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06화 (206/239)

#206화. 브리즈번 상륙

“자, 한잔 마셔. 오늘 이 자리는 우리 송별회 겸 신년회다. 올 한 해 수고 많았고, 내년에도 잘해 보자고.”

박 대표와 이 부장은 연말 행사와 정산까지 마무리 짓고서야 한 해의 마지막을 며칠 앞두고 막걸리 잔을 부딪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둘은 한잔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게 됐다.

디데이 뮤직과 금별기획은 이번 쇼케이스로만 10억 이상을 벌어들였다. 엄청난 대박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더 거대한 규모로 공연을 해도 충분하겠다는 가능성을 봤고, 수철은 외국에서 더 파급력이 크다는 걸 계산했을 때, 몇 번의 공연으로 100억을 훌쩍 넘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건 어디까지나 공연에 한한 얘기다. 음원과 저작권 수익까지 합하면 계산하기도 벅차진다. 간단히 따져도 수철의 컨텐츠로 일 년에 움직이는 돈이 몇백억은 쉽게 넘어간다는 얘기다.

“캬, 술맛 좋다.”

박 대표와 이 부장은 막걸리 잔을 부딪치고 있지만 몇백만 원짜리 양주를 마시는 것보다 더 술맛이 좋았다.

“다음 한국에서의 공연은 상암경기장에서 하면 될 거 같아요. 거기가 60,000석 이상은 나오니까요.”“하하, 이제 한 번 했는데 벌써 상암으로 가자고?”“상암이 아니라 잠실 주 경기장에서 해도 될 거 같아요. 답 나왔는데 굳이 작은 데서 할 필요는 없죠.”“하하, 그래. 맞는 말이야. 너무 빨라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 부장은 유럽에서의 공연은 최소 10만 석 이상의 공연도 가능할 거로 추측했다.

“방송사의 출연 요청은 다 거절하신 거죠?”“응, 그런데 불만이 좀 많아.”

“어떤 불만이요?”

“외국에선 얼굴을 내보이면서 한국에서 피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지. 그것 때문에 방송국 가는 거 좋아했던 팀장들이 요즘은 진땀을 빼고 있어.”

박 대표는 머리 아프다고 고개를 젓는데, 이 부장은 이 상황이 재밌는지 웃음을 보였다.

“하하, 힘드시겠네요. 그 사람들이 차별을 느낄 만하죠. 그래서 어떻게 하고 계세요?”“뭘 하긴, 가만히 욕을 먹고 있지.”

“욕이요?”

“그렇잖아? 수철이 한국에 있는 거 뻔히 아는데 해외 공연 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곡 작업 중이라는 말도 안 먹히고. 그러니까 회사 방침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잖아?”“하하, 그렇겠네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이 부장은 들이킨 막걸리 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박 대표는 이 부장의 말에 손을 저었다.

“아냐, 너희는 나서지 않는 게 좋아. 괜히 잘못하면 공분만 사게 돼.”“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어차피 내가 방송사랑 친한 컨셉은 아니잖아? 하하.”

“그렇네요. 하하.”

박 대표가 웃을 수 있는 건 그래도 회사가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웃을 여유가 없다.

사실 이 부장도 박 대표와 비슷한 상황이다. 얘기는 안 하지만 금별에도 여러 채널로 수철의 섭외에 대한 도움 요청이 오고 있다. 이번 쇼케이스도 그렇지만 그동안 수철의 행보를 보더라도 금별기획과 수철의 관계가 끈끈하다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난처하긴 이 부장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수철의 소속사 대표인 박 대표만큼은 아니니까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뭐, 어쨌든 형님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고, 처음 계획대로 앨범과 공연에 무게 중심을 두고 가는 거는 변함없죠. 그게 흔들릴 이유는 없잖아요?”“전혀 없지. 수철도 그걸 원하고.”

박 대표는 고등어 살점 한 덩어리를 간장에 찍어서 집어넣으며 강하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수철을 놓고 그림을 작게 그릴 이유가 없죠. 사실 우리 팀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우리나라 방송사에는 BBC처럼 토크쇼가 없잖아요. 먼저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초대를 하면 모를까, 맨날 불러서 사생활이나 털고 개인기나 요구하면서 아티스트 퀄리티를 떨어트리는데 나갈 이유가 없죠.”

