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베르겐에서의 석 달
오슬로에서 출발한 기차는 6시간을 넘게 달려 베르겐에 도착했다.
기차 여행을 꼭 해 보라는 스테파노의 추천이 있었다.
처음엔 스테파노가 왜 권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 덮인 집, 눈 덮인 산, 가끔 눈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다시 눈 덮인 집, 눈 덮인 산.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것의 연속이었다.
6시간 반이나.
“진짜 산속 어딘가에 눈의 요정이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레베카의 말처럼 이곳은 겨울 왕국이었다. 어딘가에 눈의 요정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하지만 신기한 건 똑같은 풍경의 연속인데도 창밖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면서 스테파노가 기차 여행을 해 보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맑아졌다.
몸과 마음 모두.
처음엔 눈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평화로워졌다. 심장이 차분하게 뛰며 머릿속에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마치 창밖에 보이는 온통 하얀 세상처럼, 마음이 리셋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똑같은 풍경의 연속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기네요.”
베르겐에 있는 스테파노의 별장은 숲속의 작은 성 같았다. 작고 아담하고 지붕이 뾰족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왜 사람들이 여기에 오고 싶어 하는지 알 거 같아요.”
별장은 언덕에 있어서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창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비현실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스테파노가 한눈에 반해서 이곳을 샀다는 말이 실감 났다.
“전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기차를 놓치기 전에요.”
레베카는 수철이 몇 달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세팅해 주고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수철이 이곳에 있는 동안은 작업 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레베카는 그동안 쓰지 못했던 휴가를 쓰기로 했다. 부모님을 만나러 미국으로 가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계획이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네요.”
레베카는 떠나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휴가는 자기도 이곳에 와서 보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여기에 별장 하나 살까요?”
“네?”
수철이 뜬금없이 툭 내뱉자 레베카는 설마 하고 쳐다봤다. 진심인지 파악하려는 눈빛이었다. 수철은 그런 레베카를 보며 스테파노가 했던 말을 전했다. 별장을 하나 사 놓으라고 했던.
“한번 알아볼까요?”
수철은 농담처럼 말했는데, 레베카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동안 자신이 에이전트를 했던 아티스트들이 유럽에 별장을 갖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하하, 아니에요.”
수철은 손을 저었다. 별장이 생기면 왠지 주기적으로 들러야 할 거 같고, 발이 묶이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마음 드는 곳에 머무는 게 좋다.
“아, 네.”
레베카는 힘없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철은 레베카가 실망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레베카, 이렇게 할까요?”
“……?”
“쌤이랑 얘기해 볼게요. 쌤이 좋다고 하면 이곳에 별장을 하나 알아보는 거로요. 그렇게 하면 레베카도 와서 쉬고, 디데이 뮤직 사람들도 와서 쉬면 좋잖아요. 회사 별장으로요.”“아, 네! 좋은 생각이에요!”
레바카의 눈이 확 떠졌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박 대표도 동의할 게 뻔하다.
수철은 별장을 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할 생각은 없었다. 관리 같은 것도 할 줄 모르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데 발목 잡히는 것 같은 느낌도 싫었다.
대신 회사 이름으로 구매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표뿐만이 아니라 직원과 소속 아티스트들도 이곳에서 힐링할 수 있게. 한국과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휴가를 보내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게다가 레베카도 이곳을 너무 좋아한다. 잘하면 디데이 뮤직의 북유럽 거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스캠프처럼.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수철이 박 대표와 상의해서 별장을 사겠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레베카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까지 하고는 먼 길을 떠났다.
“굿 뉴스 기다릴게요.”
레베카는 수철이 허투루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년엔 노르웨이에서 휴가를 보낼 생각을 하며 캐리어를 끌고 사라져 갔다. 수철은 오랫동안 함께했던 동료이자 친구가 사라지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 * *
흐읍, 하아―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창문을 열면서 들이마시는 첫 공기는 언제나 신선했다. 폐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느낌이었다.
벌써 석 달이나 그렇게 매일 아침 첫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있다.
베르겐에 가자고 하면 기겁하며 도망친다는 스테파노의 어린 손자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석 달 동안의 노르웨이는 딱 그랬다. 다른 곳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숲속에서의 하루.
