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14화 (214/239)

#214화. 물방울 몇 개

어쨌건 박 대표는 수철의 시도가 긍정적으로 들렸다. 이제 수철이 ‘Radiate’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얘기였으니까.

“타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겠다는 발상은 정말 매력적이야. ‘Radiate’를 네 얘기가 아니라 타인의 얘기로 옮기겠다는 생각을 했다니.”

박 대표는 말을 하다말고 대단하다며, 잘했다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는 이 말을 끝으로 일단락됐다.

“영국에서 해리 만났었다면서?”“아, 네. 말씀드린다는 게 깜빡했네요. 이동 중에 차 한잔한 거라서요.”“그래서, 결론은 내렸어?”“앨범만 하는 건 괜찮아요. 국악을 재즈로 바꿔 보는 건 한 번쯤 하고 싶었던 거니까요. 국악을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요.”“어찌 됐건 앨범만 하고 공연은 안 하겠다?”“네, 그럴 생각은 없어요.”

박 대표는 잠시 수철의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알았어, 그 부분은 내가 다시 조율해 볼게. 조금이라도 앨범과 관련된 활동을 요구하면 거절하는 거로.”

“네.”

박 대표는 회사 대표인지 보호자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박 대표를 보는 수철의 표정도 그랬다.

“제시 다음 앨범에 곡 써 주고 듀엣 같이 하는 거는?”“그것도 곡 쓰고 녹음하는 거는 괜찮아요.”

“활동은 빼고?”

“네.”

박 대표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이었다.

“근데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뭐가요?”

“곡 써 주고 노래 같이 하는 거 말이야.”“어려울 거 없잖아요? 그냥 하면 되는데.”

“…….”

수철과 제시의 친분은 잘 알지만 그래도 자기 일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답하는 게 좀 당황스러웠다.

이번엔 수철이 잠시 박 대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쌤, 그거 아세요?”

“뭘?”

“제시가 그 에이전시에 계속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뭐?”

“흐흐, 진짜예요.”

박 대표는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얘기도 놀랍지만, 수철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쌤, 그러니까 제 말은 제시에게 투자하는 걸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

“혹시 알아요? 저랑 같이 디데이 뮤직에서 활동하게 될지요?”

“……!”

* * *

아침부터 연습이 시작됐다.

연습을 지켜보는 윤천화 미술가는 놀랐다.

같은 음악이 맞나 할 정도로 지난 공연에서 봤던 음악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상한가요?”

새롭게 구성된 음악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윤천화 미술가에게 수철이 다가섰다.

그녀는 수철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예상했던 거보다 너무 많이 바뀐 거 같아서 좀 더 집중하려는 거예요.”“네, 많이 바뀌었죠. 이번 프로젝트는 편곡을 바꾸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르게 출발했어요. 그래야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죠.”“그래도 색깔은 남아 있는 것 같은데요?”“네, 뿌리는 남겨 놓고, 몸통만 바꾼 셈이죠. 그래야 이야깃거리가 생기니까요.”

“호호, 그렇군요.”

수철이 말하는 의미를 아는 그녀는 웃음을 보였다.

연습은 계속됐다. 수철은 즉석에서 멤버들과 상의하며 소리를 탄탄하게 다져 나갔다. 멤버들은 수철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음악에 관해 긴 시간 설명했음에도 따라오는 것을 버거워했다. 수철은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는 대신 속도엔 박차를 가했다. 윤천화 미술가에게 최대한 선명한 그림을 보여 주는 게 급선무였다.

“수철 씨, 잠시 바람 쐬며 커피 한잔할까요?”

윤천화 미술가는 연습을 지켜본 느낌을 말하겠다며 야외 카페로 수철을 끌었다.

그녀는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돌아서자마자 바로 물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부터 얘기해 주겠어요? ‘Radiate’를 타인의 얘기로 옮겨서 객관화하겠다는 생각 말이에요, 그걸 알아야 그림을 잡을 수 있겠어요.”

