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08화 (208/239)

#208화. 일 년 스케줄

“도전을 한번 해 볼까?”

“무슨 도전이요?”

“시드니까지 카라반으로 가는 거 어때? 여행하다 해가 질 땐 바닷가에 세워서 노을을 감상하면 정말 낭만적일 거 같은데 말이야.”

“오, 노.”

박 대표는 이참에 카라반까지 빌려서 끌고 가며 어릴 때 영화에서 봤던 떠돌이 뮤지션의 로망을 연출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레베카가 극구 말렸다. 수철의 컨디션을 고려해서 잠은 호텔에서 편하게 자야 한다고. 레베카는 회사 대표보다 수철을 먼저 챙겼다.

“영어 버전 말이야.”

여행 도중 어느 한적한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기사를 보던 박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수철이 쳐다보자 박 대표는 보고 있던 기사를 건넸다.

어제 공연에 대한 평이 실려 있었다.

음,

기사에는 수철을 보는 그들의 시선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작곡자 용수철에서 가수로의 용수철을 보고 있었다. 그 변화를 보여 주는 ‘선콥 스타디움’에서의 첫 번째 무대는 성공적이었다고 평하며, 사람들은 이제 어제의 작곡자를 잊고 내일의 가수를 기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보컬로서 수철이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보여 줄지, 음악에 또 어떤 색채를 담게 될지 기대된다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 아쉬운 점도 드러냈다. 이번 앨범이 한국어 버전만 있다는 것이었다.

이걸 알고 있는 수철은 이번 공연에서 가사 곳곳을 영어로 바꿔서 불렀다. 하지만 관중의 갈증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수철도 그 부분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었는데, 평론가들은 그걸 콕 집어서 얘기하고 있었다. 다 좋은데 영어 버전이 없다는 것은 팬들의 갈증을 채워 주기에 부족함이 있다는 글로 마무리했다.

영어 버전에 관한 얘기는 앨범을 시작할 때부터 쭉 있었다. 멤버들도 얘기했었고, 박 대표도, 금별의 이 부장도, ECM의 해리까지 의견을 물어왔었다. 하지만 수철은 그럴 때마다 가사를 영어로 번역하면 느낌이 살지 않을뿐더러 몇몇 부분에서는 변질되는 느낌마저 든다고 거절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번 앨범은 수철에겐 그런 앨범이었다. 성찰과 극복과 자기 고백. 이렇게까지 흥행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만든 앨범이었다. 자기 얘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담았으니까. 흥행은 그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팬들이 원하면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다. 늦었지만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아시아 공연은 상관없지 않나요?”“아시아는 한국어로 하면 되지. 이번처럼 영어를 조금씩 섞어 주면서 말이야.”“그럼 영어 버전은 2집을 내고 하면 어떨까요?”

“2집?”

“네, 제 생각엔 1, 2집 중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을 모아서 영어 버전으로 한 장 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2집도 한국어로 내고, 1, 2집을 합쳐서 영어 버전 한 장을 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었다.

“음,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2집에 대한 구상은 있고?”“네, 투어 공연이 끝나면 구체화해 볼 생각이에요.”

박 대표는 해결책을 제시한 수철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혹시 3집 앨범도 생각하고 있니?”

수철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수철의 표정을 본 박 대표의 입에서 불규칙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허허. 허. 허허허.”

이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레베카가 끼어들었다.

“열성 팬들은 의미를 파악하려고 번역까지 해 가면서 듣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굳이 왜?”

“……굳이 라니요?”

“회사 홈페이지와 음원 유통사에 번역된 가사를 노출하고 있잖아? 그걸 보면 되는 데, 왜 굳이 번역을 해? 힘들게?”

디데이 뮤직에서는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일찌감치 영어 가사를 여러 곳에 노출하고 있었다.

“번역된 가사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

“네,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부지런하지는 않거든요. 플랫폼의 홍보도 부족하고요.”

그 말에 박 대표의 얼굴에 불만이 드리워졌다. 항상 다른 언어로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겪는 문제다. 앨범 발매 전에 세심하게 준비해도 속 시원하게 해소된 적이 별로 없다.

박 대표의 불만을 아는 레베카가 서둘러 박 대표를 위로했다.

“그래도 여기 호주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한국어를 접하는 데 큰 두려움이 없다고 들었어요.”

수철의 열성 팬들은 그렇게 공을 들인 만큼 가사가 주는 의미도 증폭된다고 했다. 벌써 자신만의 Radiate가 뭐고, 자신만의 끼가 뭔지 이야기한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는 수철의 열성 팬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좋은 가사를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공유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나은 접근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와―!

