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09화 (209/239)

#209화. 침묵

제시는 바쁜 일정으로 시드니 공연만 마치고 다시 돌아갔다. 제시가 떠날 때 모두 아쉬워했다. 그중에서 제일 아쉬워한 사람은 바로 떠나는 제시였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유럽 투어 공연 때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35,000석 규모의 ‘AAMI PARK’에서 열린 멜버른 공연은 지금까지의 공연과는 다르게 여유로웠다.

관중들이 공연을 즐기는 모습도 진화했지만, 팀 ‘ASN’도 지난 두 번의 공연으로 완벽히 호주 공연에 적응했다. 다른 멤버들은 호주에서의 공연 경험이 많아서 문제가 없었지만, 수철과 영준이 형, 다혜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모든 적응을 마친 마지막 멜버른 공연에서는 그야말로 관중을 들었다 놨다 했다.

마지막 공연인 만큼 에너지를 남겨 놓을 이유가 없었다. 모두 불태웠다.

―그래, 이거지!

―이 맛에 공연 보는 거지!

관중뿐만이 아니라 스탭을 포함한 관계자들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 * *

멜버른에서의 마지막 공연 후 벌어진 쫑파티는 그 자체로 큰 파티가 되었다. 출연진 전부가 모였기 때문이다. 6명의 보컬과 그들의 팀, 그리고 ‘ASN’ 멤버들까지 합하면 30명이 넘었다. 3주간 호주의 무대를 빛낸 이들은 그동안에 쌓인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 엄청난 양의 술을 소비했다.

“저러다 나중에 다 쓰러지는 거 아니에요?”“하하, 그러게. 물 마시듯이 마시네.”

박 대표와 다혜의 눈이 동그래질 정도였다.

“익히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정말 엄청납니다. 미국과 유럽보다 호주 사람들의 주량이 훨씬 월등하네요.”

레베카도 혀를 내둘렀다.

쫑파티 장소는 공연 에이전시에서 제공했지만, 술값은 디데이 뮤직에서 부담했다. 하지만 술집에 있는 술을 다 마신다고 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멜버른에 있는 술집을 모조리 돌아다니며 몇 박 며칠을 퍼마신다고 해도 지금의 박 대표에게는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까.

시끌벅적한 쫑파티 내내 박 대표의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수철, 나랑도 한 장 찍자.”

파티에서도 수철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공연을 함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철에게 감사하며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모두 저마다 이번 3주간의 공연을 통해 수철과 만든 추억을 공유했다.

“자, 이제 몸 좀 풀어 볼까?”

이들은 파티장에서도 천상 뮤지션들이었다. 알코올이 들어가자 하나둘 클럽에 있는 작은 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치지도 않나?

공연이 끝나고 그렇게 지친 모습이 역력했는데 또다시 악기를 잡다니.

수철의 노랫말대로 몸 안의 끼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원 투 쓰리 포!

이들은 클럽에 세팅된 악기를 돌아가며 연주했다. 서로의 노래도 바꿔서 불렀다. 맥스는 거친 목소리로 미아의 ‘레인’을 열창하며 사람들에게 곡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선사했다. 다른 보컬들도 저마다의 악기를 잡으며 연주력을 뽐냈고, 서로 곡을 바꿔 가며 노래했다. 작은 클럽이어서 그런지 공연장만큼이나 쫑파티 분위기는 후끈거렸다.

“수철, 컴온!”

수철도 빠질 수가 없었다. 맥주를 들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수철은 사람들의 손짓에 무대로 올라갔다. 피아노 앞에 앉아 천천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느린 템포의 블루스.

수철이 연주를 시작하자, 이언이 6현 베이스를 집어 들더니 수철의 연주를 따라붙었다. 곧이어 존이 드럼 앞에 앉았다. 공연에서 한 번도 뽐내지 못했던 드럼 실력을 파티에서 마음껏 발휘했다. 루카스는 퍼커션을 두드렸고, 마커스는 탬버린을 잡았다. 영준이 형의 손엔 어느새 플루트가 들려 있었고, 다혜는 보기 드물게 기타를 잡았다. 멜버른 야라 강변의 작은 클럽에서 밴드 ‘ASN’의 2차전이 벌어졌다.