이 부장은 잦은 출연 요청이 기분이 나쁜지 불만을 드러냈다. 박 대표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다.

“음악 듣고 싶으면 앨범 사고, 얼굴 보고 싶으면 공연 보러 와라. 이게 정답인 거 같아요.”“하하! 맞아, 그게 정답이지.”

박 대표는 이 부장의 단호한 결론에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뮤지션이 어떤 행보를 걸을지는 팬들과 뮤지션이 결정하는 거고, 사실 방송사는 중간 유통상이지. 물론 지금은 중간 유통상이 힘을 다 갖고 있지만 말이야. 하하.”“방송사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렇게 들으니까 왠지 좀 씁쓸하네요.”

디데이 뮤직과 금별기획은 앨범과 음원 수익 그리고 공연만으로도 몇 명의 방송 스타를 능가할 수 있다는 계산이 일찌감치 나왔다. 그래서 자신 있게 플랜대로 밀어붙일 수 있는 거다.

“원래 뮤지션은 음악과 공연이 우선이죠. 우리나라에선 특이하게 방송 의존도가 높아서 색채를 잃어 가는 뮤지션들이 많지만, 그래도 수철이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있으니까 회사를 떠나 개인적인 입장으로 수철을 봐도 후련하다는 기분이 들어요.”“하하,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예전부터 수철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들었어. 안 될 거 같은데도 다 뚫고 나가니까 엄청난 대리 만족을 느끼지.”“네, 속이 시원하죠. 하하.”

금별기획은 애초부터 국내용 스타에게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단타를 치지 않고 장타를 치겠다는 생각이기에.

수철의 무대는 세계다. 음원 수익과 저작권료를 합하면 적어도 국내 스타의 수십 배는 된다. 국내 방송사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방송에 자꾸 나오면 공연 보러 안 오잖아요.”

방송에 얼굴을 내밀수록 공연장을 찾는 관객 수는 줄어든다. 가수는 희소성이 있어야 한다. 배터리와 마찬가지다. 쓸수록 닳는다. 행사를 뛰지 않을 거면 굳이 방송을 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은 이미 나왔다.

“행사 가수는 스타가 되지 못하지.”“그렇죠. 월드 스타는 절대 될 수 없죠.”

결국, 음악의 심연을 두드리는 뮤지션만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뒤흔든 엄청난 뮤지션들도 하나같이 음악으로만 그 영향력을 이뤄 냈다.

둘은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

“앞으로도 우린 계속 박리다매가 아니라 한정 판매로 가는 겁니다. 브랜드 가치가 높은데 싸게 갈 이유가 없죠.”

박 대표가 술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또 사람한테 브랜드라는 말을 쓴다. 너, 그러다 나중에 밖에서 말실수한다?”“하하, 죄송해요. 입에 붙어서.”

“하하, 녀석.”

오늘은 무슨 말을 해도 훈훈하다.

* * *

브리즈번은 덥다 못해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질감을 느꼈다. 매서운 한파에 잔뜩 몸을 움츠리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던 몇 시간 전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구는 공전하는 게 확실하군. 역시 신비로운 지구야.”

박 대표는 하늘을 향해 입맞춤을 날렸다.

“난 역시 추위보다는 더위 체질이야.”

박 대표는 공항을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이렇게 떠벌리듯이 얘기했다. 이때까지는 그랬다. 이때까지는.

“휴, 덥다. 옷부터 갈아입자.”

호텔에 도착한 박 대표, 영준이 형, 수철, 다혜, 레베카는 우선 옷부터 갈아입었다. 덜덜 떨면서 공항에 갔었는데 이젠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다.

박 대표는 반바지에 꽃무늬 남방, 남방 사이에 선글라스까지 걸치고 나타났다. 신발도 어느새 샌들로 바뀌어 있었다.

“쌤, 아저씨 같아요.”

이 모습을 본 다혜는 인상을 구기며 핀잔을 줬다.

“나, 갔다 올게.”

박 대표는 다혜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까지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짐을 풀고 호텔 카페로 내려온 사람들은 모두 편한 복장으로 앉아서 시원한 과일 주스를 들이켰다. 호주는 과일의 당도가 높아서 달콤함과 시원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얼마 후, 호텔로 찾아온 공연 에이전시 관계자들을 만나고 온 박 대표와 레베카가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난 망고 주스 시킬게.”

“저도요.”

주문한 박 대표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이것 봐 봐.”

