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218화 (218/239)

#218화. 두 명의 거장

“냄새가 많이 나는군.”“……무슨 냄새요?”

“예술혼을 불태운 냄새 말이야. 집안이 온통 그 냄새로 가득해. 하하.”

“…….”

스테파노는 껄껄 웃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수철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럴 땐 세대 차가 느껴진다. 어쨌든 항상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스테파노.

“2주 후에 떠날 생각이라고?”

그는 익숙하게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네, 시드니로 돌아가서 다음 앨범 녹음을 시작하려고요.”“앨범은 4월에 낼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나?”“미리 가서 멤버들도 만나고 그들의 앨범도 좀 도와주려고요.”“그렇군, 그럼 가기 전에 하루만 시간 내서…….”

스테파노는 벽난로에서 나온 연기에 말을 멈추고 눈을 찡그렸다가 다시 이었다.

“나와 스웨덴에서 이틀만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겠나?”

“스웨덴이요?”

“그래, 이번엔 스웨덴 왕립 음악원(Kungliga Musikaliska Akademien)에서 대학원생들 특강이 있는데…….”

스테파노는 며칠 후 스톡홀름(Stockholm)에 있는 음대에서 특강을 한다고 했다. 그 특강은 여러 명의 마에스트로가 함께 진행하는데, 그들은 모두 수철의 퍼포먼스를 보러 라 스칼라 극장에 왔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난번에 인사했던 마에스트로 로렌조 기억하지?”

“네,”

“이번에 그 사람이랑 나랑 해서 총 5명이 같이 진행을 하거든. 스웨덴 전역의 대학원생이 다 모여드는 희귀한 특강이 될 거야.”

“아, 네.”

스테파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얘기하는데, 수철은 시큰둥했다. 장단을 맞추느라 형식적인 리액션만을 했다. 그걸 눈치챈 스테파노는 빙긋 웃더니 본론을 꺼냈다.

“핵심만 얘기하면 마에스트로들이랑 다 같이 모여서 밥 한 끼 하자는 거야.”

지난번 만찬회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유럽의 클래식 거장들, 특히 그중에서 눈매가 인상 깊었던 마에스트로 로렌조는 초연 때도 수철을 보러 왔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수철이 없어서 못 만났고, 만찬회에서도 수철이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느라 제대로 대화도 못 했었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있었다.

그런데도 로렌조는 다음번엔 자신과도 에스프레소 한잔하자며 정중히 요청했었고, 수철은 나이 든 신사의 부탁에 꼭 그렇게 하겠다고 했었다.

“베르겐과 스톡홀름이 서로 좀 멀긴 하지만, 그래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붙어 있는 나라잖아? 자네가 돌아가기 전에 같이 밥 한 끼 하자는 거야. 어때? 시간이 되겠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에스트로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별장을 빌려 준 스테파노가 여기까지 와서 요청한 만큼 거절하기도 뭐했다.

석 달이나 공짜로 별장에 머물렀는데 밥 한 끼쯤이야.

“네, 그렇게 할게요.”

수철은 흔쾌히 대답했다. 스테파노는 흐뭇한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장작들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계속 타들어 갔다. 수철은 나무가 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을 끓여서 찻잔에 따르고는 박 대표가 보낸 녹차 티백을 담가서 스테파노에게 내밀었다.

“땡큐.”

스테파노는 찻잔에 코를 대고 향기를 음미했다.

“예전에 한국인 제자가 차를 선물한 적이 있는데, 이것과 같은 향이었어.”

스테파노는 녹차의 은은한 향을 맡으며 그때를 추억했다.

“만찬만 하는데 왜 이틀이나 시간을 내라고 하신 거예요?”

수철은 스테파노의 분위기를 깨며 물었다. 스테파노는 여전히 시선을 찻잔에 둔 채 대답했다.

“하루만 보내기는 섭섭하잖아. 나머지 하루는 관광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라는 거지.”

고개를 돌려 수철을 봤다.

“특별한 계획 없으면 나랑 보내도 좋고. 난 특강 끝나면 한가하거든.”

“…….”

관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가 없어서 불편한 건 없고?”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근데, 자네…….”

“……?”

“여자 친구 만들 생각은 없어?”

“…….”

“내 제자 중에……….”

“스테파노.”

“응?”