HERE WE GO!

자기 악기가 아니라고 대충 하지는 않았다. 수철이 본격적으로 즉흥연주를 시작했다. 팀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난처하게라도 할 작정인지, 격렬하게 블루스 특유의 트립플 리듬을 마구 두들겼다.

덕분에 풀린 눈으로 장난스레 연주하던 멤버들이 눈빛을 가다듬었다. 이언도 가만있지 않았다. 수철의 즉흥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베이스를 기타 치듯이 쳤다. 베이스의 높은음을 빠르게 튕기며 속주 베이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외가 없었다.

두두 두두둥! 두두 두두둥!

존은 미친 듯이 탐탐(TOM TOM)을 두드렸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서 드럼을 찢을 기세로 두드리며 북 위로 스틱이 날아다녔다. 영준이 형의 플루트는 악기만이 주는 서정적인 톤으로 멜로디를 만들어 내며 사람들의 귀를 집중시켰다. 마커스는 다혜의 기타 옆에 붙어서 같이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만들었다. 마커스가 흔드는 탬버린은 다른 사람들의 탬버린과 달랐다. 찰랑찰랑 움직임 속에 그루브가 잔뜩 실려 있었다.

―자, 다음 사람 올라오세요.

그 후로도 연주는 주거니 받거니 계속 이어졌다. 보컬 팀과 ‘ASN’이 뒤섞여 같이 연주하기도 했고, 보컬들만이 무대에 올라서 화음을 만들어내며 아카펠라를 하기도 했다.

“대단해, 대단해.”

박 대표와 레베카를 비롯한 관계자들에겐 오히려 공연보다 쫑파티가 더 볼거리가 많았다.

“기타 실력도 한번 보여 줘야지?”

수철은 사람들의 요청에 계속 악기를 잡았다. 술이 들어가서 이성을 잃었는지 사람들은 수철을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덕분에 수철은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기타에 드럼에 베이스까지 연주했다.

“하하, 수철, 너 참…….”

파티에서조차 사람들은 수철의 끼에 매료되었다. 피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 무대에 올라오더니, 악기만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갖가지 리듬을 만들며 사람들을 자극했다.

수철은 공연장에서도 쫑파티에서도 뮤지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수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수철의 이모션(Emotion)에 달아올랐다.

파티는 늦은 새벽까지 계속됐다. 모두가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이 즐겼다. 공연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여명이 밝아 오고 나서야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고 이별을 했다.

공연과 파티로 피로가 누적된 사람들은 호텔로 들어가자마자 모두 곯아떨어졌다.

* * *

“하하.”

이번 호주 투어 공연의 총 매출은 200억이 넘었다. 순수익만 150억에 달했다. 디데이 뮤직은 이 중에서 40%인 60억을 챙기게 됐다. 공연 실황 중계와 제시의 깜짝 등장으로 처음 예상했던 금액보다 많이 늘어났다. 그래서 박 대표는 다혜를 포함한 멤버들 전원에게 1억씩의 출연료를 줄 수 있게 됐다. 단 3번 공연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물론 수철은 멤버들보다 받는 액수가 많다. 10배를 받는다.

박 대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레베카를 모함한 디데이 뮤직 직원 모두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줄 생각이다. 그리고 호주에서 수고한 레베카에게는 특별 휴가까지 줄 생각이다.

“인생 살맛 나네. 하하.”

박 대표는 혼자서 호주 들판을 보며 크게 웃었다.

공연의 흥행과 호주 여행까지, 박 대표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다.

* * *

“정말 감사합니다.”

멜버른 공연의 스탭으로 참여했던 음악학교 학생은 염원하던 수철과의 대화를 잠시나마 할 수 있었다.

소녀는 새내기답게 평소 수철에게 묻고 싶었던 풋풋한 질문을 던졌고, 수철은 거기에 망설임 없이 답해 줬다. 그리고 소녀는 수철의 허락하에 대화한 소감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

[다음은 작곡가 1학년생인 스테파니와 용수철 음악가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꿈의 소리.

내가 만난 용수철 음악가는 숨소리부터 달랐다.