음.

수철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무대에서 노래할 때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얘기만 한다는 생각이요.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폭력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폭력적이요?”

“일방적으로 관중들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거잖아요. 가사와 노래만 들려주면서 말이에요.”

“아…….”

“그래서 이 얘기를 다른 사람의 얘기로 돌려놓고, 제가 관중이 되어서 바라보고 싶었어요. 물론 이 이야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은 이유도 있고요.”

* * *

“거기서 리듬을 바꾼 이유가 뭔지 알려 주시겠어요? 그래야 시각적인 디테일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수철의 의도를 파악한 윤천화 미술가는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시각적인 부분이 빠르게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멤버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적극적으로 작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철이 구상하는 작품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스테파노는 급히 연습실을 찾았다. 그런데 연습실에 들어설 때의 환한 표정을 사라지고, 얼굴이 점점 굳는가 싶더니 이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수철, 당신은 정말!”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 줄 수 없어요?”

“네?”

“이거 매번 놀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심장이 뛰어서 공연도 하기 전에 병원 신세를 지겠어요. 하하.”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수철은 스테파노가 몇 달을 노력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한 걸음만에 올라서 있었다.

“아무리 음악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하지만 이건 정말.”

직접 확인했는데도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고민했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어렵게 윤곽을 잡았다. 그런데 수철은 단 며칠 만에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갑자기 무기력해지며 좌절감마저 밀려왔다.

* * *

윤천화 미술가와 커피를 마셨던 자리에 이번엔 스테파노와 마주 앉았다.

“‘Radiate’라는 에피소드를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각을 공연에 담는 건 당연하고,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분석가들의 분석을 현장에서 담고 싶은 거예요. 마치 공연 실황을 촬영하듯이요.”

스테파노는 왜 비평가와 분석가들을 공연에 초청했는지 궁금해하는 수철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예술가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를 지켜보며, 예술가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까지 건드려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분석가들의 분석을 통해서.

“일종의 이벤트라고 할 수 있죠.”

평범한 관중에겐 흥미로운 이벤트일 수 있지만, 예술가들에겐 하나의 큰 사건이다.

이런 프로젝트는 들어 본 적도, 시도한 적도 없었다.

“이게 다 수철이 ‘Radiate’를 만들었으니까 가능한 거예요. 거기서 뻗어 나온 거니까요.”

수철은 새삼 무엇이 이 나이 든 마에스트로를 자신만큼이나 이 음악에 에너지를 쏟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수철은 떠나는 스테파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제 편하게 대해 주세요. 다른 사람들처럼요.”

영어에 특별한 존댓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나친 배려와 존중의 언어가 수철은 불편했다.

스테파노는 할아버지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수철에게 굉장히 격식 있고 정중히 대하는 건 불편하다. 아무리 수철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도.

“하하, 알았어요.”

수철의 의도를 파악한 스테파노는 백발을 만지며 웃음을 보였다.

“수철이 불편하다면 그렇게 해야죠. 내일부터는 편하게 부를게요. 친구처럼요.”“네, 그렇게 해 주세요. 감사해요, 스테파노.”

* * *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공연을 이틀 앞두고 마에스트로 스테파노는 인터뷰에서…….]

프로젝트의 유명세는 연습 기간에도 계속 커져 갔다. 스테파노의 명성이 가장 큰 이유지만 음악가들 사이에서 ‘Radiate’는 화제를 몰고 다녔고, 특히 클래식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음악을 넘어 하나의 상징적인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마치 포스터에 나온 프리즘의 이미지처럼.

이들 대부분은 스테파노의 초연은 물론이고, 수철의 앨범까지 다 사서 들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이번 프로젝트에 관한 관심이 컸다.

