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실험 퍼포먼스
9개월 전, 수철의 쇼케이스 영상을 유심히 지켜본 스테파노는 수철의 ‘Radiate’와 자신의 ‘Radiate’를 한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생각을 자신의 에이전시에 전달했다. 에이전시는 이해타산을 다 따져 보고 수철의 스타성까지 확인하고는 곧바로 기획안을 만들어서 ‘디데이 뮤직’과 컨택했다.
―신중히 검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디데이 뮤직’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자체로도 큰 이슈고, 그건 곧 수철이 작곡가로서의 명성에서 벗어나 가수로서의 명성을 대가들 앞에서 검증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검토하겠다는 말은 형식일 뿐이었다.
“이건 먹히겠는데요? 아주 훌륭해요. 무조건 하는 게 좋겠어요.”
디데이 뮤직과 금별기획 중 한 회사라도 부정적인 의견을 내면 진행하지 않는 기류가 형성되어 있는데 기획안을 본 이 부장의 입에서 곧바로 적극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유럽에서의 전시 경험이 많은 이 부장은 본능적으로 이 프로젝트가 이슈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박 대표는 곧바로 스테파노의 에이전시에 긍정적인 의사를 알리고는 다른 일정들을 밀어냈다.
앨범과 공연 대박으로 굵직굵직한 공연 프로모션 업체들이 줄을 서서 좋은 조건을 제안하는데도 모두 거절했다. 수철을 이 무대에 세우기 위해서다. 박 대표는 수철이 예술가로서의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 무대를 우선순위에 뒀다.
“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박 대표와 달리 수철은 망설이는 지점이 있었다.
클래식의 거장인 마에스트로 스테파노가 들려주는 ‘Radiate’, 그리고 곡의 원작자인 용수철과 ‘ASN’ 이 둘이 만들어 내는 ‘Radiate’.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알맹이가 없다.
한 곡의 음악을 각기 다른 음악가가 자기 색깔로 표현한다는 것 외에는 메리트가 없다. 그런 시도는 차고 넘친다. 식상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수철은 이런 방식으로 ‘Radiate’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이 더는 흥미롭지 않다. 스테파노가 올린 초연으로 충분하다. 자꾸 또 다른 초연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려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답답할 뿐이다. 수철은 그런 행위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수철은 의구심을 가진 채 스테파노 앞에 섰다.
“수철, 유럽 투어는 잘 끝났어요?”
두 팔을 벌린 채 달려온 스테파노는 수철을 가볍게 껴안더니 양어깨를 잡고 환하게 웃었다.
“네, 스테파노. 잘 지내셨어요?”“나는 이번 공연 프로젝트 때문에 돌아다니느라 새까맣게 탔어요. 이것 봐요, 하하.”
스테파노는 장난스레 자신의 목덜미를 보여 주며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수철은 스테파노에게 멤버들을 소개했다. 스테파노는 음악을 잘 들었다며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악수했고, 멤버들도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나눴다. 레베카는 스테파노를 이미 잘 알고 있기에 환한 미소로 악수를 나눴다.
“여기가 바로 우리 프로젝트를 올릴 라스칼라(La Scala) 극장이에요.”
스테파노가 밀라노 시내 중심가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었다. 인사를 나누던 등 뒤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라스칼라 극장이었다.
라스칼라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장 중 하나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베르디의 ‘오베르트’, 푸치니의 ‘나비부인’ 등 이곳을 거쳐 간 오페라는 셀 수 없이 많다.
3,500석, 수철이 그동안 해 왔던 공연에 비하면 다소 작은 규모지만 오페라극장으로선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게다가 오페라 외에는 대관을 해 주지 않는데 스테파노의 명성과 에이전시의 끈질긴 설득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올리게 된 것이다. 명성에 금이 가지 않게 훌륭한 공연을 치러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예술가들이 절반은 차지할 거예요.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거든요. 얼마나 대단한 공연인지 두고 보겠다는 거죠. 하하.”
무엇보다 규모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이번 공연은 일반 관중보다는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을 위한 공연이 될 것이다. 극장의 절반은 지휘자, 작곡가, 성악가, 연출가, 기획자, 음악 관계자 등을 포함한 예술가들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만큼 이번 프로젝트에 예술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이번 한 번의 공연이 그 어떤 대단한 규모의 공연이나 엄청난 자본이 들어간 공연보다 더 큰 파급력을 지닐 것이 분명했다.
“쌀쌀하니까 따뜻한 에스프레소부터 한잔할까요? 공연장은 그다음에 보기로 하고요.”