음악 잡지와 로컬 신문이었다.

잡지 표지와 로컬 신문의 1면에는 수철과 멤버들이 공연하는 모습이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그리고 앨범 ‘SUNSET’에 참여했던 보컬들의 모습도 실려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한 면을 다 할애해서 이번 공연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지금 호주는 떠들썩해. 멤버들의 이력이 화려하니까 슈퍼 팀의 탄생이라며 헤드라인을 걸고 계속 홍보하고 있어. 방송에도 계속 광고 중이고.”

브리즈번의 유력일간지에서는 슈퍼 팀의 구성원만으로도 공연은 볼 가치가 보장되어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최고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팀이 등장했다는 기사와 함께 그동안 수철이 무슨 곡을 썼고 그 곡들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거뒀는지를 소개했다. 거기에다 어느덧 호주의 국민가수가 되어 가는 제시와의 두터운 친분에 관해서도 소개했다.

대대적인 평론가들의 극찬이 이어졌고, 천재성을 가진 작곡가가 이제 가수로 변신했다는 헤드라인이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수철은 이슈의 중심에 서 있었다.

“케이블 방송에도 이번 공연 실황을 내보내기로 계약을 했대. 그래서 에이전시가 입이 벌어져 있더라고. 덕분에 우리도 수익을 더 챙기게 됐지. 당연히 출연자들 개런티(Guarantee)도 높아지게 됐고.”

그 말에 영준이 형과 다혜의 입에서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티켓 판매율은 어때요?”

영준이 형이 테이블에 몸을 붙이며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을 물었다.

“벌써 매진됐지.”

박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머리를 한번 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인구 300만이 안 되는 도시에서 52,000석이 삼 일 만에 매진이 돼?”

박 대표는 믿기지 않는다며 사람들에게 되물었다. 모두 상기된 얼굴로 박 대표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입이 벌어지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대체 52,000석이면 공연 수익만 얼마인가?

박 대표도 기분이 좋아서 계속 말을 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진정으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호주 사람들을 본받아야 해. 이번 공연은 정말 엄청난 경험이 될 거야. 하하.”

기획사 대표다운 멘트였다. 박 대표는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호주 국민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철은 한국에서 호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박 대표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달랐다.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박 대표는 땅은 넓어도 인구는 한국의 반도 안 되는 나라에서 3번의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알면 한국 팬들이 섭섭해하겠다며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었다.

“재밌는 거 보여 줄까?”

박 대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잡지의 기사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에는 한 신문사의 기사가 찍혀 있었다.

[나태한 음악계를 혼내주러 온 어벤저스. 드디어 브리즈번 상륙!]

큰 글씨의 헤드라인과 함께 그 밑으로는 수철과 멤버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헤드라인을 보고 사진을 보니 멤버들의 포즈가 어벤저스처럼 보였다.

* * *

와―!

하하!

공연장에 들어선 사람들의 입이 모두 쩍 벌어졌다. 누군가는 놀라서 탄성을 내뱉었고 누군가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엄청난 크기였다. 체조경기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말로 들었을 때는 상상이 안 됐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어마어마한 공연장에 사람들이 가득 찰 생각을 하니까 흥분을 넘어 전율이 느껴졌다.

“이게 52,000석이구나.”

박 대표는 놀라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읊조렸다.

“대표님, 정확히 52,500석입니다. 운동장을 스탠딩으로 해서 가득 채우면 그걸 훌쩍 넘어가고요.”

레베카의 팩트 체크에 박 대표는 입을 벌린 채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굳이 레베카가 알려주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할지 눈앞에 인파가 그려졌다.

“이곳 선콥 스타디움(Suncorp Stadium)은 브리즈번의 랜드마크예요.”

레베카는 언제 준비했는지 이 공연장에 대해서도 꿰고 있었다.

“주로 축구와 럭비 경기가 이뤄지는 곳인데, 이번처럼 가끔 대형 콘서트도 벌어집니다. 이곳을 거쳐 간 뮤지션으로는 퀸, 콜드플레이…….”

레베카는 이곳에서 공연한 유명 뮤지션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곳은 세계적인 뮤지션이라면 꼭 거쳐야 할 성지처럼 느껴졌다.

헤이―!

수철―!

수철이 리허설을 위해서 무대를 향해 걸어가자, 무대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ASN’의 멤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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