70,000석의 ‘ANZ Stadium’에서 벌어진 시드니 공연은 폭발적이었다. 관객의 호응과 열기도 대단했지만, 호주를 대표하는 도시답게 공연 내용도 화려했다. 마치 브리즈번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모든 게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팔찌뿐만이 아니라 야광 봉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고, 공연장을 울리는 사운드 시스템은 드럼의 어택(Attack)에 잔뜩 힘을 실어서 사람들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공연 내내 잠시도 숨을 돌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멤버들과 관계자들은 스타디움의 크기와 관객 수에 또 한 번 놀랐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연장의 규모와 인파는 무대에 서는 사람들의 피를 다시 한번 끓게 했다.

시드니 공연은 시작 전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다. 브리즈번에서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시드니로 향하면서 티켓은 일찌감치 동이 났고, 브리즈번의 흥행 소식이 입소문을 타자 뒤늦게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까지 합류해서 공연장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리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제시의 깜짝 공연.

박 대표는 공연을 기획할 때부터, 가수로서 첫 공연인 만큼 제시와 같이 노래 한 곡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박 대표의 의중을 아는 수철은 제시에게 그 생각을 전했고, 제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연히 해야지! 네가 말을 안 했으면 섭섭할 뻔했어.”

제시의 깜짝 출연 소식은 공연 에이전시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이들도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선뜻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시와 팀을 공연에 출연시키려면 금전적인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은 세계적인 밴드가 돼 버려서.

공연의 흥행을 고민하던 차에 디데이 뮤직에서 먼저 제시의 출연 소식을 알려 오자 이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땡큐! 땡큐!

고맙다는 말을 멈출 줄 몰랐다.

제시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디데이 뮤직과 공연 에이전시의 가려운 부분을 박박 긁어 줬다.

그녀는 계획보다 일찍 도착해서, 방송에 출연하며 공연에 깜짝 등장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수철의 공연 소식을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수철이 가수로서 첫 무대를 서는 만큼 제시가 가만히 있지 않는 건 당연했다.

제시의 이런 행보는 곧바로 공연의 흥행과 열기로 이어졌다. 공연의 열기를 비교하는 건 팬들에게 실례지만 관계자들은 시드니 ‘ANZ Stadium’의 열기는 지금까지 기획한 어떤 공연보다도 뜨겁다고 입을 모았다.

와―!

제시! 제시!

제시의 등장으로 팬들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시의 이름을 환호하며 그녀가 국민 가수라는 것을 보여 줬다.

제시는 총 세 곡을 했다. 앨범 ‘ABYSS’와 ‘INTERSECTION’에 실린 곡 중에서 호주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곡으로.

그중에서 두 곡은 ‘ASN’이 세션을 했고, 한 곡은 수철이 어쿠스틱 기타로 반주를 했다. 수철은 이 곡을 제시와 같이 듀엣으로 노래했다.

그 곡은 ‘Film music without film’이었다.

―귀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우린 들으려 애쓸 필요가 없겠지요.

―눈이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우린 보지 않아도 돼요.

―자, 이제 상상해 봐요. (상상해 봐요―)

둘의 하모니가 시드니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함성을 지르며 열광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두 손을 모아서 가슴에 대고 있었다.

―Film music without film

제시와 함께한 무대가 끝나고 수철은 다시 열기를 끌어 올리며 공연의 스피드를 높여 갔다. 터지는 불꽃과 휘몰아치는 조명 아래서 멤버들은 펑키와 그루브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 줬다. 관중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Another Secret November’라는 거대한 조형물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이번 공연은 브리즈번과 다르게 관중들은 앙코르를 두 번이나 외쳤고, 공연이 끝났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드니의 뜨거웠던 여름밤 공연은 엄청난 열기를 폭발시키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오늘 공연이 어땠는지 한 말씀 해 주시겠어요?

공연장 앞에서 공연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인터뷰하던 기자는 많은 인파가 빠지고 뒤늦게 나오는 소녀들 무리에 마이크를 내밀었다.

“공연이 어땠냐고요?”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얼굴 앞에 마이크가 나타나자, 소녀는 얼이 빠진 모습으로 되물었다.

“네, 오늘 공연을 보지 못한 시청자분들께 한마디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나다니요……?”“둘이 있는 것 같았어요.”

“……?”

기자는 중얼거리며 회상하듯 말하는 소녀를 보며 갸웃했다.

