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11화 (211/239)

#211화. 당신을 향해 흔드는 손짓

수철은 곧바로 분위기를 바꿨다.

“공연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같이 놀아요.”

환한 미소로 멘트를 던지고 손으로 통기타 줄을 긁어 내렸다.

―그녀는 공주였어요. 우리는 그녀를 그리워해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워요. 우린 그녀를 기다려요.

수철이 노래를 시작하자 루카스는 수철의 노래에 맞춰 가볍게 드럼을 두드렸고, 수철의 등 뒤에 앉은 코러스들은 화음을 넣기 시작했다.

―우― 아― 우― 아―

퍼커션을 두드리는 존의 손엔 그 어떤 공연보다 힘이 들어갔다. 어쿠스틱 공연에서는 존의 역할이 크다. 리듬의 맛을 끌어 올려야 한다.

마커스는 리듬에 맞춰 얼굴을 흔들며 콘트라베이스 줄을 튕겼고, 다혜는 피아노로 화성을 풍부하게 했다. 그리고 영준이 형은 플루트에 호흡을 불어넣었다.

공연을 지켜보던 스탭들은 놀랐다.

“창고에서 이런 사운드가 나오다니?”“그러게, 지금까지 어떤 공연보다도 분위기가 좋은걸?”

대규모의 야외 공연보다 더 운치 있고 멋있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이 공연을 열기 위해 어마한 스토리가 있었다는 것이 사람들의 감정을 뜨겁게 했다.

3천 명이면 정말 많은 관중이지만 그간 진행했던 공연에 비하면 아담한 편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공연인 만큼 수철과 팬들은 공연 내내 서로 교감했다. 눈빛을 교환하며 같이 노래를 부르고, 곡을 느린 템포로 바꿔서 격렬한 춤 대신 손을 흔들며 율동을 했다. 수철은 그간 공연을 하며 겪었던 에피소드도 털어놓고,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며 분위기를 끌어갔다.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이 감동하고.

지켜보는 스탭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공연이 만들어져 갔다.

수철은 공연 분위기를 위해 팬들과 자주 대화하고 질문에 답을 하는 시간을 갖다가 즉흥적으로 이벤트를 제안했다.

“게임 한번 할까요?”

게임?

수철의 급작스런 제안으로 노래 따라부르기 대회가 열렸다. 잘 부르는 게 아니라 모창에 중점을 뒀다. 심사는 관중들의 박수 소리로 평가했다. 승패와 상관없이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사인 시디와 에이전시에서 기획하는 다음 공연의 초대권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리고 수철은 한발 더 나아가 순위권에 든 사람에게는 아직 시작도 안 한 다음 앨범이 나오면 사인과 함께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우승자에겐 한국 공연에 초대하겠다는 말도 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수철이 다 부담하고.

나중에 한 소녀는 자지러질 뻔했다. 소녀는 ‘The 끼’를 모창했다. 노래하는 수철의 동작까지 흡사하게 흉내 내며 가장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소녀는 다음 한국 공연에 초대될 것이다.

적극적인 수철의 교감으로 인해 창고에 모인 팬들은 오늘 쏟아진 폭우가 행운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덕분에 공연은 원래 계획했던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뜨거웠다는 말보다는 훈훈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공연이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선물 받아 가세요.”

레베카는 공연히 끝나고 창고를 빠져나가는 관중들 앞에서 인사하며 ‘ASN’ 이름이 새겨진 기념 티셔츠와 모자를 무료로 나눠줬다.

마음 같아서는 줄 수 있는 건 다 주고 싶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곳에 모여든 팬들이 레베카는 너무 고마웠다.

* * *

인터넷은 들끓었다. 공연에 왔던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떠드는 것 같았다. 사진을 개시하며 공연 소감을 전했고 수많은 댓글이 빠르게 달렸다. 흡사 수백 명이 한 번에 채팅하는 분위기였다.

[폭우로 취소 위기에 다다른 ‘ASN’의 공연, 비를 맞으며 불안한 얼굴로 공연을 기다리는 팬들,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수철.]

비에 젖은 포스터 사진과 공연장 앞에 서 있는 팬들의 사진, 그리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수철의 사진이 합성되어 게시판에 올라왔다. 이 사진 한 장이 어제의 에피소드를 다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소식은 한국에까지 퍼졌다. 공연 사진과 에피소드를 전하며 수철을 따뜻하고 아름다운 뮤지션이라고 했다.

금별도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시아 투어에 대한 총평을 쓰며 필리핀에서의 에피소드에 힘을 실었다. 노출되지 않은 사진들을 모아서 훈훈한 소식과 함께 보도 자료를 내보냈다.