예술계에서는 이런 형식의 퍼포먼스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공연 전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들이 한창 리허설에 땀을 빼고 있을 때, 이탈리아는 밀라노뿐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들까지도 떠들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마에스트로의 도전 정신을 찬양하며 그의 행보에 연일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 나서야 수철에게 관심을 할애했다. 음악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도 수철의 작품이 가진 깊이에 감탄을 쏟아 낸다는 보도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한 번 더 스테파노의 역할을 거론했다.

유럽에서 히트 친 몇 장의 앨범과 영화 음악상 수상이 수철의 명성에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스테파노가 올린 ‘Radiate’ 초연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깐깐하고 호의적이지 않은 클래식 음악가들조차 수철을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가 누굴 인정한다는 거야?”

박 대표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소파 구석으로 신문을 집어 던져 버렸다.

아직도 클래식계에서 동양인을 낮춰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 * *

드디어 공연의 날이 밝았다.

거대한 문이 열리자 1시간 만에 티켓을 매진시킨 사람들이 줄지어 입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라스칼라 극장에 입장하는 탓에 오페라를 볼 때의 드레스코드를 갖춰 입고 있었다. 복장은 자유롭게 해도 괜찮다고 공지했지만, 관객들은 드레스코드로 예의를 표시하고 있었다.

―저기 봐, 마에스트로 로렌조야!

내로라하는 클래식계 거장들이 하나둘 극장에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웅성대며 목이 돌아갔다. 그런 모습이 한동안 계속됐다. 유럽 전역에서 유명하다는 예술가들은 다 모이는 것 같았다.

무대 정면의 앞 좌석에는 수철의 지인들도 앉아 있었다. 박 대표뿐만이 아니라 윤천화 미술가, 제시와 영국 멤버들, 전혜미 소프라노, 사라 제이, ECM의 해리까지 참석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온 BBC의 관계자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객석을 모두 채우고 시간이 되자,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공연의 막이 올랐다.

첫 무대는 스웨덴에서 온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카비(Kabi)였다.

클래식에서 뉴에이지로 전향한 그녀는 북유럽을 기반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신예였다.

그녀의 피아노를 눈여겨보고 있던 스테파노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 의사를 물었고, ‘ABYSS’를 들은 이후로 어떻게든 접촉해 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녀는 하겠다며 바로 달려들었다. 게다가 스테파노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어마한 이력이 된다.

카비는 클래식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뉴에이지로 전향해서 이루게 됐다.

그녀는 주어진 20분 동안 쉬지 않고 자신만의 ‘Radiate’를 풀어 나갔다.

클래식과 재즈의 중간 정도를 아슬하게 연주하던 그녀는 느닷없이 음계를 깨트리며 검은 건반을 타악기 두드리듯이 내려쳤다. 그러다 글리산도(Glissando, 높이가 다른 두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방법)로 건반을 연속해서 몇 번 훑더니, 갑자기 템포를 바꾸며 어디에선가 들어 본 듯한 구전 동요의 멜로디를 누르기 시작했다.

수철은 그 소리가 꿈속에서 봤던 어린 시절의 배경음악으로 들렸다. 한국의 동요는 아니지만 느낌이 그랬다.

수철은 이번에 다른 아티스트들의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이미 목적을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Radiate’를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표현해 내는 아티스트들을 보면서 이 곡이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느꼈다. ‘Radiate’는 이제 수철을 떠나 타인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고, 마지막엔 수철이 보였던 눈물을 보였다.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카비는 동요의 멜로디를 누르다가 다시 격렬하게 연주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하게 절정으로 치닫더니 다시 손이 느려졌다. 그녀의 ‘Radiate’가 어느덧 종착지에 다다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건반에서 손가락을 떼며 땀방울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을 몇 개를 흰 건반 위에 떨어트렸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들썩이는 그녀를 숨죽이고 바라봤다.

짝짝짝!

잠시 후 그녀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사람들은 피아노 위에 떨어트린 물방울 또한 퍼포먼스의 하나인지 궁금해하며 박수를 쳤다.

짝짝.

클래식의 거장이라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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