“아무것도 없이 그와 나, 둘만이 넓은 공간에 서 있는 거 같았어요. 무대도 사라지고, 관객도 사라지고…….”“흠, 공연에 빠지셨다는 얘기군요?”“모르겠어요. 세상에 둘이 있는 거 같았어요. 전 그랬어요.”

소녀는 그 말 한마디를 하고는 사라져갔다. 기자는 사라지는 소녀와 카메라를 번갈아 봤다.

이날 공연이 어땠는지는 소녀의 이 인터뷰가 다 말해 줬다.

공연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지나친 수식어는 잡음이 될 뿐이었다.

* * *

박 대표는 아침부터 노트북을 켜고 한국과 통화하며 뭔가 바쁘게 체크했다. 호텔의 계단을 부산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레베카를 호출해 뭔가 상의를 하더니 출발은 하지 않고 수철과 다혜를 1층 카페로 불러 모았다. 멜버른까지는 꽤 먼 거리라서 서둘러야 한다고 얘기했던 수철은 의아한 얼굴로 캐리어를 내려놓은 채 자리에 마주 앉았다.

“이러다 일 년 스케줄이 한 방에 다 잡히겠어.”

박 대표는 눈이 커진 채 불러 모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수철과 다혜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공연 스케줄이 계속 잡히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공연에 이어서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공연까지. 7월까지는 아시아 공연이 꽉꽉 들어차게 됐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 공연들이 아니었다.

“스테파노의 회사에서 제안이 왔다고요?”“그래, 그렇다니까.”

박 대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어떻게 알고요?”

“쇼케이스 영상을 보고 싶다고 해서 편집한 것을 보냈었는데, 이틀 만에 회사로 연락이 왔어. 그래서 아까 오전에 내가 직접 통화했고.”

아침부터 박 대표가 부산을 떨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테파노는 밀라노에서 하기를 바라고 있어.”“클래식과 국악과 ‘ASN’이 같이 무대에 서자는 거죠?”“그래, 그게 기획 의도지.”

박 대표는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난 스테파노의 회사에서 이 제안을 해 왔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 너무 고마웠어. 사실 이런 프로젝트는 우리가 먼저 제안하고 싶은 거거든. 이슈가 되는 건 당연하고, 참여하는 모든 뮤지션의 격을 높이는 공연이니까 말이야.”

“…….”

“난 네가 만든 한 곡의 음악으로 이렇게 인연이 이어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야. 그것도 거장 마에스트로 스테파노와 말이야. 하하.”

박 대표는 혀를 내두르다가 크게 웃었다.

수철은 박 대표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대꾸는 하지 않았다. 수철은 스테파노가 너무 이 음악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도전할 부분이 많고, 자신이 그 느낌을 깊이 공감한다고 해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집착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스테파노가 고집스럽게 느껴졌고, 왠지 계속 인연을 이어 가기 위해 손을 내민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철은 클래식 음악가의 집착을 경험한 적이 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수철 앞에 박 대표가 고개를 내밀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잖아?”“네, 그렇죠. 멤버들도 좋아할 게 분명하고요.”

그 말에 박 대표가 무릎을 딱 쳤다.

“이러면 되겠다.”

“……?”

“9월에 하기로 한 영국 공연이랑 묶는 거야.”

“어떻게요?”

“유럽 투어를 만드는 거지! 영국하고 프랑스하고 벨기에하고. 그렇게 9, 10월은 유럽 투어를 하고, 이탈리아 공연은 11월에 스테파노의 기획 공연으로 하면 되잖아. 그러면 자연스레 홍보도 할 수 있고, 더 큰 흥행도 기대할 수 있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지난 몇 장의 앨범과 칸 영화제 수상으로 유럽에서 컨택이 자주 왔었으니까.

“괜찮네요.”

“그래, 게다가 이미 공연을 본 사람들이 색다른 공연을 보기 위해서 다시 공연장을 찾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잖아. 완전 일석이조지.”

박 대표는 계산이 빨랐다. 흥행을 쫓는 기획사 대표의 냄새가 폴폴 났다.

“어때? 이러면 한 해 스케줄이 꽉 차잖아?”

“그렇네요.”

“멤버들도 유럽 투어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유럽 공연은 언제든지 환영이죠. 멤버들은 미국 공연보다 유럽 공연을 더 좋아해요.”“그렇지, 재미는 유럽 공연이 더 좋지.”

박 대표는 유럽 공연의 재미를 잘 알고 있었다. 광활한 미국과 달리 나라도, 인종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쭉 연결돼 있어서 재미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이제 슬슬 출발해 볼까?”

시간을 확인한 박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멜버른으로 가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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