.
수철은 다음 날 아침 문자에 일일이 답장하고 몇몇과는 통화를 한 후, 점심시간에 맞춰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서는 한창 쇼케이스 정산 작업과 프로젝트를 정리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팀원들은 호텔에서 휴식 중이지?”“네, 어제 과음해서 쉬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일정의 변화가 있어서 점심도 먹을 겸 잠깐 보자고 한 거야.”
“어떤 일정이요?”
“요청 들어온 것 다 거절하려고.”
“네? 전부 다요?”
“응,”
쇼케이스 전부터 방송 출연 요청과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쇼케이스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답변하고는 수철에게 의사를 물었었다. 수철은 하겠다고 했고, 박 대표는 그중에 좋은 것만 몇 개를 선별해서 조율하겠다고 했었다. 팀을 알리는 스피커는 필요하니까.
그런데 그 일정을 다 캔슬하겠다는 말이었다.
“왜요? 갑자기?”
“이 부장과 어제 네가 말한 호주 공연을 얘기하다가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어. 방송 출연은 쇼케이스로 한껏 고조된 신비감을 떨어트린다는 계산에서야. 나도 같은 생각이고.”
“아…….”
안 한다고 해서 수철은 섭섭할 게 없지만 멤버들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
“멤버들은 디데이 뮤직과 금별기획에서 가이드를 붙여 한국 관광을 시켜 줄 생각이야. 원래 방송이 3일 일정이었으니까 그 시간에 관광도 시켜 주고, 금전적인 보상도 다 할 거야. 원하면 다혜와 너도 같이 가도 되고.”
역시 박 대표는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난 무조건 찬성!”
“나도!”
“나도!”
이 소식을 들은 멤버들은 방송 출연 취소에 대한 실망보다 여행한다는 기쁨이 앞섰다.
“한국에도 환상의 섬이 있다고 들었어. 태즈메이니아처럼.”
“제주도?”
수철과 영준이 형 다혜까지 포함한 멤버들 모두는 일정을 늘려 가면서까지 오랜만에 짜릿한 휴가를 맛봤다. 제주도뿐만이 아니라 설악산까지 다녀왔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쳐서 주머니가 든든한 상태에서 아름다운 한국을 만끽하는 여행은 꿀맛이었다.
* * *
여행을 다녀온 후 4명의 멤버는 다시 호주로 돌아갔고, 수철은 한국에 남았다. 이번 연말은 한국에서 보내고, 내년 공연에 맞춰 박 대표 영준이 형, 다혜와 함께 호주에 갈 생각이다.
수철이 한국에서 겨울을 보낸다는 소식에 모두 기뻐했지만, 할아버지 3인방은 그렇지 않았다. 겨울엔 따뜻한 호주로 갈 생각이었는데 수철이 한국에 남겠다고 해서 다른 나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됐다. 어딘지는 정확히 모른다. 뉴질랜드, 남미, 동남아를 놓고 투표한다는 얘기까지만 들었다.
“2학년?”
“네, 호호.”
하린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수철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 부장과 약속한 하린의 곡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하린은 앳된 소녀티를 벗고 어느덧 숙녀가 되어 있었다.
“너도 이번 겨울은 한국에서 보내는 거야?”“네, 선생님 쇼케이스 보려고 일찍 들어온 거예요.”
하린은 금별의 기획대로 영향력을 높여 가고 있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는 드라마 히트와 연이은 OST 히트로 일찌감치 스타로 자리매김했고, 드라마가 수출되는 중동과 남미 몇 개 나라에서도 인기몰이 중이었다. 아직 미세하지만, 유럽에서도 인지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금별에서는 야심 찬 미니시리즈를 미국 제작사와 공동으로 기획하며 미국 시장을 엿보고 있었다. 하린의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니까.
이번 수철이 만드는 곡은 미니시리즈와 동시에 미국과 한국에서 발매되는 앨범에 들어갈 곡이다.
“가사도 선생님이 쓰신 거라면서요?”
“응, 어때?”
“너무 좋아요. 무슨 책을 읽어야 이런 가사를 쓸 수 있어요? 푸른 알갱이라니요?”
수철은 이번에 하린에게 만들어 줄 곡에 ‘푸른 알갱이’라는 제목의 가사를 붙였다.
푸른 알갱이는 지구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에겐 거대하지만 우주에서는 한없이 작은 알갱이.
이 작은 알갱이에 다양한 사람들이 바글대며 살고 있다.
수철은 우주인이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사를 썼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가사는 아니다. 단지 오만하지 말고 푸르름을 유지하자는 내용이다.
“선생님이 지구 수호자 같아요. 호호.”
하린은 수철의 가사가 마치 지구를 지키자는 내용처럼 들려서 좋다고 했다. 하린은 지구 환경을 소중히 생각하는 훌륭한 고딩 겸 아시아 스타 가수다.
* * *
수철이 한국에 있는 것을 안 몇 개의 방송사에서 계속 출연 요청을 하고, 몇몇 기업에서는 굵직한 연말 이벤트에 출연 요청을 제안하며 거액을 제시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묻지도 않고 모두 거절했다.
단지 수철은 금별과 디데이 뮤직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연말 자선 콘서트에는 깜짝 출연했다. 여기서 어쿠스틱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하준과 하린의 듀엣곡을 반주하기도 했다.
이날 콘서트에는 디데이 뮤직 소속의 아티스트와 금별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아티스트가 총출동했다. 관중들은 5,000석 규모의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수철의 등장을 모르고 공연장을 찾았던 사람들은 수철이 노래를 부르자 앙코르를 외치며 환호했고, 수철은 한 곡을 더 하고서야 공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호주 공연은 2월 둘째 주부터 시작하는 거로 확정했어. 3개의 주를 대표하는 도시에서 한 번씩 하는 거로 말이야.”
퀸즐랜드주의 브리즈번(Brisbane)을 시작으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시드니, 그리고 빅토리아주의 멜버른(Melbourne)에서 각 한 차례씩 공연한다는 말이었다.
“프로그램은 아직 협의 중이니까 확정이 되면 알려 줄게. 호주 공연인 만큼 많은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
박 대표는 묘한 미소를 띠며 무슨 재밌는 일이 있는지 말을 하지는 않고 궁금증만 키웠다.
“공연은 계속될 거야.”
“……?”
“호주 공연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야. 오히려 시작이지.”“또 공연이 있어요?”“그럼 한두 개가 아니야. 내년 한 해는 아마 공연으로 꽉꽉 채우게 될 거야.”
박 대표는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깍지 낀 손을 배에 올려놓고 편안한 미소로 등을 기댄 모습이 내년 한 해가 얼마나 흥미로운 한 해가 될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