[4월 도쿄돔에서 힘차게 팔을 올려 세우며 역대급 관중을 열광케 한 수철과 ‘ASN’은 베이징 공연에서는 관중의 감정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눈물바다를 만들었고, 태국에서는 특유의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 * *

7개국 9개 도시에서 열리는 유럽 투어 공연은 수철이 영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티켓이 동이 나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몇 배 값을 주고도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의 흥정으로 떠들썩했다.

―HERE WE GO!

수철이 웸블리 스타디움(Wembley Stadium)에 섰을 때 영국은 어느덧 9월, 쌀쌀한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쌀쌀한 날씨는 열기를 조금도 식혀 주지 못했다. 오히려 뜨거움을 부채질하는 부채에 불과했다.

“ARE YOU READY―!”

―YE―!

‘ASN’은 영국 공연을 시작으로 유럽 투어를 이어갔다.

유럽은 수철의 음악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그 정도로 수철은 유럽에서 탄탄한 명성을 쌓고 있다.

―와―!

공연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프로그램에 없던 제시와 사라까지 번갈아 가며 깜짝 등장해서 열기를 폭발시켰다.

7개국 9개 도시의 유력 일간지는 공연이 끝날 때마다 수철이 그동안 이룬 성과를 끄집어내며 공연에 관한 기사를 연신 쏟아 냈다.

두 달간의 투어가 끝나고 나서야 디데이 뮤직은 기사를 추렸다.

폭발적이었느니, 가수로의 데뷔가 성공적이었느니 하는 기사는 다 빼고 눈에 띄는 신선한 기사들만 추렸다.

1.

[그들은 조용했다. 마치 넋이 나간 듯이.

공연이 어땠냐는 질문에 모두 고개를 저으며 말을 하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과 뒤섞여 공연장을 빠져나오던 나는 기자의 물음에 고개만 저었다.

머릿속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으려 애썼지만, 금세 손바닥을 내밀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날 공연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곡 ‘Sleepless In Island’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 노랫말처럼 우리는 환성의 섬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사라지고 없는 환상의 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헤매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난 합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나와 같이 공연을 본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용수철의 공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말이 없었다.

모두 그랬다. 그게 용수철의 공연이었다.

영국, The Guardian]

2.

[오랜만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수철은 끼를 토했고, 우리는 피가 끓었다.

내 인생 최고의 공연들이 순간, 한물간 공연으로 퇴락하는 느낌이었다.

네덜란드, De Volkskrant]

3.

[관객들에게 인생 최고의 공연을 선사하려면 음악가들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려야 한다.

사람들의 허를 찔러야 한다는 말이다.

반전의 반전은 기본이다.

우리의 뇌는 그런 공연을 만나야 인생 공연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야 최고의 공연으로 인식하고, 두고두고 꺼내서 회자하는 것이다.

용수철을 맨 앞에 세운 ‘ASN’의 공연이 그랬다.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며 기대를 마구 짓밟고 걷어차 버렸다.

마치 어디 감히 내 공연을 건방지게 마음대로 기대하냐고 꾸짖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지?

나중엔 내가 공연장에 왜 왔는지도 까먹을 정도였다.

용수철이 만들어 내는 소리의 반전에 두들겨 맞아서.

용수철의 노래 실력을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걸 판단하기도 전에 그의 소리는 이미 내 가슴과 머릿속에 들어와서 휘젓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겠다던 내 다짐은 쉽게 무너졌다.

그는 소리의 마술사라도 된 듯이 관객들을 지휘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뜻대로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용수철의 지휘에 맞춰 우리는 숨소리와 표정 하나까지 그의 통제를 받았다.

음악이 끝나고 잠시 정신을 차리려고 하면 그는 다시 지휘봉을 들어서 내 정신을 뺏어갔다.

2시간은 그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박수도, 함성도 수철이 허락한 시간에만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왜 관중들이 좀비가 된 듯 멍한 얼굴로 공연장을 벗어났는지 이해가 된 순간이었다.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수철에게 완벽하게 통제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성을 내려놓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의 선율에 따라 계속 끌려다녔다.

120분 동안이나.

독일,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4.

[용수철의 노래를 듣는 프로 뮤지션들은 노래를 듣는다기보단 그의 소리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해했다.

수철이 입을 벌리고 있지만, 그 소리는 수철의 소리 같지가 않았다.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머리와 눈, 입, 가슴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 프로 뮤지션들은 할 말을 잃었다.

수철은 명성 있는 가수들을 순식간에 아마추어로 끌어내려 버렸다.

대단하고 놀라운 게 아니었다.

음역대가 없이 자유롭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쥐었나 놨다 하는 멜로디는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입체감 있게 들렸다.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거 같았다.