“네,”
공연장에 관해 간단히 설명한 스테파노는 할 얘기가 있는지 사람들을 공연장 근처의 카페로 이끌었다.
“기획안 봤을 때 어땠어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신 스테파노는 작은 잔을 내려놓고 수철과 눈을 맞췄다.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는 말이죠?”
“네,”
스테파노는 수철의 생각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
수철은 스테파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끄덕였다. 그러자 스테파노는 자신이 생각하는 프로젝트에 관해서 설명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번 프로젝트의 타이틀부터 거론했다.
“타이틀은 ‘Radiate to Prism’으로 정했어요.”
그 말에 멤버들은 순간 갸웃했다. 레베카까지도 그랬다.
선뜻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프리즘에 통과된 빛이 여러 빛깔을 띠듯 ‘Radiate’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뜻인가요?”
“맞아요.”
역시 수철은 작곡자답게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프리즘은 당연히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아티스트 분들이겠죠?”
“맞아요.”
“스테파노가 처음 그랬듯이 그분들도 자신의 장르에 맞춰서 해석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옷을 입힐 테고요?”
“그렇죠.”
“그러면 분명 장르를 바꿔서 음악적인 해석만 하는 것에 멈추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그건 너무 흔하잖아요?”“하하, 그것도 맞아요.”
스테파노는 수철이 알아서 자신의 의도를 척척 집어내자,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이 시원시원하게 의도를 파악해 주는 게 고맙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역시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생각에 껄껄 웃었다.
“수철의 말대로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음악에 대한 해석만 내놓으면 그건 집단 리메이크지, 실험 퍼포먼스가 아니잖아요?”“실험 퍼포먼스요?”
수철이 큰 눈으로 되물었다.
“네, 이번 공연을 난 그렇게 생각해요.”
스테파노는 수철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뗐다.
“어떻게 할 거냐면요.”
스테파노는 마치 꼭꼭 숨겨 놓은 비밀을 얘기하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철을 향에 몸을 숙였다.
* * *
같은 시각, 박 대표는 유럽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다.
“아시아 투어 정산은 모두 마무리된 건가?”“네, 금별에서 넘겨받은 자료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이걸 보시면 한눈에 다 아실 수 있습니다.”
박 대표는 정 실장이 내민 자료들을 확인했다.
아시아 투어는 금별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관리한 공연이다. 기획, 홍보, 에이전시 컨택, 심지어 게스트로 출연하는 각 나라 유명 뮤지션의 섭외까지. 마치 손아귀에 쥐고 있기라도 한 듯이 세심하게 디테일을 다 챙겼다. 물론 수익의 극대화를 위한 거지만 그렇다고 수철의 이름에 해를 끼치는 행위는 전혀 없었다. 싸구려 제안도 디데이 뮤직과 상의하기 전에 알아서 커트했다.
디데이 뮤직에겐 편한 시간이었다. 스케줄을 점검하고 흥행 소식만 체크하면 됐다. 무엇보다 돈 계산만 하면 됐다.
필리핀의 한 공연을 제외한 모든 공연이 대박이었다. 게다가 금별에서는 아이템까지 판매해서 엄청난 수익을 만들어 냈다.
전체 매출은 천억이 훌쩍 넘어갔고, 디데이 뮤직의 몫으로 정산된 금액만 200억에 달했다.
그래서 박 대표는 이참에 직원을 더 늘리고 장소를 옮겨서 새로운 건물을 지어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재능 있는 신인 뮤지션을 영입할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수철만큼은 아니지만, 그동안 박 대표의 눈에 띄는 신선한 뮤지션들이 몇 명 있었다.
“몇 시에 출발하십니까?”
자료를 훑어본 박 대표가 책상 위에 내려놓자 지켜보던 정 실장이 물었다.
“이따 해 지면 출발해야지.”“오랜만에 밤 비행기를 타시겠네요?”“밤 비행기가 편하지. 잠자기도 좋고.”
아시아 투어는 금별이 다 맡아서 했지만, 유럽 투어는 디데이 뮤직과 영국의 에이전시 그리고 유럽 몇 개 나라의 에이전시들과 연계해서 진행했다. 박 대표는 이들을 만나서 그간 벌어진 일을 정리하고, 추후에 벌어질 일에 관해서도 의논할 생각이다. 그중에서도 해리를 만나는 일이 크다. 그동안 앨범에 관해서 잦은 제안을 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 만나서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마치면 밀라노로 넘어가 수철을 만나고, 프로젝트를 관람할 생각이다.