수철은 그래서 더 좋았다.
심심해서 더 좋고, 푹 자고 눈뜰 때의 상쾌함이 너무 좋았다.
―이곳을 좋아하는 젊은이도 있다고!
소리쳐 주고 싶을 정도로.
산책하며 음악을 구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수철에겐 이곳의 환경은 너무 잘 맞았다. 몇 달간은 시드니를 잊고 지낼 정도였다.
마커스는 너무 음악에만 파묻혀 살지 말고 나가서 또래들과 뒤섞여 놀라고 충고했지만, 수철은 여기서 산책하고 생각하고 작업하는 시간이 좋았다.
수철은 석 달 동안 제시의 새 앨범에 줄 곡, 해리가 제안한 국악을 재즈로 풀어내는 앨범, 그리고 ‘ASN’의 두 번째 앨범에 들어갈 가사와 곡 작업까지 모두 마쳤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커스, 이언, 루카스 등이 부탁한 연주 앨범의 편곡과 피처링까지 다 녹음해서 보냈다. 석 달이라는 시간은 여유로우면서도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호주 멤버들이 자신의 앨범을 준비하며 창작의 시간을 보낼 때 다혜는 친구들과 어울려 추억을 만드는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다혜는 그동안의 인지도 덕분에 작곡 의뢰를 많이 받았고, 그중의 몇 곡은 수철에게 편곡을 부탁해서 수철이 그것도 해 줬다. 그리고 영준이 형은 영국에서 트럼펫 솔로 앨범을 작업하며 수철에게 피아노 반주를 부탁했다. 수철은 정식 녹음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영준이 형이 보내온 음악에 피아노를 얹어서 보내 줬다.
수철에게 작업을 맡긴 사람들은 모두 결과물에 만족했다. 참고로 마커스와 영준이 형은 여러 음반사에서 앨범 제안이 있었지만, 해리가 있는 ECM을 선택했다.
* * *
똑똑똑.
수철이 노르웨이의 겨울에 푹 파묻혀 있는 동안 총 네 명이 별장 문을 두드렸다.
첫 번째 노크의 주인공은 전혜미 소프라노였다.
그녀는 눌러쓴 털모자 위에 눈을 잔뜩 얹고 와서 문을 두드렸다. 두꺼운 장갑을 낀 채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이 다급해 보였다. 기다리고 있던 수철이 문을 열자 그녀는 환한 미소로 들어서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 수철 씨!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군요. 눈의 왕국에 사는 왕자를 만나러 온 공주……. 는 아니지만, 너무 반가워요.”
그녀는 뮤지컬의 대사 같은 멘트를 내뱉으며 발개진 볼 밑으로 잔뜩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어서 들어오세요.”
수철은 그녀를 안으로 안내하고 잠시 별장 구경을 시켜 준 후 박 대표가 한국에서 보내온 녹차를 끓는 물과 함께 내밀었다.
“오시는 데 많이 추우셨죠?”“아니에요. 너무 좋았어요. 추위를 잊을 정도로요. 사람들이 왜 베르겐 베르겐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오슬로는 몇 번 공연을 해 봐서 잘 아는데, 여기는 처음이거든요. 정말 운치 있네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차를 마시며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대한 감탄사를 연신 뱉어 냈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던 그녀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그거 아세요?”
“……?”
“할아버지들께서 여기 오겠다고 한 거요?”
“네? 진짜요?”
“원래 수철 씨가 시드니에 있으면 거기로 가려고 했는데 수철 씨가 없어서 올겨울은 한국에서 떨면서 보내게 됐다고 투덜거리시더라고요. 호호.”
“아, 하하.”
할아버지 3인방이 겨울에 호주로 오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축하 전화를 해 왔었는데, 그때 노르웨이로 갈 거라는 말을 미처 하지 못했었다.
“수철 씨가 노르웨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셨어요. 호호.”
“하하하.”
할아버지들의 화난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제가 수철 씨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바로 비행기 타고 오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말렸죠. 괜히 얼음에 미끄러지시기라도 하면, 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잖아요? 저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거든요. 호호.”“하하, 잘하셨어요. 할아버지들 넘어지시면 병간호하다가 시간 다 보낼 수 있어요. 저도 그러긴 싫거든요. 하하.”“호호.