“숙소는 학교 근처로 알아보면 되나요?”“숙소는 걱정 마, 별장이 있으니까.”“……스웨덴에도 별장이 있어요? ”“그럼, 있지. 도움 주시는 아주머니께서 자네 아침과 점심도 다 챙겨 주실 거야.”

수철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다가 물었다.

“대체 별장이 몇 개나 되세요?”“왜? 자네가 몇 개 사겠나? 그렇다면 내가 싸게 넘기지. 한두 개는 팔아도 괜찮으니까.”

“…….”

“돈 벌어서 뭐하나? 별장이나 사지.”

“…….”

“아, 그리고 여자 친구가 생기면 말해, 태평양의 섬을 빌려 줄 테니까.”

섬도 있냐고는 묻지 않았다. 스테파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철의 물음과 상관없이 스테파노는 말을 이었다.

“아주 따뜻한 곳이야. 관심 있으면 여자 친구부터 데려오라고. 하하.”

껄껄 웃다가 얼굴을 붙였다.

“자네, 혹시 특강 한번 해 볼 생각 없나? 자네가 그래 주면 정말 좋을 거 같은데.”“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

“거절할게요.”

“그럴 줄 알았어.”

* * *

며칠 후, 수철은 3개월 동안 정든 베르겐을 뒤로하고, 스웨덴으로 가기 위해 별장을 나섰다.

하루하루가 동화 같던 시간이었다. 수철에게 베르겐은 그런 곳이었다. 수철은 그동안 정이 들었던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와도 포옹하며 작별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붙어 있지만 이동하는 시간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베르겐과 스톡홀름은 양쪽 나라의 끝과 끝이었다.

그래서 빨리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하지만 수철은 이번에도 기차를 선택했다. 마지막까지 노르웨이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서다.

덕분에 아침 일찍 길을 나섰지만 해가 질 때가 돼서야 스톡홀름의 별장에 다다랐다.

스테파노는 성을 좋아하나?

그곳 역시 성처럼 생긴 곳이었다. 게다가 노르웨이의 별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성이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삐―

수철이 벨을 누르자 큰문을 열고 제법 나이가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선생님 말씀 듣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주머니는 수철을 안내하며 집안 곳곳을 보여 줬다. 집 안에 있는 몇 가지 장비의 사용법을 알려 주고, 준비해 놓은 음식이 있는 테이블까지 보여 주고는 열쇠를 건네고 사라졌다.

너무 큰 곳이라 어디다 짐을 풀어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도착했나?

“네, 지금 막이요.”

―별장은 마음에 들고?

“네, 좋아요. 그런데 너무 큰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곳을 잡을 걸 그랬나 봐요.”―하하, 그래도 낯선 곳에 자네를 혼자 둘 수는 없지. 그곳이 좀 썰렁할 수도 있지만, 서재에 책도 많고 이 층에 그랜드 피아노도 있으니까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네, 감사해요.”

―그래, 푹 쉬고. 내일 만찬회에 갈 때 데리러 가겠네.

스테파노는 내일 데리러 오겠다며 무심하게 전화를 끊었다.

* * *

다음 날 수철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산책도 하고 도시도 구경할 겸해서다.

수철은 먼저 아주머니께서 추천한 감라스탄(Gamla Stan)이라는 올드타운(Old Town)에 들렸다. 스톡홀름에 처음 온 사람은 꼭 한번 가 봐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관광지답게 전망대도 있고, 박물관도 있고, 쇼핑점들도 많았다. 하지만 수철의 눈에 들어온 건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캔버스를 펼쳐 놓고, 스웨덴의 고풍스러운 건물을 자기만의 화풍으로 그리고 있었다. 색채가 정말 다채로웠다.

지이잉―

수철은 올드타운 끝에 있는 중고 음반매장을 구경하다가 전화가 진동해서 밖으로 나왔다.

―스웨덴에는 잘 도착했어?

“네, 어젯밤에 도착했어요.”―숙소는 괜찮고?

“네, 마음에 들어요.

―지금이라도 레베카를 거기로 보낼까?

“아니, 괜찮아요. 특별한 일도 없는데요 뭐.”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레베카가 멀리까지 올 필요는 없다.

―지난번에 말했던 노르웨이 별장 구입하는 거 말이야.

“네, 어떻게 됐어요?”―다들 신나서 난리지. 내가 그랬잖아? 상의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찬성이라고.

“하하, 잘됐네요.”

―다들 서로 가겠다고 벌써부터 난리야. 별장이 없으면 텐트라도 칠 기세야. 하하.