“런던에 도착하면 ECM으로 바로 가십니까?”“그래야지, 유럽 투어를 진행했던 에이전시를 먼저 만나고 그다음에 해리 이사를 만날 거야.”“쉬지도 못 하고 피곤하시겠어요. 레베카를 런던으로 가라고 할까요?”“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일정은 내가 빡빡하게 잡은 건데 뭐. 얼른 일 보고 밀라노로 넘어가야지.”
해리는 박 대표가 온다는 소식에 호텔을 예약하고 저녁 만찬 자리까지 가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바쁜 일정을 이유로 해리의 호의를 모두 거절했다. 한시라도 빨리 밀라노로 가서 수철을 만날 생각에서다. 그간의 유럽 투어에 관한 에피소드도 듣고, 스테파노와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싶다.
“수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
“밀라노 공연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겁니까? 그 이후에 스케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일단 내년 4월까지는 아무것도 잡지 말고 기다려 봐.”
“4월까지요?”
“그래, 수철은 한국에 오지 않고 노르웨이에 머물 생각을 하고 있어.”
“노르웨이요?”
정 실장은 연거푸 눈을 크게 떴다.
뜬금없이 노르웨이라니.
“호주처럼 그곳에 수철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이 생겼나 봐. 투어 하다가 말이야.”
시드니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얘기였다. 공연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생겨서 거기서 작업을 해 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럼 이번에도 거기서 앨범 작업을 하겠다는 얘긴가요?”“자세한 건 만나 봐야 알겠지만, 그럴 생각인 모양이야.”“그럼, 다른 멤버들은요?”“멤버들도 쉬는 동안 각자 자기들의 앨범을 만들고 싶은가 봐. 수철과 함께하며 영감도 받았을 테니 당연한 생각이지.”“그게 아니라 제작자들이 앨범 한 장 내 보라고 옆구리 찔렀겠죠.”“하하, 그럴 수도 있고.”
* * *
수철은 스테파노의 설명을 들으면서 기획안으로만 보던 공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스테파노는 수철이 생각했던 것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 어디에도 ‘Radiate’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Radiate’는 하나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이게 포스터예요.”
스테파노가 보여 준 포스터에도 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포스터에는 덩그러니 어두운 배경에 프리즘과 프리즘을 통과한 빛깔만 있었고, 그 아래로는 스테파노와 친구들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참여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수철의 예상대로 이 프리즘이 바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들인 거죠.”
아티스트들이 스스로 프리즘이 되어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통과한 ‘Radiate’를 관중 앞에 선보인다는 의미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Radiate’라는 시작점보다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오는 빛깔들에 쏠릴 게 분명했다.
수철은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Radiate’를 각자 재해석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그동안 ‘Radiate’에만 실렸던 비중이 아티스트의 예술 세계로 옮겨와 있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그것을 위해 프로그램에 몇 가지 장치를 해 놓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시각적인 부분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공연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실험 프로젝트네요?”“빙고! 실험적인 종합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죠. ‘Radiate’는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고 예술가들은 저마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는, 혹은 갇혀 있는 자신만의 원초적인 트라우마를 표출해 내서 소리뿐만이 아니라 영상으로 함께 표현하는 게 포인트예요.”
비디오 아티스트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유였다.
수철은 스테파노가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많이 진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단계가 뭘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프로그램과 무대연출까지도 거기에 포커스를 맞췄어요. 프리즘에요.”
스테파노는 괜히 거장이 아니었다. 수철이 갖고 있던 그간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켰다.
“자, 이제 연구소를 구경해 볼까요?”
설명을 마친 스테파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테파노는 라스칼라 극장을 연구소라고 칭했다. 이틀간의 실험적인 공연이 열릴 연구소라는 뜻이었다.
스테파노가 앞장서 걸음을 떼자 멤버들도 뒤따랐다.
멤버들 중 몇몇은 수철과 스테파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얘기가 어려워서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아니면 장기간 공연 탓으로 누적된 피로 탓인지, 연신 눈만 껌뻑거렸다. 레베카, 마커스, 영준이 형만이 진지한 얼굴로 끝까지 들었다.
* * *
“출발할까요?”
“네,”
다음 날 아침 일찍 수철은 레베카와 함께 호텔을 나섰다.
오스트리아로 가기 위해서다.
오스트리아 빈(Vienna)에서 열리는 윤천화 미술가의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녀를 만나서 수철은 이번에 구상하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관해 도움을 구할 생각이다.
[One Curve]
어두운 실내, 벽에 붙은 그림을 비추는 한줄기 핀 조명.
윤천화 미술가는 ‘하나의 곡선’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