한참을 그간 있었던 신변 얘기들을 나누던 전혜미 소프라노는 녹차를 한 잔 더 마시겠다고 하고는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사라 제이가 백자의 눈물 주제곡을 불렀듯이 저도 수철 씨의 ‘Radiate’를 저의 스타일로 바꿔서 불러 보고 싶어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까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날 수철 씨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제 머릿속을 울렸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저만의 ‘Radiate’를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요.”
조금 전까지의 미소는 사라지고 그녀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강한 의지를 보였다.
수철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주시하면서 물었다.
“가사는 직접 쓰실 건가요?”
“네.”
“편곡도 직접 하실 거고요?”“네, 마침 이번 일을 같이하고 싶은 마에스트로가 있어요.”“그럼 멜로디 라인만 있으면 되겠네요?”
“네.”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박 대표와 그녀의 에이전시가 서로 계약서만 작성하면 되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그녀와 같은 요청이 쏟아지고 있었다.
“제가 듣기론 지금 오페라로 만들겠다는 제안과 뮤지컬로 올리고 싶다는 제안이 많다고 들었어요.”
수철은 박 대표에게 들었던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하면 클래식으로 편곡된 곡이 끊임없이 계속 만들어질 텐데 괜찮겠냐고 묻는 거였다. 그들의 음악에 묻힐 수도 있으니까.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녀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머리를 떨구고 생각하더니 다시 눈에 힘을 주고 수철을 봤다.
“그분들은 그분들이고 저는 저만의 ‘Radiate’를 하고 싶어요. 저도 내뿜을 것이 많거든요. 호호.”
그녀는 웃음을 보이며 강한 의지의 눈빛을 반짝였다. 수철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조금 생뚱맞지만,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했다. 그녀의 요청을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 * *
똑똑똑!
두 번째 노크의 주인공은 해리였다.
수철은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민요 다섯 곡을 뽑아서 재즈 피아노로 풀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녹음해서 박 대표가 한국에서 보내온 민요 영상과 함께 해리에게 보냈다. 해리는 음악을 듣고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곧장 달려왔다.
“한국 전통 음악이 이렇게 그루브한지 왜 일찍 말하지 않았어요?”
“……네?”
“이런 줄 알았으면 진즉에 하는 건데!”
해리는 음악에 대만족했다. 클래식을 재즈로 해석하는 앨범은 다음으로 미루고 한국 민요를 한 장 더 하자고 할 정도였다.
해리는 밤새 와인을 들이켜며 앨범에 관해 얘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앨범에 관한 얘기는 별로 재미가 없었지만, 그동안 해리가 앨범을 기획하며 겪었던 얘기를 듣는 건 흥미로웠다. 특히나 지금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음악가들의 풋내기 신인 시절을 듣는 건 재밌었다.
“하하, 진짜요?”
수철이 아는 몇몇 뮤지션의 신인 시절 실수담은 정말 흥미로웠다.
음, 그랬단 말이지?
다음에 만나면 골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고개가 너무 빳빳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똑똑똑.
세 번째로 문을 두드린 건 제시와 영국 멤버들이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건 수철에겐 특별한 선물 같았다. 기억에 남을 만한 에피소드는 없었다. 하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며칠간 계속 떠들며 술만 마셨는데도 즐거웠다. 마치 그동안 못 어울렸던 것을 한 방에 다 해소하려는 듯이, 모처럼 휴가를 얻은 제시까지 과음하는 덕분에 조용했던 별장은 며칠간 시끌벅적했다.
* * *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사람은 바로 별장의 소유주인 스테파노였다.
똑똑똑.
수철은 스테파노의 별장에서 스테파노를 맞이했다.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상황이 연출됐다. 스테파노는 코트의 어깨 위에 눈을 잔뜩 얹은 채 나타났다.
“들어가도 되겠나?”
예상치 못했던 방문에 수철이 놀라서 쳐다보자 스테파노는 먼저 안으로 발을 디뎠다.
킁킁.
그는 어깨 위의 눈을 툭툭 털고 들어와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곤 묘한 미소를 띠며 수철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