나는 이번 공연에 스탭으로 참여하면서 그의 등 뒤에서 뿜어지는 아우라를 수차례 경험했다. 그래서 이번 대화에서 조심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내 감정을 참고하고 읽길 바란다.

“최고의 소리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것이 내가 던진 첫 질문이었다. 난처할 수도 있는 이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침묵이라고 답했다.

그는 모든 소리는 침묵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침묵은 들을 준비가 됐다는 신호예요. 침묵은 소리가 시작될 준비가 됐다는 신호이기도 하고요. 침묵을 거쳐야 비로소 새로운 소리가 시작되니까요.”

그의 답을 들으며 나는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머릿속에서 그의 말을 정리해야 했으니까.

“침묵을 거쳐야 새로운 소리가 시작된다는 말을 좀 더 쉽게 말씀해 줄 수 있나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바쁘게 요동치는 내 눈동자를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봤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자신만의 소리가 있죠?”

“네.”

“동물들도 자신만의 특유한 소리를 내죠?”

“네.”

“그렇다면 사람의 소리는 뭘까요? 대화할 때 나는 목소리? 아니면 웃음? 울음?”

“…….”

그의 눈을 바라보는 나는 점점 더 미로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뭔가 선명해지다가도 그가 질문을 통해 나에게 주려는 깨달음을 난 빨리 낚아채지 못했다.

그는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주어진 공통적인 소리는 뭘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모든 소리에는 주인공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소리를 내는 이유를 가진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했다.

그의 말뜻을 해석해 보면 소리를 이해하면 세상이 이해된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주인공을 알 수 있고, 그 주인공의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면 이유를 알 수 있고, 그걸 해소하면 평화로워진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침묵을 거쳐서 비롯된다고 했다.

“침묵을 거쳐야 비로소 탄탄한 소리가 탄생해요. 침묵은 소리를 숙성하는 과정이니까요.”

난 이 부분에서 눈을 크게 떴다. 깨달음이 왔다.

그는 계속 말을 이으며 내 머릿속을 구체화시켰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악기도 마찬가지예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 넘어가면 서로 하모니를 만들면서 소통해야 되잖아요? 악기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철학과 사고를 대신 말해 주는 하나의 출구일 뿐이에요. 우리가 그것을 악기라는 것으로 둔갑시킨 것이죠.”

그동안 세상을 뒤흔들었던 음악가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악기와 목소리로 자신들의 철학과 사고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피며 그들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 아직도 살아 있다.

용수철 음악가는 말로는 못해도 악기로는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말도 했다. 음악의 장르가 왜 여러 개이고, 왜 아직도 계속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고 서로 뒤섞이는지.

그건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서,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거 알아요?”

“……어떤 거요?”

“사물에도 소리가 있어요.”

“네?”

그는 사물에도 소리가 있다고 했다. 그 소리는 위치에 따라서 변한다고 했다.

난 그의 은유적인 표현에 그가 유머까지 겸비한 재밌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하면서 난 점점 진짜 그가 사물의 소리를 듣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정도로 그는 경이로운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만나 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왠지 그는 소리를 통해 음악의 갈등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갈등도 다 풀 거 같았다.

그게 내가 그와 대화를 마치며 받은 마지막 인상이었다.

“침묵하면 소리가 들리고,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의 이유를 알 수 있죠. 그러면 그 소리와 어울리는 하모니를 만들 수 있고요.”

그의 말대로 침묵하고 소리에 귀 기울이면 하모니를 만들 수 있고, 그러면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평화가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의 평화.

과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소리, 꿈의 소리는 뭘까? 내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했다.

오늘 내가 얻은 해답은 바로 침묵이었다.

“소리가 시작되기 전, 침묵에서부터 전율이 시작되죠.”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그와 대화하고 대기실을 나와서 오랜만에 학교 앞 공원을 거닐었다. 걷는 내내 침묵에 대해서 생각했다. 용수철 아티스트가 말한 바로 그 침묵에 대해서.]

3주간에 걸친 무더웠던 호주에서의 공연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 소녀의 풋풋한 글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Thank you! Australia. Bye!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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