“하하.”

역시 예상했던 바였다. 이제 북유럽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공간이 생기게 됐다.

……?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류장에 서 있는 버스의 네온사인 같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

Kungliga Musikaliska Akademien

스테파노가 특강 한다는 바로 그 학교의 이름이었다.

수철은 버스에 올랐다.

* * *

스웨덴 왕립음악원은 영국에서 봤던 음악학교와 비슷했다. 스웨덴 사람들은 영국과 비교하는 것을 싫어한다지만 실제로 모습이 비슷했다. 수철은 안으로 들어가 크지 않은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수철은 클래식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음악은 들어 본 적이 꽤 있지만, 작곡가가 누구고, 어느 시대 살았는지, 어느 나라에서 활동했는지 자세한 건 모른다. 그저 멜로디의 특징으로 음악을 구별할 뿐이다. 그래서 스테파노가 특강을 제안했을 때 단호히 거절했다. 게다가 사람들 앞에서 강의한다는 것이 체질에 맞지도 않다.

수철은 학교 안을 두리번거리다 대강당이라는 푯말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미세하게 피아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철은 문 앞에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오래전 다혜를 만나러 학교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괜히 웃음이 났다. 그때 이후로 많은 변화가 생겼으니까.

갑자기 한 학생이 서둘러 뛰어오더니 조심스레 강당의 뒷문을 열며 머리를 집어넣고는 안을 살피다가 쓰윽 들어갔다. 수철도 재빠르게 그 학생의 뒤를 따라붙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마에스트로들의 강의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강당엔 엄청 많은 학생이 모여 있었다. 소규모 공연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스테파노의 말대로 전국 각지에서 특강을 들으러 다 모여든 것 같았다. 수철은 슬그머니 맨 뒤에 빈자리로 가서 몸을 움츠리고 앉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강당 앞 큰 무대에는 만찬회에서 인사를 나눴던 마에스트로 다섯 명이 서 있었다. 그랜드 피아노도 세 대나 놓여 있었다.

마에스트로들은 돌아가면서 서양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각자 맡은 시대 작곡가의 음악적 특징을 말하고는 피아노로 그들의 곡을 연주했다.

오늘은 지휘봉을 든 지휘자가 아니라 모두가 피아니스트였다.

“바로크 시대에는…….”

누군가는 바로크 시대를 얘기하며 바하와 핸델을 끄집어내고, 그들의 음악적 특징을 피아노로 들려줬다. 또 다른 마에스트로는 낭만 시대를 거론하며 쇼팽과 리스트의 음악적 특징을 얘기하며 피아노로 들려줬다.

마에스트로 스테파노와 로렌조는 고전 시대를 거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테파노는 모차르트를, 로렌조는 베토벤을 맡고 있었다. 재미난 건, 둘은 같은 시대를 얘기하면서 정작 피아노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갈렸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선율이 주는 특징이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스테파노와 로렌조의 결이 달랐다.

수철은 이 모습을 지켜보는 게 흥미로웠다. 둘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주장을 펼치며 학생들 앞에서 열띤 토론을 펼쳤다.

주장―주장하는 이유―그것에 관한 사례―다시 주장.

이 패턴으로 둘은 멈추지 않고 계속 주장을 이어 나갔다. 나중엔 다른 마에스트로들도 손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볼 정도였다.

확실히 둘은 상반될 정도로 결이 달랐다. 왜 음악계에서 두 명의 거장을 서로 비교하는지 알 거 같았다.

스테파노는 강의도, 연주도 자유로움을 중시하지만, 마에스트로 로렌조는 정통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결의 거장이 동시에 무대에서 강의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수철은 열띤 토론이 끝나갈 때쯤 슬그머니 강당을 빠져나왔다.

* * *

“잠시만 기다리게.”

스테파노는 차가 막히는 바람에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밖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스테파노는 별장으로 다가갔다.

……?

스테파노는 문 앞의 벨을 누르려다 멈췄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벨에서 손을 떼고 문에 귀를 붙였다. 피아노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스테파노의 눈이 커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건 수철이 치는 피아노였다. 선율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 앞에 바짝 귀를 붙이고 소리를 듣던 스테파노는 순간 동공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얼굴은 잔뜩 경직됐다.

자신이 오늘 특강에서 연주했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들려왔다. 수철이 연주하는 바리에이션(Variation, 변주)된 소나타는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선율이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입에서 거친 입김만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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