사람들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 뮤지션들은 더는 뻐기거나 아는 척하는 것을 포기했다.

전멸이었다.

덤벼들 엄두가 안 났다.

저 소리는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 어디에선가 날아오는 것 같았다.

벨기에, Le Soir]

5.

[안정된 음역대 그러면서 두꺼운 소리.

어떻게 저런 몸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하다는 기사를 많이 봤다.

너무 쉬운 말이지만, 그의 소리는 편안하게 신뢰를 주면서 모두를 빨아들이며 집중하게 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음역대가 있고, 그 음역대의 탄탄한 소리가 관객들에게 감동과 신뢰를 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쉬운 사실을 증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수만 명의 가수가 평생을 바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거기임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고음을 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고음이 주는 매력은 분명히 있다.

수철은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음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들려주면서도 필요 없이 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그대 안에서 눈을 뜨는’으로 시작하는 노래에서는 소리를 절약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확실히 분명한 건 그는 필요 없는 소리는 전혀 내지 않았다.

쓸데없이 인상을 쓰며 고음을 내지도, 힘을 줘서 지나친 흉성과 허스키한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목소리라는 악기를 연주한다는 인상을 줬다.

소리가 모든 음역에서 안정적으로 들리는 이유였다.

소리의 움직임은 화려하기까지 했다. 흉성의 두꺼운 소리를 내다가 바로 옥타브를 올려서 두성의 높은음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소리가 올라가는데도 수철은 정면을 주시한 채 미동도 없었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겐 입 모양만 보이는데도 수철의 엄청난 두성이 자신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수철이 음정을 높일 때는 마치 고속 엘리베이터가 흔들림도 없이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고, 소리의 막힘이 전혀 없는 탓에 얼마나 높은 음을 내고 있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치 배우가 역할에 따라서 분장을 바꾸듯이 곡에 따라서 목소리의 분장도 바뀌었다.―글을 쓰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써 보겠다.―목소리 분위기도 수시로 바뀌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지만, 몸 안에서는 엄청난 호흡 조절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아니, 지금까지 저렇게 한 사람이 누가 있었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난 판단은 멈추고 가져온 마음을 모두 수철에게 맡겼다.

오스트리아, Wiener Zeitung]

6.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다던 평론가들은 5분도 채 안 돼서 홀딱 빠져들었다.

음악을 듣는 자세도 바뀌었다.

본분을 잊고 그의 소리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궁금함에 귀를 세웠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시계를 확인하고 나서야 알았다.

용수철은 마지막 멜로디를 길게 짚어 내며 끌어오던 호흡을 멈췄다.

부족한 숨을 끌어모으느라 가슴만 들썩였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관객석은 조용했다.

공연장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감정에서 벗어난 수철이 얼굴을 들었다.

땀에 젖은 긴 머리 사이로 왼쪽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시크한 미소를 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는 오늘……”

다음이 궁금하면 잡지를 사라!

프랑스, DIAPASOM]

* * *

―잠시만, 잠시만 부탁드릴게요!

스위스 베른(Bern)에서 대자연을 배경으로 벌어진 마지막 공연, 이 공연이 끝나고 기습적으로 이뤄진 인터뷰에서 기자는 준비해 온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수철! 당신이 말하는 끼, 그 끼는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마이크를 내미는 젊은 기자를 수철은 빙그레 바라보다가 무대 뒤로 끌어당겼다.

“짧게 얘기해도 되나요?”

“네, 좋아요.”

“제가 처음 가사를 쓸 때를 생각하며 말씀드릴게요.”

여기자는 마이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수철의 얼굴을 직시했다. 수철은 손가락을 뻗었다.

“제가 생각하는 끼는 저 너머에서 옵니다.”

“……네?”

수철이 눈 덮인 알프스를 가리키자, 기자는 수철의 손과 알프스를 번갈아 보며 갸웃했다.

수철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가고자 하는 세상, 당신이 바라보는 곳, 바로 그곳 너머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끼는 당신의 꿈이 당신을 향해 흔드는 손짓이니까요.”

“……!”

대답을 들은 여기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망울이 커질 대로 커져서 뭉클한 표정이 되었다.

* * *

“저게 500년 동안 지었다는 그 성당인가?”“와, 엄청 크고 하얗네? 저 뾰족뾰족한 것 좀 봐!”

밀라노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두오모(duomo)를 처음 본 멤버들은 입을 벌린 채 감탄을 자아냈다.

유럽 투어 공연을 모두 마치고 드디어 11월, 수철과 멤버들은 한해 공연의 종착지인 밀라노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스테파노에게로 향했다.

“수철―!”

멀리서 수철을 발견한 스테파노가 팔을 벌린 채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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